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북한 체제 예술과 기독교 미술가들
해방 후 北 살던 기독 미술인들
종교 탄압, 표현의 자유도 위협
홍종명·김학수·박수근 등 월남
전재민과 경계인 고충 있었지만
근면성과 탁월성으로 성공 거둬
한국 미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
6.25 전쟁을 전후해 한반도에서 대규모 민족 이동이 발생했다. 남의 화가들이 북으로 올라가거나 강제 연행됐고, 반대로 북의 화가들이 자유의 땅을 찾았다.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총공세에 밀려 1.4 후퇴가 촉발됐는데, 그때 북한에 거주하던 주민들과 함께 많은 미술가들이 월남했다.
왜 그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남한을 찾았을까.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고 기독교인에 대해서 탄압을 가했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큰 기독교가 “노동대중 속에 종교적 환상과 노예적 굴종의 사상을 퍼트린다”(심일섭, “북한의 종교정책과 기독교신앙운동”, 『기독교사상』, 1975년 6월호, p.92)며 기독교를 사상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을 반동계급으로 분류해 교육적 불이익을 줬고,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재산까지 몰수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숙청, 불법 감금, 고문, 추방, 살해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기독교인을 핍박했다.
해방 직후 지주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토지개혁과 이에 반대하는 지주들에 대한 무력 진압으로 남한에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일생동안 피땀을 흘려 장만한 토지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피해는 북한의 기독교 미술인도 면하기 어려웠다. 미술인들은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을 받은 데다 표현 자유의 권리마저 위협받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기본 정책은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예술 활동을 지원함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둔다면, 공산주의 체제에선 문화 활동에 대한 간섭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
이런 특성은 정치와 예술을 분리시키지 않는 ‘사회주의 예술’의 특성에 기인하는데, 여기서 예술가들은 사회주의를 선전하고 당 정책을 받드는 선전대 역할을 한다.
양국주에 따르면, 6·25 전쟁 전에도 민족 해방의 은인이라며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무려 9만 점이나 그렸고, 1946년 한 해에만 25만 점의 선전화를 그렸다고 한다(“북으로 간 화가들”,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심지어 대학조차 공산주의 체제선전의 기지로 이용됐는데, 1947년 개교한 평양미술전문학교(후에 평양미술대학으로 개칭)에서는 김일성 동상이나 대형 모뉴먼트, 선전탑, 플래카드 등을 제작했고, 조형연구소를 정치선전 목적으로 활용했다.
북한의 예술가들은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고 모뉴먼트를 만드는 등 당의 나팔수 역할을 강요받았으나 더 이상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중에서도 기독교 미술가들의 입장은 더 곤란했다. 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도, 예술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 대한 무차별적 탄압과 표현의 권리에 대한 갈구가 이들의 북한 탈출을 앞당기는 요인이 됐다.
홍종명(1922-2004)은 일제시대부터 철저한 기독교 집안으로 부친이 교육자이면서 감리교회 장로인 데다가, 장인 또한 이피득 목사로 공산당 세력에 대항해 일제 때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던 감리교 서부연회를 재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의 집안은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였고, ‘요시찰 대상자’였다.
홍종명 또한 만만치 않았다. 공산당은 그에게 선전화를 강요했으나,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만 그렸다. 그 바람에 반동 세력으로 몰려 교사생활은 물론 작품 활동까지 막혀 버렸다.
홍종명은 국군의 평양 탈환 이후 얼마 안 되어 국군과 UN군이 퇴각할 때 아내와 두 남매 아이를 데리고 월남했으나, 노부모와 다섯 살짜리 장녀를 남겨 놓음으로써 기약 없는 헤어짐이 되고 말았다.
김학수(1919-2009) 역시 성화신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는데, 공산당의 기독교 탄압 여파로 교장이 납치되고 학교는 폐교됐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도 김학수는 동양화 화론과 화법 교과서인 ‘개자원 화보’를 보며 그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고 주위 인사들이 검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나도 혹시 잡혀갈까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평양 탈환도 잠시, 재차 전세가 위급해지자, 더 이상은 북한 체제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후퇴하는 국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월남할 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아내와 두 아이로 인해 ‘가장 큰 죄인’이 되어 산다고 고백하였다.
박수근(1914-1965)은 정치 노선으로 탄압을 받았다. 박수근이 출석한 금성감리교회 노목회자 한사연 목사는 조선민주당 지역 책임자로 박수근을 추천해 지방 인민위원회 금성면 대의원으로 당선시켰다.
핍박은 그 이후 한층 노골화됐다. 툭 하면 박수근을 불법으로 연행해 취조를 하는 등 괴롭혔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야수의 본색을 드러냈다. 박수근은 낮에는 산 속에 들어가 지내다 밤이면 집으로 내려와 지내야 했다. 보위부 군인들은 가족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면서 온갖 공갈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박수근과 일가족은 이러한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남행길에 오르게 됐다.
황용엽(1931- )은 6.25 전쟁 발발 후 지하생활, 평양에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인사들과 기독교인들을 사살하는 장면, 지하실에 집단 감금당했을 때의 기억, 또 월남 후 국군에 입대하여 중부전선에서 전투중 총상을 입었을 때의 충격, 평양 집 어머니와 형제들과의 아쉬운 이별 등 그의 기억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을 간직하고 있다.
해방 전까지 그의 집안은 넉넉하게 살았지만, 김일성이 들어서면서 땅과 재산을 빼앗겨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그에게는 친어머니와 함께 갓난아이 때부터 길러준 유모가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유방 절제 수술로 수유를 못하게 되자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동네 행상 한 분이 황용엽을 살린 것이다. 기독교 사랑으로 극진히 키워준 유모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월남 작가들에게 6.25 전쟁은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족과도 헤어져야 했다. 피난길에 포격으로 가족이 사망하거나 생이별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충격은 그들의 삶에서 아물지 않는 상처로 자리잡았다.
6.25 전쟁은 천부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허황된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악행의 표본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처절한 상흔(傷痕)을 대하는 것이요 비극적 시대상을 접한다는 것, 그리고 자유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된다.
그들은 남한에 와서도 전재민(戰災民)과 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또 다른 고충에 의해 압박당했다. 그러나 월남한 기독교 미술가들은 남한에 와서도 근면성과 탁월성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많았고, 한국 미술을 발전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전후 미술계의 이해에 있어 그들을 빼놓고 논의할 수 없을 만큼, 비중이 높으며 괄목할 만한 예술적 유산을 남겼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