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 칼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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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채우는 위로의 영성이 시급하다”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글을 열면서

2024년 7월 초, 서울시청 주변에서 참극이 발생했다. 급발진을 주장하는 운전자에 의해 10명 이상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온 나라가 참담한 인명 사고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의 한복판, 시청 주변에 대한 기억에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희망찬 메트로폴리탄 서울이 암울한 분위기 속에 가라앉는다. 밝고 활기찬 공간이 어두운 기억으로 채워질까 안타깝다.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은 분들과 그 유가족들께 하늘의 안식과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하면서, 우리 모두가 삼가 고개 숙인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이 아름다운 기억과 회복의 영성으로 채워지게 되기를 기원한다.

1. 인간은 공간적이다

모든 인간은 공간(space, place)과 연관짓는다. 공간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면, 그 호적에 시간과 공간이 새겨진다. 어느 날 어느 곳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국가는 그 영토에서 태어나는 아이에게 주민번호를 부여한다. 만약 주민번호를 갖지 못한다면 공적 활동에서 제외된다.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중국에는 주민번호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는데 가히 유령인간 취급받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공간에 종속되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 첫 번째, 그리고 깊고 깊은 잠재적 무의식을 새겨넣은 공간이 고향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본원적 그리움을 갖게 한다. 언제든 회귀본능을 일깨우는 곳이 고향이요 고국이다. 누구나 한 번은, 아니 영원히 돌아가고 싶은 집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공간의 의미를 영적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a). 영원한 본향이 지상에서는 따스한 사랑이 깃든 가정이요 고향으로 비유된다. 생명의 존재인 사람의 공간은 그러므로 본래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온기의 이 공간은 현재 어떠한가? 실존주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릴케(Rilke)는 현대인을 공간과 연결해 비유한다. 19세기인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인 20세기에 들어와 그 격변해 버린 인간 실존에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이들이 현대인이다. 그들은 자국이기주의, 민족주의, 팽창주의를 증오로 표출하면서 세계 1차 대전으로 대치했고, 서로 총칼을 들이대는 참극을 연출했다. 섬세한 감정으로 세계를 노래하려던 릴케의 눈에 고향은 이미 파괴되어 버렸다. 현대인들은 치열했던 전선에 시신으로 엎드러진 형상처럼 불안의 시대에 진입해 있는 것이다. 포화에 흐트러진 영혼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고향이라는 공간을 상실한 이들이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이 본향을 사모하듯, 인간의 고향을 회복하라고 외친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시인의 절망은 어쩌면 현재 21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예언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돌아갈 집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공간은 그만큼 온기를 잃어버리고 냉랭해지고 있다.

2. 기억의 공간

우리나라 수도 서울, 모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대표적 공간이다. 조선 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근대와 현대사에 숨가쁜 역사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구한말, 한일합병, 3.1 독립만세 운동, 일제강점기, 8.15 광복, 7.17 제헌절, 6.25 전쟁, 4.19 혁명, 60년대 경제개발과 군부 독재, 민주화 운동, 88올림픽, 문민 정권시대에서 2002년 서울 월드컵,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사를 관통해 흘러가는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서울이다. 서울에 사는 시민이거나 아니거나 관계없이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동시대인이라면 서울의 여러 얼굴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기억의 공간>이라는 테마로 생각해본다면 먼저 숭례문을 들 수 있겠다. 인천에서 서울로 유학온 필자는 어느 날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태평로(서울시청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에 나가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당시 ‘군인 아저씨’들은 정말 멋져 보였다. 완전군장으로 무장한 그들은 어린 내 눈에 용감무쌍 영웅 그 자체였다. 월남이 어딘지도 몰랐던 나이에 그저 목청이 터져라 노래불렀다. “맹호부대 용사들아!” 태평로를 지날 때마다 내 기억에는 당시 “월남파병군인”들과 그들을 우러러 환호하던 우리 꼬맹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그 뒤 철 들어 월남 전쟁의 실상과 우리 군대의 비애를 알게 된 때, 나는 무기력했고 태평로는 말없이 수많은 차량 행렬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광화문. 기억의 공간으로 광화문은 나뿐 아니라 국민 모두의 역동적 역사공간임에 틀림없다. 광화문 쪽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는 언젠가 광화문 앞 “중앙청”(일제 총독부 건물로 1995년 철거) 앞에 탱크가 도열해 있는 풍경을 보았고(서울 위수령), 곧 이어 대학생과 시민들이 시위로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그 뒤 대학생이 된 필자는 직접 민주 시위대에 합세하여 광화문 네거리를 최루탄 연기 속에서 행진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종로2가에서 청계천 지나 남대문시장, 서울역, 남산 주변으로 시위대들은 민주항쟁의 이름으로 시위를 계속했다.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며. 광화문을 중심으로 세종로는 그런 기억으로 가득하다. 세종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뜨겁게 달아 있다. 아스팔트 때문이 아니라 뜨거운 역사 현실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새겨넣는다. 그것은 집단 무의식이 되거나 정치 의식, 시민 의식으로 역동적 힘을 얻어 개혁의 물길이 된다. 기억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무관심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집단이 공유하는 기억이라면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다루어야 한다. 기억은 단지 지나간 사건을 반추하는 행위가 아니다. 역사적 체험은 기억할 수 있는 이들 영혼 깊숙이 내재해 있다. 그것은 언제고 힘차게 대지를 뚫고 분출하려는 용암과 같다. 기억이 역사의 의미(Meaning)와 결합될 때, 그리고 구체적 공간과 연합될 때 기억은 예언자의 손에 들린 지팡이와 같다. 그것은 역사를 인도하는 길잡이다.

