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고려대 북한통일연구원센터 연구원, SPN(서울평양뉴스) 북한분석실장, 본지 <정교진의 북한포커스>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며 북한의 실체를 날카롭게 분석해 온 정교진 박사가 초대 기독교의 역사가 서린 튀르키예(옛 터키)를 다녀왔다. 북한 전문가가 아닌, 12년 전 기도하며 마음에 품었던 ‘선교사’의 심정으로 내디딘 발걸음이다. <선교지 중보기도사역 센터>를 세우고 첫 번째 방문지로 선택한 튀르키예 선교지 탐방 중보기도 일지를 크리스천투데이가 독자들과 공유한다. -편집자 주
선교지 중보기도사역 시작
12년 전 겨울, 박사과정을 들어가고 싶어 기도원 올라갔을 때, 우선 복음을 전하라는 감동에 고향에 내려가서 한 달, 강원도부터 충남까지 전국을 돌면서 5개월 동안 순회전도를 했었다. 그 후,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학위를 마치고 북한학자가 되었다.
몸이 불편해서 한 달 전, 다시 같은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 이번에는 선교지 탐방 중보기도사역으로 이끄셨다. 그 첫 번째로 ‘서머나’(현, 터키 이즈미르)를 정해 주셨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서머나(이즈미르)를 가다
8월 27일, 저가항공으로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28일 새벽 튀르키에 이스탄불 공항을 경유해서 최종 목적지인 이즈미르(İzmir)에 오전 아침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바로 근처에 고대 유적지와 더불어,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감독이었던 순교자 폴리캅(Polycarp, AD69-156)이 사역했던 교회건물(터)이 있었다. 바로 방문했지만, 아쉽게도 출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사 중인 상태는 아니었다. 관리인도 영문을 모른다고 하면서 얼마 전부터 개방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바로 옆 고대 유적지는 관람객을 받으면서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울타리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면서 어떤 건물이 폴리캅 순교교회인지 행인들에게 물어봐도 정확히 아는 이들이 없었다. 이곳 현지인들에게는 관심사 밖의 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99.8%가 무슬림이다. 초대 기독교 지도자에 대해 알 바 아니며, 기독교 유적지에 대한 보존에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둘째 날, 땅 밝기 기도하며 시내를 돌던 중, 시내 중심가 쪽에서 사도요한기념교회를 만났다. 이즈미르의 대표적 공원인 Lunapark 바로 주변에 있는 만큼 위치는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여기도 마찬가지로 개방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서 하자가 없어 보이는 교회였지만, 외부인(관광객)의 출입을 봉하고 있었다. 철문으로 만들어진 대문이 굳게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면의 모든 담장은 뾰족한 쇠창살과 더불어 철조망까지 위에 두르고 있었다. 개미 한 마리도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철문 중간에 가로로 뚫린 틈이 있어 그나마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교회 건물 앞에 사도 요한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2미터 남짓했고, 성경책을 들고 있는 요한의 어깨 위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동상 전체가 새 오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흔적이 역력했다.
“아, 역시 무슬림 국가답다”라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 나라가 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지만, 속살은 안 그렇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한 심중을 더 굳게 만든 것은 철문 양 옆 기둥에 걸린 교회 문패였다. 철판으로 위에는 튀르키예어로, 아래에는 영문으로 되어 있었다. 영문은 아래와 같다.
Catholic Cathedral Basilica of SAINT JOHN Apostle and Evangelist
그런데, 양 옆 문패에 모두 Apostle(사도) 글자를 지우려 한 흔적이 뚜렷했다. 유독 이 글자만 훼손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확 들어왔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현지인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아닌가.
그들에게 있어서 사도는 오직 알라의 대리자인 무함마드(Muhammad)밖에 없었던 것이다. 튀르키예는 비록 세속적 무슬림 종교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무슬림 국가 중 가장 많은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현지인들 또한 친절하고 손님을 잘 접대하는 환대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종교(신앙) 문제만큼은 절대 양보와 타협이 없어 보인다.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아래와 같은 말이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튀르키예에서 선교사가 일평생 1명의 신자를 얻으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복음이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는 한탄의 소리다. 실제로 복음화율이 0.005%로 세계 최대의 미전도 종족이라고 불리는 나라이기도 하다. 시장통 안에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한가운데도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었고, 식사 전후로 틈틈이 참배하는 현지인들의 모습 속에서 신앙생활이 일상화됐음을 보았다. 너무나 높은 벽을 실감한 하루였다.
