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에게 묻지 않는, 장애인 정책과 차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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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승의 러브레터] 장애, 하나님의 또 다른 선물

▲과거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류한승 목사. ⓒ크투 DB
▲과거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류한승 목사. ⓒ크투 DB

1. 작년 초 장애인에 대한 글을 ‘사랑의 편지’에 쓰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는, 잊고 지냈습니다. “준비되면 쓰겠습니다”는 말만 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작년 말 ‘따뜻한 동행’을 통해 교회에 대한 장애인식 개선에 대한 일을 부탁받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제 장애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음을 겸허히 수용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할지 모르지만, ‘사랑의 편지’를 통해 먼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장애 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전달하려 합니다.

장애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장애를 문제로만 인식하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가진 편견에 대한 이야기가 오히려 맞겠습니다.

장애인 혹은 보호자들에게도 자신의 장애를 올바로 인식하자는 이야기인 동시에, 교회라는 장소를 향해 조금 따끔한 말일 수 있겠습니다.

2. 저는 장애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목사입니다.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합니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장애를 가졌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장애가 하나님이 제게 주신 또 다른 선물임을 깨달아서입니다. 제게 주신 것을 선물로 활용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저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도 보여집니다.

다른 공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있는 공간에서 각자의 장소에 부여된 경험을 하고 돌아가곤 합니다.

카페라는 장소로 기억하거나, 교회라는 장소로, 봉사하는 곳으로, 상담받으러 온 곳으로, 배우러 온 곳으로, 저랑 놀기 위해 온 사람들로, 기타 등등!

3. 저는 공간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담아낼 수 있는 여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과 장소>의 저자 이-푸 투안 박사는 가치를 부여하면 장소가 되고, 공간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즉 시간과 사건 사람들에 의해 장소는 가치가 채워지고, 그래서 기억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현대의 건축학자들은 그래서 장소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러하지만 저는 지금 이 시대에 공간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소가 빼곡해져서 문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치가 훼손된지 오래됐기 때문입니다.

20-30년 된 건축물뿐 아니라 계획없이 세워진 곳들은 선거철만 되면 재개발 공약이 난무합니다. 재개발을 하려면 먼저 헐어야 합니다. 비워야 합니다.

먼저 텅 빈 곳이 있어야, 흐트러진 것들을 차곡차곡 질서 있게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은 그렇다고 과거 장소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장소의 가치는 역사의 가치로 승계되기 때문입니다.

장소의 의미와 가치를 기억하거나 경험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이미 분리된 상태로 살아간 사람들은 특정한 장소적 가치를 공간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장소는 공간이 되고, 다시 장소가 될 때, 우리는 다 같은 공간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달꿈학교가, 카페 쿰이 세워졌습니다. 모두 각자 다른 장소지만 공간 달꿈 안에 있습니다. 저희 집도 그 안에 있습니다. 각자 역할이 다르게 빛납니다. 모두 똑같아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4. 제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저는 1980년 장애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방법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임을 온전히 믿습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천사를 만나 씨름하고 평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언어를 잘 사용하지 못했고, 바울도 구루병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의료적 치료가 필요한 손상을 입은 장애의 영역을 성경은 문제로 여기지 않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기능적으로 손상된 영역도 장애의 부분이지만, 그로 인한 치료적 필요성은 개인의 욕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고통, 죽음, 노화, 퇴화는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긴 필연입니다.

그런데 가시적으로 보이는 장애를 두고 판단하는 교회의 모습은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어머님은 어려서부터 온갖 부흥회에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그 부흥사들은 뜨겁게 찬양하고 소위 치료 행위를 했습니다. 저는 그런 자리에 나가는 것이나, 자꾸 나오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이 “한승아, 기도 열심히 해봐”라고 할 때마다 말했습니다. “어머니, 실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이미 저를 살리셨어요. 다리도 앞으로 하나님이 낫게 하실 거예요.”

하나님은 죽은 저를 이미 살리셨고, 남은 장애도 당신의 때에 완전케 해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 이미 약속되고 성취된 것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리스타로 일하던 류한승 목사. ⓒ크투 DB

▲바리스타로 일하던 류한승 목사. ⓒ크투 DB

5. 물론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가 치료를 원하는 분들의 모습은 그대로 좋았습니다.

