[한평우 칼럼] 르네상스(19)-페트라르카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르네상스의 문을 연 사람, 또는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깊은 산속 수도원에서 고대 라틴어 문서를 찾아내 번역하였고, 그것을 세상에 알렸다. 그것은 당시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스콜라 신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인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인생이 하는 모든 일은 진리에 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의인화함으로 보통 사람이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하도록 연막을 치지만.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 출신으로, 정치적으로 교황파였는데, 상대 당이 피렌체를 장악하자 가까운 아레조(Arezzo)로 망명했다. 거기서 아들 페트라르카를 출생했다. 그가 5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으로 갔고, 거기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 몽펠리에대학과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법학보다 라틴어 문학에 더 큰 흥
미를 보였고, 결국 문학가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교황청에 일자리를 얻어 아비뇽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페트라르카는 운명적으로 아비뇽의 한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오는 로르(Laure)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유부녀였는데 얼굴이 우윳빛처럼 맑고 희었다고 한다. 첫눈에 반했고, 그때부터 그녀는 그의 마음에 영원한 구원의 여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치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듯이, 그 후부터 그는 그녀를 연모하였다. 만남을 거절당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38세의 나이로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마음속에 결코 꺼지지 않는 활화산처럼 그녀에 대한 사랑은 시심의 원천이었고 문학의 질료가 되었다. 그녀야말로 창작의 모티브였다. 아니, 자신의 문학적 시작의 원천으로 삼기 위해 그녀를 우상화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녀가 사망한 후에 그녀에게 동정녀 마리아의 이미지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로르를 가공인물로 여기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녀를 백작의 부인(Laure de noves)으로 추정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죽자 곧 재혼했는데, 정작 그녀를 설핏 보았던 페트라르카는 평생 잊지 못하고 가슴앓이해야 했으니, 사랑의 감정이란 신비롭다 싶다.
만약 페트라르카가 평생을 연모했던 그녀와 맺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인간의 사랑이란 대체로 동물적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다만 아름답게 포장할 뿐. 창세 이후로 결혼한 아내를 위해,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위하거나 페르라르카가 로르를 잊지 못하여 했던 것처럼 수많은 소네트(Sonnet, 14행 서정시)를 지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인간은 왜 이처럼 정도에서 벗어난 길에 흠뻑 빠지고, 그런 중에 창작 의욕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문학과 예술이라는 본질도 다시 한번 성찰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박애주의자로 사랑을 심도 있게 그렸던 톨스토이는 정작 부인에 대해서는 가장 부실한 남편, 사랑을 눈곱만큼도 할애하지 않았던 무정한 자였으니 그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는 로마를 방문하는 중, 한니발(Hannibal, 247-183BC)을 물리친 스키피오(Scipio Africanus, 235-183BC)를 떠올렸다. 스키피오의 무덤이 아피아 안티카에 있어 찾아갔었는지 모른다. 왜 그가 위대한 장군 스키피오를 생각했을까? 세계를 1천 년 동안 지배했던 찬란했던 로마는 476년에 망하고, 당시 이탈리아는 빈약한 도시국가들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조국 피렌체는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서글픈 정황에서 로마의 찬란했던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감성적으로 뛰어났던 페트라르카는, 그래서 세기적 영웅 한니발을 물리쳤던 스키피오를 찬양하는 서사시 ‘아프리카’를 지었는지 모른다. 이 작품으로 로마시의회에서는 그에게 계관 시인의 명예를 주었다. 과거의 찬란했던 로마가 이제는 숨죽이며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페트라르카를 통해 자존심을 잠시라도 회복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180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언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언어인 라틴어, 그 언어도 이제 수명을 다하고, 프랑스어로, 히스파니아어로, 이탈리아어로,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유일하게 바티칸에서만 중요 미사에서 통용하고 있을 뿐….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그는 유독 라틴어를 고집했다. 존경하는 단테는 이미 반 세기 전에 신곡을 이탈리아 방언으로 기록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전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지표로 로마의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성인들이 심취했던 스토아 철학을 소망했는지 모른다.
당시 교황청은 아비뇽으로 옮겨감으로 실망을 주었고… 그는 그 후로 이탈리아어 속어로 서정시를 썼고, 그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은 것이 ‘칸초니에레’다. 연인을 추억하며 쓴 이 시들은 유럽의 시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훗날 세익스피어도 그의 소네트를 모방했다고 하고.
그는 사생아를 두 명 두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1374년, 그는 이탈리아의 파도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향이 아닌 외지에서. 그는 중세의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주의로 변화하는 시대에 작품들을 썼다. 그의 사상은 신의 은총과는 무관하게 자유의지만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스토아 철학 사상을 존중하고 있다. 그로부터 르네상스의 인문학은 가감 없이 이성을 극대화하는 길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어거스틴 이후 유럽은 모든 것을 신에 의지하도록 하였으나, 페트라르카는 어거스틴이 연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열어젖힌 자로 치부된다. 하나님을 경험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이론을 신학에 적용했지만, 페트라르카는 키케로의 인문학에 함몰당했다 싶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