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참상 화폭에 담아냈던, 월남 미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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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전쟁과 예술

김원, 후퇴하는 국군 행렬 포착
이수억, 리어카 피난 모습 묘사
함대정, 필선 난무하는 추상화
최영림, 아내·딸 사별 아픔 표현
윤중식, 피난민 28점 수채화로
작품 통해 전쟁의 공포 되새겨

▲이수억, 6.25 동란, 123x189.5cm, 1954년(1987년 개작), 캔버스에 유채.

▲이수억, 6.25 동란, 123x189.5cm, 1954년(1987년 개작), 캔버스에 유채.

월남 미술인들은 일제시대부터 서울에 와 있던 미술인을 비롯해 해방 후 내려온 미술인, 1.4후퇴 때 피신 온 미술인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1.4후퇴 때 월남한 작가들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하는 군인들과 함께 피난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난민과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월남 미술인들 역시 자유를 찾아 남행을 결정했지만, 피난길 역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먹을 것, 마실 것, 심지어 잘 곳과 덮을 것조차 없었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이들을 짓눌렀다.

인명 손실과 정신적 피해, 상흔까지 생각한다면 그 피해 규모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이들은 피와 눈물로 점철된 전쟁 상황을 화폭에 담았는데, 그들 자신이 전쟁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김원(1912-1994)의 ‘1.4 후퇴(1956년)’는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행렬을 포착하고 있다. 김원은 1.4 후퇴 시 피난 도중 칠순 노모와 아내가 숨졌을 뿐 아니라 두 아들 역시 피난의 북새통에 헤어졌으나, 전쟁이 끝난 후 가까스로 고아원에서 재회했다.

그림 한복판에 흰 한복을 입은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등장한다. 바로 작가의 노모를 모델로 하고 있다. 철없는 손자가 기나긴 피난길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재촉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 왼편에는 동생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언니의 모습, 이를 안쓰럽게 지켜보는 아버지, 그리고 아이를 끌어안고 떠나온 고향을 바라보는 여인이 눈에 띈다.

이에 비해 이수억(1918-1990)의 ‘6.25 동란’은 좀 더 직접적으로 전쟁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6.25 동란’은 리어카에 짐을 가득 싣고 피난길에 오른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온갖 집안 살림을 실은 리어카를 끄는 남성과 그 옆으로 지게를 진 또다른 남성이 눈에 띈다. 중년 여성은 큼지막한 이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한 팔에는 수탉을 움켜쥐고 있으며, 동생을 업은 소녀는 지친 듯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있다. 뒤를 따르는 남동생인 듯한 소년도 피난이 힘겨운 듯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함대정(1920-1959)의 ‘무제(1950)’는 필선이 난무하는 추상회화이다. 추상작품이지만 어떤 사실적인 작품보다 다가오는 울림이 크다. 낡고 바랜 색조를 통해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전쟁의 나날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필선들은 일정한 방향 대신 갈 바를 정하지 못한 채 혼란 속에 휩싸여 있다.

격정적 필선을 통해 시대를 거역하고 싶은 몸부림과 자아의 격앙된 정서를 감지해볼 수 있다. 그림을 보고 있자면 포화를 맞아 처참하게 파괴된 모습과 무서운 굉음을 떠올리게 한다.

‘주호회’ 동인이었던 최영림(1916-1985)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금강산에 피신해 있다가, 국군과 함께 남하한 경우이다. 아내와 어린 세 딸이 해주까지 내려왔다가 길이 막혀 돌아가는 바람에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아픔을 최영림은 ‘여인의 일지(1959)’에 새겨놓았다.

화면에는 형체를 구분할 수 없는 네 인물이 등장한다. 목판화를 연상시키는 검은 선과 면, 어두운 색채로 인해 인체는 어떤 불길한 기운에 휩싸이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형체를 목격하게 된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전면의 아이와 엄마는 길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사람 앞에서 애원하거나 저항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중식, 전쟁 드로잉, 19.9x26.5cm, 종이에 수채, 크레용 등, 1951년, 사진제공 성북구립미술관.

▲윤중식, 전쟁 드로잉, 19.9x26.5cm, 종이에 수채, 크레용 등, 1951년, 사진제공 성북구립미술관.

윤중식(1913-2012)은 일본 유학 후 보성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있었으나, 해방 후 공산주의 지배체제가 공고해짐에 따라 탄압 대상으로 몰렸다. 탈출을 더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윤중식은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 와중에서도 윤중식은 월남 과정에서 목격한 피난민들의 모습을 그때그때 종이에 옮겨 28점의 수채화를 제작했다.

불바다가 된 평양, 황급히 길을 떠나는 피난 행렬, 추위에 떠는 아이들, 헛간에서 잠시 눈을 부치는 사람들, 소달구지에서 떨어져 다친 아이들,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피아를 가리지 않는 전투기의 폭격과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는 가족 등의 장면을 담고 있다.

“먹지 못하고, 주야를 막론하고, 남으로…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작가는 첫 번째 그림 뒷면에 그의 심경을 적어놓았는데, 얼마나 절박한 심경이었는지 가늠케 해준다.

윤중식은 평양을 등지고 개성으로 향할 때 온갖 고생을 다 했다. 그림은 크게 원경과 중경과 전경으로 삼등분돼 있다. 원경의 공중에는 하늘을 가르는 폭격기 두 대가 득달처럼 달려오며 포격을 퍼붓고 있고, 중경의 피난민 대열은 그 순간 행렬을 이탈하며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에 매달려 울부짖는 아이도 목격된다.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죽은 사람은 부지기수였지요. 깊은 상처를 입고 피 흘리며 울부짖는 신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윤중식, 윤대경, 『할아버지의 양손』, 상수리, 2023. 73쪽).”

그의 생애에서 1951년 6월 19일은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그의 가족이 해주 근방에 왔을 때였다. 전투기가 갑자기 나타나 포격을 가하자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그의 가족 역시 카오스 상태에 빠지게 됐다. 너무 놀라 아내와 장녀와 떨어지는 순간,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됐다. 간신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아들과 등에 업고 있던 막내딸은 간신히 살릴 수 있었으나, 피난 도중 굶어죽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작가는 장녀를 찾기 위해 고아원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끝내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윤중식은 “몇십 년 동안 밤이면 꿈에서 혜경이(큰 딸)가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 깨어나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윤중식, 윤대경, 『할아버지의 양손』, 75쪽).”

남한에 정착한 뒤 발표한 그의 작품에는 유독 새가 자주 눈에 띈다. “내 일생이란 게 그저 고향가고 싶은 생각과 헤어진 딸을 보고 싶은 생각으로….”

새처럼 자유로이 날면서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보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귀의(歸依)의 감정에 둘러싸인 서정적인 풍경화를 탄생시켰다.

월남 미술인들의 작품은 역사의 격랑에서 헤어지거나 잃어버린 가족, 피난민, 동족의 아픔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공포와 비통으로 얼룩진 6.25의 과거를 되새기게 된다. 인간의 도덕의지를 시험하는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그런 기억을 다시 되뇌며 붓을 잡는 미술가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진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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