현재 불편한 부분에 대해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솔직한 욕구가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아프고 불편하면 치료해 달라고 말할 수 있지요.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얼마 전 문제되었다던 아이유 씨의 뮤직비디오에서 시각장애인이 눈 뜨는 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기분 나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꼭 치료가 필요치 않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불편할 때도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장애인 당사자의 표현이어야 설득력이 있겠지요.

중요한 사실은 ‘낙인’입니다. 강대상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휘두르는 저를 포함한 목사님들이 하는 “믿음으로 치료한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선포는, 앞으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족하던 저를 향해 스스로 ‘믿음 없는 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여전히 목발을 짚고 나가는 저를 향한 시선은 의료적 손상으로 인한 장애가 아닌, 차별이 만든 사회적 장애인이 됐음을 직시하게 했습니다.

‘장애인의 날’만 되면 장애인이 올라가 간증하는 모습과 많은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분은 왜 비장애인인데 울고 있을까? 왜 손뼉을 칠까? 장애에 대해 공감하는 걸까, 아니면 불쌍히 여기고 있었던 걸까? 성경에서 하나님은 정말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시기를 원하셨을까?

6. 은혜받은 성도들이 가득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늘 사역 때문에 바빠 보였습니다.

선교라는 큰 일뿐 아니라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역 이야기로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제가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습니다.

도와주려고 하셨던 따뜻한 사람들이었지만, 저는 언제나 도움 받는 대상에 머물렀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권과 복지가 발달한 지금의 한국과 교회들 상황은 조금 다를까요?

저는 장애시설이 설립된 1970년대에 태어나 유럽에서 장애 운동이 시작된 1980년대에 초등학교 생활을, 한국에 장애 운동이 보급된 1990년대에 청소년과 대학 생활을, 그리고 이동권 이야기가 시작된 2000년대 등 모든 시기를 관통하며 살아왔습니다.

벌써 40대 중반이 됐습니다. 장애를 갖고 산 것만 44년입니다. 중도장애인 동시에, 아주 어린 시절의 장애여서 비장애의 기억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장애를 가지고 초·중·고·대학교와 직장, 종교생활까지 경험한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지체장애인 관련 논문을 쓰면서는 지체장애인 가족들을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에게만 몰입해서는 안 되겠다, 주변과 가까운 사람들을 살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장애 가족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선 그들을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기관에 가도 지체장애인 당사자는 물론, 가까운 보호자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거기에 에너지를 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장애인 자립재활센터 운영과 프로그램 돌리는 것, 그리고 시위가 있을 때는 장애인들이 결집해 움직이는 것만 해도 1년이 다 지나가는 것 같이 바빠 보였습니다.

시위 현장에 갔습니다. 비를 쫄딱 맞으면서 같이 행진도 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 곁에는 가까운 가족, 친구, 연인이 아닌, 활동보조사와 운동가들이 함께였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나뉘게 했을까? 왜 여전히 우아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일까?

책과 강의 등을 봤습니다. 이야기 속에는 제가 살아온 시대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외국 장애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이론이 담긴 장애 인권 이야기, 차별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 이상한 질문이 하나 꼬리를 뭅니다.

‘왜 한국에서는 장애 운동에 대한 이야기들 안에 피흘리고 희생당한 장애인으로 시작된 이야기만 가득하고, 장애인 당사자나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담론하고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찾기 힘들까?’

1978년 전국지체부자유 대학생연합이 세워지고, 1980년대 장애인 대학생들이 만든 기구가 생긴 뒤 이어진 운동의 역사에서 장애인은 도구였을까, 주체였을까?

복지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었던 척박한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 개발 폭주 열차를 달리던 때 장애를 갖고, 유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장애운동이 시작됐던 1990년대 대학교 생활을 하는 도중이나 이후 자립을 위해 혼자 좌충우돌 애를 쓸 때.

휠체어 장애인인 제게 휠체어에서 일어나 시험 볼 수 없냐고 물었던 차별적 언어를 대면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한 뒤 휠체어 바리스타로 살아간지 7년째에도, 개척이나 선교가 아닌 보편적 교회에서 장애인으로 청빙받아 담임 목회를 한지 1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몇몇을 제외하면 먼저 제게 장애인 당사자가 지금까지 삶에서 느꼈던 차별 경험과 개선돼야 할 점을 물어본 학계나 연구자, 활동가, 교계의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가끔 간증을 요구하는 교회와 여전히 불쌍하면서도 대단하게 바라보는 대중의 이중적 시선들, 진지하게 배우려고 오는 학자들은 전혀 없는 시간들이 과연 우연일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여전히 정책과 담론은 비장애인 중심이고, 그 안에 소위 후광 효과로 점철된 학자 중심으로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사회 속에서 교회마저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를 간증 도구로만 활용해 왔습니다.