셋째 날 아침, 요한복음 10장 16절을 읽으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우리(pen)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로 “장차 내가 인도하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듯했다. 맞다. 이곳은 하나님이 포기할 수 없는 땅이다. 에덴동산이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곳이며, 하나님 심판에 역사의 흔적인 노아의 방주가 있는 아라라트(Ararat)산도 품고 있는 땅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낸 하란(Harran)도 있으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었던 땅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이스라엘 유대 땅에 이어 ‘제2의 성지’로 요한과 안드레,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던 땅이며, 그들의 피와 땀으로 기독교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다시금 용기를 내어 땅밟기 기도와 더불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올라왔다. 흰 티셔츠를 사서 성경구절을 적어 입고 다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까운 지인 선교사에게 문의를 하니 만류를 해서 그냥 땅밟기 중보기도만 하고 돌아왔다, 마치고 나면서 그냥 ‘JESUS’라고만 써서 다녔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이즈미르를 떠나는 날 아침, 구걸하는 한 여인의 눈빛에서 신음하고 절규하는 이곳 영혼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간의 돈을 손에 쥐여 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베소(셀주크)를 가다
이즈미르에서 셀주크(Selçuk)는 전철로 두 시간 못 미치는 거리다. 환승을 잘못해서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한 저녁에 도착했다. 시내에 접어들자마자 이즈미르와는 색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대 유적지가 식당가 길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지인들의 생활문화공간으로 그들의 놀이터, 쉼터로 사용되는 듯했다. 도로변을 끼고 쭉 배치된 식당 자리 곳곳에서는 한창 노름을 즐기고들 있었다. 이즈미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얼핏 보니, 중국의 마작과 비슷해 보였다. 다른 골목 식당가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중년을 넘어선 남성들이었지만, 간혹 젊은이들도 있었고 우리네 장기처럼 시간 때우기 놀이도 있었다.
삶에 찌들고 지친 모습들은 아니다. 제법 여유로움이 풍겼다. 대표적인 유명 관광지다보니 가계 사정이 다들 괜찮아 보였다. 사시사철 외국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밀려드니, 구석진 음식점까지도 자리를 다 채울 만큼 관광특수를 누리는 지역이다. 특히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만큼, 성화를 비롯한 기독교 상품들이 가게마다 즐비했다. 물가도 이즈미르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비쌌다. 정말 기독교 덕을 톡톡히 보는 지역이다. 육신적으로는 풍족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노름이 성행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이곳 현지인들은 늦은 밤까지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가족들과 동료들과 식당에서 야외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이즈미르 시내는 밤 10시만 되면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거리에도 적막이 깔리는데, 여기는 밤 11시가 초저녁 같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밤 문화가 매우 일상적이다. 주인들을 따라 나온 개들도 서로 장난치며 마냥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늦은 밤까지 여흥을 즐기다 보니, 다음 날 가게 오픈은 거의 오전 11시쯤이다. ‘유유자적’이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주일 아침, 숙소에서 멀지 않은 아야술룩(Ayasuluk) 언덕 기슭에 위치한 사도요한교회를 찾았다. 이 교회는 서기 6세기 초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의해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길이 110m의 2층 건물, 7세기 중엽에 아랍에 의해 거의 파괴됨)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개방이 안 돼서 주변 고대유적지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이 박해를 피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온 지역이 에베소라고 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셨다. 30분 이내 거리에 성모 마리아 집으로 알려진 곳도 있다.
숙소를 옮기게 되었고, 다음날 월요일 아침식사가 제공되는 루프탑에 올라가니 저 멀리 아야술룩 언덕이 보였고, 사도요한교회도 한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가슴이 울컥했다. 사도요한교회를 배경으로 대학원 온라인 강의를 진행했는데, 평생 간직할 만한 추억이 되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켈수스(Celsus) 도서관과 야외 원형 대극장(25,000명 수용)이 있는 구 에베소를 방문했다. 이곳은 로마의 문명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인구 20만이 넘는 거대한 문화도시였고,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기독교인들이 특히 이곳을 찾는 이유는 켈수스도서관이 두란노서원의 후신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 도서관은 서기 105년경 소아시아 총독이 건축하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이 도서관 명칭이 되었다. 이 도서관이 세워지기 전 바울이 2년 동안(서기 55년부터)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던 두란노서원이 있었다고 한다.