3. 공간의 기억

모든 사람은 특정한 공간을 지난다. 이는 땅에서 실존하는 사람의 숙명이다. 어느 날 어디를 지나야 목적지에 다다른다. 모든 인간은 물리적 육체로 되어 있기에 물리적 공간을 지나야 한다. 이것은 진리이며 구체적이다. 학교를 가던, 직장을 가던, 관공서를 찾아가던 주어진 공간을 지나야 한다. 이 때 공간이 구체적 기억을 갖고 있다면, 다시 말해 어떤 역사적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면 공간은 지나가는 사람을 일깨운다. 그는 현재를 살아가지만 과거의 기억과 공존하고 있다. 위에서 예로 든 <기억의 공간>을 거꾸로 설명해 보자.

다시 서울. 필자는 대학 시절 중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 어느 날 연세대 정문에서 모인다는 통지를 받고 그곳에 당도했을 때는 최루탄이 신촌 로터리까지 매캐했다. 우리는 연대로 향하는 창천동 뒷골목을 돌아 철길로 올라갔다. 지금도 그 철길은 서울역에서 문산을 오가는 열차에게 몸을 맡긴다. 마땅히 저항할 것이 없자 누군가 철길에 깔린 자갈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무장경찰을 향해 던졌다. 얼마 뒤 우리는 경찰에 쫓겨 수색 방향으로 철길을 절뚝거리며 피신했다. 자갈 위를 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필자는 신촌에 가는 경우, 더구나 연세대 앞과 철길 밑을 지나게 되면 그 기억이 떠오른다. 동지들의 함성과 최루탄 가스 냄새와 함께. 어쩔 수 없이 몸에 새겨진 시대의 흔적이랄까.

바울 사도는 더욱 존숭한 흔적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b). 비록 필자는 역사 앞에 부끄러운 몸이지만 내 몸에 역사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신촌에 가면 가슴이 아려오기 때문이다. 특정한 기억은 특정한 공간과 함께 언제나 되살아난다. 역사는 그렇게 전이되고 지속된다. 진실을 감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런 감정 없는 무생물적 공간이라 할지다도 역사적 기억을 불러온다는 것은 인간 실존의 신비를 드러낸다. 공간이 역사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 40). 공간은 돌보다 더 깊고 넓다. 역사를 담기에 공간은 결코 작지 않다. 공간은 역사의 흔적은 간직하고 있다.

이제 서울역에서 용산, 한강 쪽으로 가자면 남영동이라는 공간을 지나게 된다. 국철 1호선 남영역 부근에 이른바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다. 지금은 민주화기념관으로 바뀌었지만 예전에 이곳은 공포의 아지트였다. 많은 민주 투사들이 심문 받았고, 그 가운데 박종철 열사가 고문 끝에 숨진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남영역을 지나면 이런 기억들로 인해 가슴이 아려온다. 활짝 웃으며 피어날 청춘이 민주 항쟁의 이름으로 끝내 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혼은 공간에 배어 있다. 남영동에서 후암동 지나 오르는 남산길은 어떤가. 경찰에 쫓긴 우리들이 삼삼오오 남산 숲 속으로 피신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밤을 지새려고 하는 우리를 향해 확성기 소리가 울린다. “아! 아! 산 속에 있는 학생들에게 알립니다. 이제 곧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옵니다. 학생들은 어서 내려오세요. 지금 내려오면 무사히 집에 돌아가도록 돕겠습니다...”