대다수 장애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도구로만 활용되는 것이 현재 한국 장애 연구의 한계점인 동시에 개혁해야 할 부분입니다.

선거철만 시장에 나가 민심을 살피는 정치권을 비난하려면, 적어도 조금 더 다양한 장애를 가진 보편적이면서도 개별화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함께 만들어나가는 동역자가 될 수는 없을지 진지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왜 장애인 단체와 시설인데 지체장애인들은 없나요? 시위 현장에 모인 장애인 옆에 활동보조만 있고 가족과 연인은 없나요?’라고 질문할 때 “대부분 다 자립했어요”, “글쎄요. 지체장애인들은 그래도 본인 의사 표현이 확실하고 그래서 괜찮은 것 같아요”라는 또 다른 차별적 언어 대신, 서로 아직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고 배워갔으면 좋겠습니다.

교만한 저는 일상생활에서 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먹고 동등한 자리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현장 속 도구로만 활용되기는 싫습니다.

단지 행복한 삶을 위해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일 뿐, 모두 함께 사랑하며 일하고, 그 가운데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갖춘 사회인이고 싶습니다.

따라서 장애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교인이라면, 목회자라면, 선교사라면, 먼저 이 나라라는 공간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에 대하여 내가 시혜자의 위치에 서 있는지를 탐색해보면 좋겠습니다.

(교회라면 장애뿐 아닌 모든 선교와 구제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을 봐야겠지요.) 내가 기억하는 의미있는 장소에서 얼마만큼 장애인과 동등한 의미를 구현했는지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지금 있는 장소를 공간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건축을 다시 설계하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머문 여기가 그에게 빈 공간이라면 나에게도 공간이 되어, 다시 더불어 사는 장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7. 같은 이유로, 저는 제 위치에서 제가 몸담고 있는 공간, 교회를 보려 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처럼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며 외적 조건으로 차별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는 사랑이라는 장소적 의미와 가치로 형성됐습니다. 2천 년 전 건축물은 이미 헐렸고, 예수님의 몸으로 다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의미가 담긴 교회. 그런데 정말 교회에 낯선 누군가가 다가왔을 때, 그에게 형성된 장소의 의미는 ‘진짜 사랑’일까요? 멀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믿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눈물 흘리면서, 같은 공간 안에서 만난 비기독교인들에게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밀고 죄인이라 정죄하며 차별하는 곳에, 사랑의 의미를 담은 장소는 건축돼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라보지 못한 탓에, 여전히 미문 밖에 있던 걸인처럼 수혜자의 위치에 고정시켜 버린 시혜자 위주의 논리로 점철되어 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여전히 녹슨 첨탑처럼 날카롭게 허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Nothing)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목소리는 이미 텅 비워진 것도 모르는 장소에서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경고’였음을 깨닫습니다.

8. 앞으로 편지를 통해 전달할 내용들은 미문 밖 걸인의 의료적 손상이 만들어낸 장애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제 이야기이고, 제가 포함된 우리의 이야기이고, 또한 우리의 차별적 시선이 만들어낸 사회적 장애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장애를 가진 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지극히 개인적일지도 모르는 제가 인식한 장애와 제가 경험한 장애에 대한 교회의 차별적 인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아가 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존중과 맞닿은 사회 전반에 걸친 평등에 대한 이야기이며, 보편성과 개별성이 어떻게 맞닿아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교회가 가진 선교에 대한 시선과 관계 등에 대한 제언을 드리고자합니다.

그로 인해 조금 더 바른 사회적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때 비로소 서로 다른 별들이 거대한 우주 공간 안에 각자 자리에서 빛나듯, 각자의 장소적 의미도 서로를 존중하며 아름답게 각자 각자 빛나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빛나는 별들이 모인 공간은 비어있음이 여전하여 어떤 존재도 빛나게 해줄 준비가 된 아름다운 우주가 될 것입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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