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같은 눈물의 목회자 남양(南陽) 김명혁 목사

|  

[남양 김명혁 목사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2월 18일 오전 별세하신 김명혁 목사님의 삶과 신학을 기리기 위해, 안명준 박사님의 논문 ‘남양 김명혁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일제 견뎠지만 공산당 점령에

11세 때 홀로 38선 넘어 월남
아버지 순교신앙 지니며 자라
고3 때 왕십리서 1백 명 전도

▲김명혁 목사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크투 DB
▲김명혁 목사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크투 DB

Ⅰ. 서론

남양(南陽) 김명혁(金明赫, 1937년 6월 4일- 2024년 2월 18일) 박사는 순교자 김관주(金冠柱, 1905년 9월 25일- 1950년 6월 23일) 목사의 아들로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2세부터 9세까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10세부터 11세까지 평양에서 자랐다. 11세 때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로 38선을 캄캄한 밤에 뛰어넘어 월남하였다.

총신대학교에서 역사신학 교수를 했으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에서 그는 역사신학에 관한 여러 권의 저서를 썼으며, 어거스틴 연구에 관한 권위자이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창설하여 15년 동안 회장을 역임하고 명예회장으로 재직했다. 또 강변교회를 창립해 원로목사로 있었으며, 한국교회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다. 마음이 따뜻한 교수이며, 예레미야와 같은 눈물의 목회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신앙과 현실』(성광문화사), 『복음과 세상』 (성광문화사), 『통일과 선교』 (성광문화사), 『기도의 인물』 (성광문화사), 『성경으로 공부하는 신앙생활의 ABC』 (성광문화사), 『빌립보서 성경공부』 (엠마오), 『초대교회의 형성』 (성광문화사), 『현대교회의 동향』 (성광문화사), 『세계교회사, 종교개혁사, 근세교회사』 (합동신학교출판사), 『선교의 성서적 기초』(편저) (성광문화사), 『현대 기독교선교』(번역) (성광문화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성명서 모음집』(편저) (기독교문서선교회), 『한국교회 쟁점진단-한국교회와 신학적 주제들』 (규장문화사) 등이 있다.

Ⅱ. 남양 김명혁 박사의 생애

남양은 1937년 6월 4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호적은 부친의 호적과 같은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 558번지이다. 그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존경받는 인물로서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에서 아버지 김현하 영수와 어머니 김정숙 권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관주 목사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学) 법학과를 중퇴하고 일본 도쿄 신학교를 나왔다. 그는 당시 의학을 공부하던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조선국에 귀국하고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2교회에서 부목사로 시작하여 후에 담임목회 사역을 9년 동안 하였고, 1947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 자주 투옥되었다가 일제가 패망하면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38선 이북에 들어선 공산 정권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소련이 참여하는 정치에 협조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압력이 가해졌다.

그는 오히려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는 데 참여했고, 이후 조선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공산 정권은 결국 협조하지 않는 그를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체포해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데려가 강제 노역을 하도록 처리했고, 그는 1950년 6월 23일경에 순교하였다.

남양은 이런 그의 아버지의 순교신앙을 몸에 지니면서 자랐으며 후에 그의 삶도 순교적 신앙으로 살게 되었다. 남양은 어릴적에 안주에서 캄캄한 수요일 밤 할머니와 온 가족이 등불을 켜 들고 논밭 길을 걸어 멀리 있던 예배 처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할머니(김정숙 권사)는 한평생 기도와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시집의 온 가족을 모두 예수님께 인도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평생토록 했다. 결국 남편을 회개시켰고, 세 아들을 모두 예수 믿게 했다. 남편은 영수가 되었다. 남양의 부친인 맏아들은 목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집사가 되었고 셋째 아들은 장로와 목사가 되었다.

남양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은 평북 신의주였다. 그의 부친 김관주 목사가 1938년부터 8-9년 동안 신의주 제2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와 함께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살 때부터 한평생 한경직 목사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한 목사를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한 분으로 모시게 되었다.

