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 다시 보기 25] 부모교육, 경쟁력 있는 자녀로 키우기(1)
시험마다 한 달 전부터 학원 보충
학원이 ‘갑’, 학생이 ‘을’ 된 시대
그저 남 이기기 위한 無목적 경쟁
피곤할 뿐 아이 성장에 도움 안 돼
자칫 부모와 멀어지게 만들 수도
진정 건강한 경쟁은 ‘나와의 싸움’
#1년에 무려 넉 달,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다
필자의 교회는 1주일에 2번, 학교 앞 전도를 한다. 전도라 하여 거창할 건 없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 전부다. 이런 위로, 용기의 말과 함께.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청소년입니다.”
“오늘도 신나는 하루 되세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여러분들의 하루를 응원합니다. 화이팅!”
대부분의 학생들은 반갑게는 아니더라도 고개는 까딱여 준다. 그러나 유독 인사를 받지 않거나, 어두운 얼굴빛으로 학교에 들어가는 시기가 있다. 잿빛의 시기, 바로 시험기간이다.
이제 곧 중간고사 기간이다. 필자의 부서 학생들도 벌써부터 얼굴이 어둡다. 이 기간은 서로 긴장하는 시기다. 학생들은 시험에, 부모님은 성적에, 사역자와 교사는 학생의 출석에 긴장한다. 확실히 서로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다. 그중 하나, 시험 기간에는 학생들 얼굴을 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고등부가 되면 1년 열두 달 중 약 넉 달 정도 학생들 얼굴을 보기 힘들다.
물론 넉 달 동안 매주 교회를 빠지는 건 아니다. 어떤 학생들은 주일 1부 예배를 드리고 학원에 가거나, 어떤 학생들은 설교만 듣고 얼른 간다. 더러는 시험 전 몇 주를 아예 빠지는 학생들도 있다.
예전에는 2주, 지금은 4주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시험 전 2주 정도 보충수업을 들었다. 약한 과목 중심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요즘은 4주란다. 시험 시간표가 발표되면 학원에서 4주 보충수업을 잡는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이 높은 도시일수록 보충 기간이 길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업에 굉장히 강압적이었다. 수업 자체에 빠질 수 없게 했다. 설교만 듣고 달려가던 학생이 보였다. 저녁에 연락을 해서, 예배 시간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학생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목사님! 저도 더 남아서 온전하게 고등부 예배를 드리고 싶어요. 저라고 가고 싶은 줄 아세요? 그런데 학원에서 이렇게 자꾸 보충에 늦거나 빠질거면 학원 나가래요. 저 때문에 다른 아이들 공부 분위기 해친다고.”
이제는 학원이 ‘갑’이고 학생이 ‘을’인 시대다. 학원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방해가 된다면, 학생에게 나가라고 하는 시대다. 학원에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쟁에 경쟁을,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경쟁의 척박한 환경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도 없이, 그저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하고 있는 중이다.
#의미 있는 경쟁이 생기를 만든다
삶은 경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탄생했나? 사실 경쟁에서 탄생한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3억분의 1’이라고 한다. 정자와 난자의 수정 확률. 로또보다 훨씬 높은 확률을 뚫고 경쟁에서 이긴 승리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다.
경쟁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생명의 신비도 그렇듯, 경쟁은 삶의 일부분이고, 우리는 이 경쟁을 통해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서광원 작가는 《사자도 굶어 죽는다》에서 경쟁력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커피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에서는 종이컵에 커피 씨앗을 심는데, 꼭 2개씩 심는다. 하나만 심으면 크게 자라지 않지만, 2개를 심으면 서로 경쟁하면서 잘 자란다.”
그러니까 생명체는 경쟁 속에서 자란다. 경쟁 속에서 더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다. 선용(善用)하면, 경쟁력이 곧 생명력이 된다는 소리다.
문제는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치는 경쟁이 선용이 아니라 악용(惡用)에 가깝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남을 이기기 위해 경쟁한다. 옆집 아이가 학원을 두 곳 가니, 우리 아이는 세 곳을 보내야 한다. 윗집 아이가 시험 전 2주 보충을 하면, 우리 아이는 3주 이상 보충을 해야 직성에 풀린다.
이런 방식은 아이의 성장에 크게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아이를 피곤하게 만드는 경쟁이고, 자칫 부모와 멀어지게 만드는 경쟁이다.
한 번은 보충수업에 가는 학생에게 물었다. “보충수업하면 확실히 도움이 돼?” 학생 왈, “목사님! 그게 도움이 되겠어요? 그냥 거기 가 있으면 엄마가 잔소리 안 하니까 가 있는 거죠. 거기 있는 애들 대부분이 그래요.”
물론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은 그저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오늘도 학원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중이다. 뚜렷한 이유와 목적 없이 경쟁의 전선에 몰려 있는 중이다. 의미를 잃고, 생기도 잃으면서.
다시 출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출산 관련 기사를 여럿 보다가, 의미 있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어떤 정자가 난자와 만날까? 경쟁에서 이긴 가장 빠른 정자? 기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선착순이 아니라, 건강한 정자가 수정된다. 수많은 정자가 난자를 향해 헤엄쳐 간다. 흔히 가장 빠른 정자가 난자와 수정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가장 빠른 정자가 아니라, 가장 건강한 정자가 난자와 수정된다. 선착순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수정란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정말 경쟁에서 이기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뜻이다. 빠름만을 추구하는 경쟁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결국 마지막 순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만 보더라도, 우리가 왜 자녀에게 건강한 경쟁력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그 이유가 자명하다.
특히 ‘기독학부모’라면, 부모는 무엇이 진정한 경쟁임을 알려줘야 한다. 남들이 2개 한다고 나는 3개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다. 이유 없는 경쟁, 목적 없는 경쟁은 오히려 공부에 대한 동기를 상실하게 만든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를 쓴 마이클 그리피스는 서문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능력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만다”고 했다. 적용해 보자면, 우리 아이들이 목적도 이유도 모르고 하는 경쟁은 결국 능력없는 청년을 양산할 뿐이다. 비실비실한, 그러니까 마지막 문턱에서 맥이 풀려버리고 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부모는 경쟁에 대한 분별이 필요하다. 나아가 자녀에게 무엇이 건강한 경쟁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건강한 경쟁인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나와의 경쟁’이다. 나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건강한 경쟁이다.
이 경쟁에 대해서는 다음에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일단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것은 이것이다. ‘경쟁은 남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는 것이다!’
김정준 목사
울산대흥교회 교육목사
영남신학대학교 신학과·신학대학원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학 석사
한남대학교 대학원 박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