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와 개혁교회 6] 교재 개발
칼뱅, 신앙교육서 두 번 출판
츠빙글리는 청소년용 교육서
불링거, ‘기독교 신앙의 요해’
성경과 교리를 재료로 사용해
훌륭한 요리 만들 교사들 있어
4. 개혁교회를 다음 세대에 상속하기 위한 방안
4) 신앙교육을 위한 교재 개발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신앙교육서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신앙교육서가 단순히 신앙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개혁된 교회와 신앙정신을 유지해 다음 세대에 상속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36년 파렐의 설득을 받고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한 칼뱅은 체계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구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바른 교리로 교육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신앙교육서’를 두 번에 걸쳐 출판했다. 1542년에 불어로 2차 신앙교육서를 출판하고 난 3년 뒤 동일한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는데, 이것이 ‘제네바 교리문답’이다.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3세는 성만찬 논쟁으로 신학적 혼란을 겪었기에, 로마가톨릭의 잔재를 없애고 예배모범이 포함된 교회법과 바른 내용을 가르칠 교안인 요리문답서를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로 하여금 만들게 했다.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는 청소년들의 신앙 양육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사실은 1523년 ‘어떻게 아이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킬 것인가’란 제하의 글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 글은 자신의 의붓아들인 게롤트 마이어 폰 크노나우(Gerold Meyer von Knonau)에게 헌정된 것이지만, 자신의 의붓아들을 포함해 당시 모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다.
다음 인용구를 참조하라. “사랑하는 게롤트야! 내가 두서없이 이 글을 너에게 쓴 것 같지만, 지금까지 이 글의 내용은 훌륭한 젊은이를 양육시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내가 믿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것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란다.”
츠빙글리는 1523년 1월 교회학교 개혁을 제안했고, 그에 따른 실천으로 1523년 8월에 ‘청소년 신앙교육서’을 출판했으며, 다음 달인 9월 의회 승인 가운데 학교 개혁을 단행했다.
취리히의 신앙교육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하인리히 불링거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요해(1556)’와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1559)’를 집필했다.
‘기독교 신앙의 요해’는 학문적 성격보다는 신자들을 바른 진리로 섬기기 위한 목회적 관심 속에서 저술했고,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는 1559년 취리히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저술했다.
이 두 권의 신앙교육서를 집필했던 불링거의 관심은 종교개혁 이후 세대를 위한 신앙교육은 믿음과 삶이 신앙지식과 경건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Refomed Heritage Books’ 출판사에서는 연령에 맞는 성경책과 교리문답서를 비롯해 신앙전기, 교회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교재를 만들어낸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이런 책을 써낼 수 있는 저자가 있기 때문이다.
R. C. 스프로울은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동화책도 저술했다. 그러한 그의 책은 『왕을 태운 당나귀』(The Donkey Who Carried a King), 『왕자의 독이 든 잔』(The Prince’ Poison Cup), 『더러운 옷』(The Priest With Dirty Clothes), 『빛의 요정들』(The Lightlings) 등이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는 재료를 잘 요리해서 먹게 하기보다, 원재료를 통째로 주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성경 원리에 맞지 않다. 갓난아이에게는 젖을 주어야 하고, 장성한 자에게는 단단한 식물을 주어야 한다(히 5:12-14).
한국교회 안에도 성경과 교리를 재료로 사용하여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교사들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맛깔스러운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5) 신앙 교육의 실제
칼뱅의 요리문답서는 루터의 요리문답서와 비교할 때 분량이 더 많았다. 이에 칼뱅은 이것을 55개로 나누어 매주 한 장씩 공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처음 성찬식에 출석하는 것을 허락받기 전에, 목사가 각 어린이들을 시험하고 그 시험에서 요리문답의 내용 전체를 요약하게 하였다.
제네바의 어린이들은 신앙의 본질을 반복해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매 주일 오후 요리문답서로 엄격히 훈련받았다. 출교와 교회 권징에 대한 교육까지 마친 학생은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할 준비를 하게 되고, 그 학생은 교육의 전 과정(신앙고백, 십계명, 기도, 그리고 성례)에 관한 시험을 통과한 후 비로소 성찬식에 참석하도록 허락받았다.
성인들도 같은 방법으로 신앙교육을 받도록 돼 있었다. 1557년 말, 감독원은 아직도 자기 신앙을 설명할 수 없던 다섯 명의 노인을 발견하고, 가정교사를 채용하여 다음에 있을 공식 성찬 예식 때까지 요리문답서를 공부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유럽 도시 중 제네바만큼 잘 교화되고 엄격한 권징에 익숙해 있는 도시는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요리문답과 설교와 교회 권징을 통해서 제네바의 전 세대를 철저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교육했기 때문이었다.
취리히에서는 시의회가 인정한 신앙교육서가 1년 혹은 2-3년 주기로 매 주일 교회에서 해설되고 가정에서도 사용됐다. 주일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은 교회 교사로부터 믿음의 내용을 배웠고, 주일 저녁에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질문했고, 주중에도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서 내용을 교육시켜야 했다.
신앙교육은 프리드리히 3세가 다스리고 있었던 팔츠에서도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우르시누스에 의해 작성된 요리문답서는 매 주일과 휴일, 설교 전 목사가 요리문답의 한 부분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회중에게 읽어주어야 했다.
총 129문으로 구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아홉 번으로 나눠 낭독했고, 열째 주에는 회중 각자의 소명에 대한 성경구절을 낭독했다. <계속>
최덕수 목사(현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