▲김명혁 목사의 월남 직전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시절 모습. 왼쪽 위 빨간 원이 김명혁 목사. ⓒ크투 DB
▲김명혁 목사의 월남 직전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시절 모습. 왼쪽 위 빨간 원이 김명혁 목사. ⓒ크투 DB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신앙적 가르침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부친이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갔지만, 어머니와 함께 감옥 담장 밖에서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고 소리쳐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면서 순교신앙을 몸에 지니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초등부 시절을 보낸 곳은 평양이다. 부친은 1946년 신의주 제2교회를 사임하고 1947년부터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후에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에 갇혀 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그를 회유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강 목사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고생하겠느냐”고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김명혁이 그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다. 김명혁이 만 11살 때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나눈 다음 여기서는 주일을 바로 지키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그를 한참 바라보시다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너 없이는 못 살아” 말씀하셨지만, 울면서 가라고 허락을 하셨다.

결국 그는 1948년 8월 영적 고향인 평양을 등지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남겨둔 채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다. 함께 오던 어른들은 인민군에게 모두 잡히고 그만 혼자서 산과 들과 강을 뛰어넘어 미지의 땅 남한으로 달려왔다. 그는 두려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약간의 스릴을 느꼈다고 했다.

김명혁은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서 만난 청년의 도움으로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여 서울 중구 을지로3가 7번지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남양은 그 청년을 천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도착한 곳은 수 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 집이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과 신의주 제2교회 출신인 김익순 장로가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서울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월남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때 어린이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대구에서 부흥회를 여러 곳에서 인도하셨던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12번이나 참석해 큰 은혜를 받았다. 이성봉 목사의 안수기도를 12번이나 받았는데, 이 목사가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 기도 제목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서너번 후에는 묻지도 않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하시면서 안수기도를 해 주시곤 했다고 김명혁 목사는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이성봉 목사로부터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한복협 회장 시절 일본복음동맹 오가와 회장(왼쪽)과 교류하던 김명혁 목사. ⓒ크투 DB

▲한복협 회장 시절 일본복음동맹 오가와 회장(왼쪽)과 교류하던 김명혁 목사. ⓒ크투 DB
좋은 목사 되려 사학과 입학
석·박사 논문, 어거스틴 전공
후암교회 부임, 영안교회 개척
강변교회 28년 간 목회 은퇴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을 보냈는데,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며 김치선 목사 밑에서 보다 철저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김치선 목사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를 사모하는 것과 전도의 영적 유산을 물려 받았다. 김치선 목사의 새벽마다 “2만 8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 음성을 듣고, 그는 왕십리 벌판에서 전도하였다.

김명혁은 이미 고3 때 무조건 토요일과 주일에 왕십리 벌판에서 전도하여, 학생이 60명 어른이 40명이 모이는 천막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었다. 교회 이름을 한양제일교회라 하였고, 2년 동안 목회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고3 때 한경직 목사를 만나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대학교에서 무엇을 전공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역사를 전공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해, 결국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면서 신학 연구와 목회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균형 잡힌, 양면적인, 포용적인, 관용적인’ 사고의 틀과 안목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대학생 시절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이명섭 같은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보람된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4.19가 일어나던 1960년,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그들은 문리대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 결과 ‘새생활 운동’을 시작하여 사회에 도전을 주었다고 한다.

남양은 1961년 대학 졸업 후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수진은 박형룡, 명신홍, 한철하, 최의원, 오병세, 강태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는 한철하 박사로부터 학문적 도전과 감화를 많이 받았다. 교회사를 사건 위주가 아닌 주제와 흐름 위주로 연구하게 된 것이었다. ‘어거스틴 연구’ 강의 시간에는 어거스틴의 초기 작품들을 영문으로 읽으며 그의 신학방법론과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들을 다루었는데, 당시 그에게 많은 감동과 학문에 대한 정열을 불어넣어 주었다. 결국 후일 어거스틴을 전공하며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김명혁 목사가 은퇴 감사예배에서 꽃다발을 받고 있다. ⓒ크투 DB

▲김명혁 목사가 은퇴 감사예배에서 꽃다발을 받고 있다. ⓒ크투 DB
김명혁은 총회신학교에서 두 학기 공부를 마치고 1962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 신학교로 유학 가서 신학 수업을 계속했다. 돈이 부족해 비행기를 타는 대신 배를 타고 두 주 반 동안 항해 후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다. 도착 즉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이틀 동안 밤낮으로 달려 훼이스 신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공부를 시작했다. 교장 매클레이 박사의 ‘교회사’ 강의를 잘 듣고 공부를 잘 해서 칭찬을 받았고, 교내 인쇄소 책임자의 신임을 얻어 인쇄소에서 일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도 했다.