4. 공간의 정치학

광화문을 선점하라! 어느 정치 구호 같이 들린다. 그동안 필자가 체험한 서울의 대표적 공간 광화문은 서서히 정치화 되어갔다. 정치가 국민의 비전을 구현하는 방법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양극화된 상황에서 광화문은, 아니 서울의 공간은 정치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광화문에 나서면 경복궁에서부터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온 방문객들이 광장에서 느끼는 공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조선을 일으킨 선왕, 조선을 구해낸 충무공 장군,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서로 공유하는 역사 이야기가 있다. 선조들이 이뤄 놓으신 엄중한 역사에 마음을 여미며 각오를 새롭게 한다. 시민들 눈짓만으로도 이 공간에서 기억하는 역사적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점이 바로 공간에 내재해 있는 의미이다. 그 의미들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이 살아 있는 역사의식을 면면히 흐르게 해야하는 것이 공간이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그런데, 공간이 정치에 의해 점령당해 간다. 정당이나 기관이 국민적 호소를 위해 광장으로 나오면 공간은 어떤 색깔을 입게 된다. 광장에서 외치는 구호로 공간은 이미지화 된다. 긍정적 예를 들어보자. 2002년 월드컵. 당시 광화문은 국민 모두의 공간이었다. 붉은 색으로 도배한 듯 국민적 열정이 남녀노소 구분없이 광화문을 물들였다. 여기에 정치적 구분은 있지 않았다. 당시 광화문은 국민적 신바람이 불어와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대동극의 절정을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선전하는 모습에 울고 웃는 환희의 현장이었다. 그러한 상징적 대표 공간 광화문이 회복될 수는 없을까! 여야(與野)가 정치적 계산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한 몸, 한마음이 되는 그런 공간으로 회복될 수는 없겠는가!

그동안 광화문은 여야로 나눠져 있었다. 진보와 보수가 협치는 말하나 악수하지 못하고, 상생을 외치나 뒤로 비수를 품고 있는 형국이랄까. 정권 투쟁의 극렬한 현장이 광화문이었다. 광화문 한 쪽에서 진보 단체가 마이크를 높이면, 보수 단체는 또 다른 쪽에서 구호 소리를 높이며 목청을 돋구었다. 광화문은 분명 건강한 진보와 건강한 보수가 만나는 국민 의식의 광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 진보와 보수 그늘에서 기생해 온 사이비 진보와 사이비 보수가 뒤섞여 난장(亂場)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사이비 정치꾼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들 탐욕의 배를 채우는 것. 그들은 지금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유 공간인 광화문을 더럽히고 짓밟고 있지 않은가. 욕망에 물든 파렴치한 정치꾼들을 광화문에서 추방하라.

<광화문>을 구출하라. 광화문을 지리멸렬한 권력 투쟁, 이권 싸움에서 구원하라. 공간을 공간되게 하라! 광화문을 화해와 상생, 모두가 함께 어깨동무하고 도도한 역사의 물길을 바로 흐르게 하는 공간이 되게 하라!

5. 사랑과 위로의 영성으로 공간을 채우자

선지자는 외친다.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선지자들의 역할은 죄에 대하여 엄중한 심판을 예언하면서 또한 회복을 선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회복과 구원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외적의 침공 사이에 혼란스러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다. 모든 환란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공간에서 공간으로 움직이며 살아간다. 사람은 공간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다. 그 공간이 어둡고 암울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면 인간은 부정적 영향을 받는다. 공간을 통해 재생하는 기억은 역사가 된다. 거시적으로는 우리의 모든 공간이 아름답고 희망찬, 사랑과 정의, 공의로 가득차야 하겠다. 미시적으로는 우리가 당면한 사건, 사고의 현장이 다시 긍정의 기억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위로와 사랑을 보내야 할 것이다.

공간에 의지하며 사는 인생들에게 공간은 곧 집이며, 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현대인들은 돌아갈 집없이 떠도는 유목민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그 고유한 의미를 회복한다면 돌아갈 집은 찾아질 것이다. 암울한 시대의 상처로 얼룩진 공간을 사랑과 위로로 채워가는 수고가 있어야겠다. 믿음의 백성들처럼 회개하고 허물과 죄악에서 돌아서야겠다.

공간이 부정의 기억으로 채워졌던 과거를 극복하고 긍정의 의미로 채워지도록 해야 한다. 때로는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겠다.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도 요구된다. 공간이 의미를 회복하려면 기억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그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하나 하나가 어느 날에는 고향집이 우리를 품에 안 듯 위로와 사랑을 되돌려주리라.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시금 되돌아 본다.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전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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