두란노서원은 에베소 철학자인 티란누스의 강연장으로, 바울은 이 장소를 빌려 강론을 했던 것이다.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는데, 당시 에베소는 날씨가 상당히 무더워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한 뒤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바울과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쉬는 시간에 피곤과 싸워가며 복음의 열정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났고, 성경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해 동안 이 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성경 말씀대로 에베소를 비롯해서 소아시아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고,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7개 교회들도 이때 세워진 것이다. 그 복음 확산의 진원지인 장소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서관 앞쪽에 아고라(정방형 100m)가 있고 그 중간에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조용한 작은 언덕 위에 앉아, 한참 동안 바울을 회상했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열정을 닮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시간이었다.
터키를 떠나며…
구 에베소 관광 지역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신 에베소인 셀주크 시내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다들 패키지로 여행을 온 까닭이다. 성지 탐방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는 선교지 땅밟기 중보기도사역으로 왔기에,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들의 생활, 문화, 더 나아가 신앙의 행태(수준)도 알고 싶었다. 현지인들의 복음의 수용성을 확인할 수 있는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앞서 밝힌 대로, 이곳 현지인들의 99.8%가 무슬림이다. 현재까지의 복음화율은 0.005%이다(4,290명/8,580만 명). 복음의 장벽이 높다는 것을 이즈미르시내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온몸으로 실감했었다.
그런데 셀주크를 방문해서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바로 그들 속에 뿌리박혀있는 민속(토속)신앙 때문이다. 이것은 무슬림 신앙과는 하등 무관한 것으로, 터키인들만의 무속신앙에 가깝다. 사실 셀주크는 이즈미르보다 무슬림의 향기가 더 짙었다. 아침 저녁으로 모스크에서 내보내는 기도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고 필자의 숙소까지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현지인들에게는 정형화된 종교생활 패턴일 것이다. 종속적 이끌림이라고 할까.
그런 그들이 그 종교적 틀에서 빗겨난 풍습(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악마의 눈’으로 여기서는 ‘나자르 본주’(Nazar Boncuğu)라고 부른다. 나자르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는데, ‘눈’ 또는 ‘보다’라는 의미이고, 본주는 튀르키예어로 ‘구슬’이라는 뜻으로, 튀르키예식 부적이다. 형태는 중간에 파란색 눈 모양을 한 푸른 구슬로 되어 있다. 현지인들은 이것이 불운을 막아 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강한 악마를 모셔서 약한 악마(잡귀)들을 물리친다는 논리다. 그래서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 다양한 장신구로 몸에 지닌다. 가정이나 상점들은 문 앞에 걸어 놓는데, 크기와 모양새는 천차만별이다. 여기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진심인지 셀주크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성도들이라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아래의 성경 말씀이 떠오르게 될지 모른다.
“만일 사탄(악마)이 사탄(악마)를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마 12:26)
그런데 이곳 현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적용하는 꼴이다. 신기한 것은, 무슬림도 알라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를 저렇게 선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과 가족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세속적 이슬람을 추구하는 튀르키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결은 다르지만, 우리네로 보면 교회 다니면서 집안에 복조리를 달아 두는 경우라고 할까. 이처럼, 이 땅은 겉보기와는 달리 이슬람 신앙으로 굳어진 곳은 아니다. 복음이 들어갈 틈이 작게나마 보인다.
정교진 소장(선교지 중보기도사역센터, 북한학자)
현) SPN(서울평양뉴스) 북한분석실장으로 <노동신문분석>, <노동신문돋보기> 필진.
현) 고려대 북한통일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장로교 통합측 총회 통일연구소 전문위원
전) 2001년-2005년, 중국에서 북한선교(탈북자 사역) 활동
2005-2009년, 기독교한국침례회 국내선교회 북한선교부장
‘역사위에서다’ (장편소설, 2019년) 저자.
2021년, 침례교단(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전) 크리스천투데이 <정교진의 북한포커스>, <정교진 칼럼> 필진.
‘성경에서 말하는 전염병과 한국교회의 자세’(2020.3.17) 특별기고가 큰 호응을 얻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