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기산 김준근의 『천로역정』 삽도
삽도, ‘천성의 길을 가르치다’
박해받던 이들이 사랑하던 책
조선 남성 평범한 복장 그려내
한국 문화 통찰과 애정의 발로
기독교 고전으로 불리는 존 버니언(John Bunyan)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은 줄거리 못지 않게 삽도 역시 꾸준한 사랑을 받아 왔다. 너다니엘 폰더(Nathaniel Ponder)에서 출판한 『천로역정』 첫판에 ‘크리스천’이 굴에서 잠자는 삽도를 게재한 것이 좋은 반응을 얻자, 5판부터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동판으로 된 삽도 13점을 추가했다.
18-19세기에는 수십 점에서 수백 점으로 늘어났고, 삽도의 비중이 커지자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윌리엄 호가드(William Hogarth)와 같은 유명 화가들의 참여로 한층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W. R. 오웬스(W.R. Owens)가 『천로역정』을 ‘어떤 주목할 만한 문화 및 출판 현상’으로 부른 것은 이 책이 지닌 특별함, 곧 선교사들에 의해 성경 다음으로 번역된 최고의 작품이자 국경을 뛰어넘은 애독서란 의미를 포함한다.
『천로역정』이 고전작품이 된 데는 핍박을 받아온 개신교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사벨 호프마이머(Isabel Hofmeyr)는 『천로역정』이 초국가적으로 유통된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그는 17세기 정치적·종교적으로 탄압받았던 사람들 중 『천로역정』을 열성적으로 읽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탄압에 직면해 유럽과 대서양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둘째, 『천로역정』을 복음적 핵심 문헌으로 채택함으로써 19세기 선교운동이 탄력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즉 『천로역정』은 각국에 기반을 둔 선교 채널을 통해 전 세계 지역으로 퍼져갈 수 있었던 셈이다.
셋째, 19세기 중반부터 『천로역정』 저자 존 버니언이 영국 소설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전통’의 작가로 인정받으면서 각 나라로 확산됐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첫 번째 단계, 즉 박해받던 청교도 신자들이 유럽, 북미, 카리브해로 떠나 정착지마다 해당 나라 언어로 『천로역정』을 번역, 보급하면서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선교사가 이 책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다. 미국 땅에 이주한 청교도들이 감명을 받은 서적을 한국에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를 매개로 그들의 신앙을 공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이 책을 번역할 당시 기산 김준근에게 참고용으로 제공한 것은 1860년 간행된 맥과이어 목사(Rev. Robert Magurie,1826-1890)의 주석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19세기 영국화가 헨리 셀루스(Henry C. Selous)와 프리올로(M. P. Priolo)가 제작한 삽도가 실려 있었다.
[책 타이틀 『텬로력뎡』은 1853년 영국 선교사 번스(W. C. Burns)가 중국어로 번역한 『天路歷程』을 가져온 것이다. 이후 중국어역은 언문역과 관화역으로 나뉘어 간행되었는데, 게일의 『텬로력뎡』에 등장하는 주요 명칭은 관화역을, 삽도의 타이틀은 언문역을 각각 저본(底本)으로 삼았다.]
이 삽도는 김준근의 삽도와 유사한 장면이 많아, 주로 맥과이어 주석본에 실린 그림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텍스트와 별개로 제작한 42점의 삽도는 현재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판화는 카탈로그 『‘텬로력뎡’ 삽도, 기산 김준근의 기독교미술』(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09)에 해설과 함께 수록돼 있다.
김준근이 저본으로 삼은 헨리 셀루스와 프리올로의 공동작은 어떤 차이점을 지닐까. 이 사실은 작품을 살펴볼 때 드러난다. ‘선의(Goodwill)가 크리스천(Christian)에게 천성의 길을 알려주는 장면’ 을 살펴보자. ‘크리스천’은 ‘유순’과 ‘고집쟁이’와 동행하였지만 어려운 일을 겪는 가운데 그들은 순례를 포기했고, ‘크리스천’만이 좁은 문에서 ‘선의’를 만나 안내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맥과이어 저본에는 ‘선의’와 ‘크리스천’ 두 인물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고, 전면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나 있으며, 배경에는 성채와 나무가 아스라이 보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초라한 행색의 ‘크리스천’이다. 주인공은 그의 험난한 순례를 짐작케 하듯 해진 바지를 입고 있으며, 등에 진 짐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힘겨운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에 반해 김준근의 삽도는 평범성이 강조된 편이다. 의상은 저고리와 바지, 짚신 등 조선 남성의 복장으로 되어 있고, 배경도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점준과 선준 위주로 제작됐다.
맥과이어 저본이 ‘선의’의 도움으로 믿음의 조상들과 예언자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닦아놓은 순례에 필요한 귀중한 조언을 듣는 데 비해, 김준근의 삽도는 지리에 어두운 나그네가 ‘선의’를 만나 친절하게 행선지를 안내받는 것으로 그려졌다.
셀루스-프리올로처럼 드라마틱한 구성 대신, 얼마든지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로 이 장면을 묘사하였다. 복식 측면에서 보면 맥과이어 저본에서 ‘선의’가 귀족 차림의 토가 복장을 하고 있는 데 비해, 김준근의 그림에서는 갓을 쓴 도포 차림의 양반으로 그려지고 있다.
구한말 우리나라에 양감과 원근법과 같은 조형 개념이 부재했던 점을 생각할 때, 김준근은 헨리 셀루스의 그림을 보고 명암법과 원근법을 어떻게 처리해야 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일부 삽도에서 서구의 원근법을 차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김준근은 선 위주의 동양화 수법으로 작품을 마무리하였다. 김준근은 등장인물을 복식이나 조형적 측면에서 한국 독자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의도한 것이다.
『천로역정』을 출간할 때, 왜 그토록 많은 삽도가 필요했을까? 글만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이미지를 동원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나탈리 콜레박(Nathalie Collé-Bak)은 삽화가 책의 장신구 역할이 아닌, 이야기를 확장한다는 점을 들었다.
즉 독자들이 소설의 이미지를 봄으로써 본문을 강렬하게 받아들이게 만들고, 극적 장면에 대한 인상을 기억에 새기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삽도가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소설 내용을 강화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텬로력뎡』은 이미지의 특성을 잘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평소 한글을 ‘세계에서 견줄 만한 것 전혀 없는 우수한 언어’로 여긴 게일 선교사는 이 책을 발간하면서 복음에 봉사하도록 부름받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조선 풍속화에 정통한 김준근에게 삽도를 의뢰하여 한국의 문화양식을 반영한 것은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요컨대 게일은 독자들이 소설을 대할 때, 마치 구전으로 내려오는 옛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처럼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 문화에 대한 통찰과 애정의 발로로 생활풍속이 반영된 한국 초기 기독교 미술의 서막을 여는 순간이었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