그는 1964년 훼이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B.D.)를 얻은 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신학석사 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했다.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신의 도성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이론’이었는데. 이는 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전했다.

1966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신학석사 학위(Th.M.)을 얻으며 졸업한 후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학교 신학원에 입학해 또 다시 신학석사 과정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했다. 역사신학 교수 야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교수의 지도를 받아 쓴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교부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해석’이었다.

그는 1972년 12월 아퀴나스 신학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논문을 완성한 후 1973년 1월 예일대학으로 다시 와서 리서치 펠로우로 한 해를 지냈다. 마지막 1년은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연구했는데, 그의 삶과 목회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 1년이었다. 선교학을 연구한 김명혁 박사는 후일 총신 신대원에서 최초로 선교학 과목을 강의하였다.

▲은퇴 후 작은교회를 찾은 김명혁 목사가 성도들과 교제하고 있다. ⓒ크투 DB

▲은퇴 후 작은교회를 찾은 김명혁 목사가 성도들과 교제하고 있다. ⓒ크투 DB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74년 가을 귀국 후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대학생과 청년들을 지도하며 교육목사로 목회한 일이 있었다. 그의 지도로 목회와 선교에 헌신한 제자들로는 안성원, 김동화, 박선규, 최성호, 이진, 양용태, 한옥희, 탁정희 등이 있었다.

후암교회 사역을 마치고 1978년 6월 22일부터 1979년 2월 18일까지 8개월 동안 영안교회에서 개척 목회를 하였다. 1980년 4월 6일 강변교회를 설립해 28년 동안 목회한 후, 2008년 1월 13일에 은퇴를 하였다. <계속>

▲안명준 박사. ⓒ크투 DB

▲안명준 박사. ⓒ크투 DB
안명준 박사

평택대 명예교수
성서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123 신앙과 삶

CT YouTube

더보기

에디터 추천기사

광주청사교회(담임 백윤영 목사) 부설 마룻바닥영성전수팀은 1월 18일(목)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암로 소재 광주청사교회 마룻바닥영성체험관에서 ‘제1차 마룻바닥영성체험스테이’를 진행할 예정이다.

겸손을 아무리 연구해도, 교만은 우리 속에 도사리며 언제든…

가장 좋아하는 CCM 가사 중 ‘주님 가신 그 길은 낮고 낮은 곳인데 나의 길과는 참 멀어 보이네 난 어디로 가나’라는 진솔한 고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명백하게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한동대학교 최도성 총장

“하나님의 대학 세우는 일 즐겁고 감사… AI 넘어 HI 시대 선도할 것”

학령인구 감소로 15년 뒤 대학 3/4는 정원 미달 모집 위해 기독교 색채 줄이자? “절대 양보 못 해” ‘혁신의 아이콘’ 미네르바大 벤 넬슨, 손 내밀어 대한항공보다 글로벌한 한동대생, 전 세계 누벼 창의적이지만 협력할 줄 아는 학생이 HI형 인재 “하버드보다 …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 동성애대책위원회,

‘퀴어축제 축복’ 감리교 목회자 6인, 고발당해

올해 2024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동성애 축복식에 참여한 기독교대한감리회(이하 감리교) 목사 6인이 고발당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 동성애대책위원회, 감리교바로세우기연대(감바연), 감리회거룩성회복협의회(감거협), 웨슬리안성결운동본부(웨성본)는 8일…

K-A 가디언즈

“6.25 다큐 중 이런 메시지는 처음” 영화 ‘K-A 가디언즈’

한미동맹 발효 70주년 기념 다큐 영화 가 공개됐다. 7월 6일 오후 서울 은평구 은평제일교회에서는 전문가들을 초청한 가운데 시사회가 진행됐다. 한미동맹유지시민연합(대표 심하보 목사)과 (사)한미동맹협의회가 제작을 맡고 김채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

전국 노회장 특별기도회

예장 통합 노회장들, 총회장 관련 특별기도회 열고 입장문 발표

예장 통합 노회장들이 김의식 총회장 사태와 관련한 특별기도회를 열고 입장문을 발표했다. 예장 통합 전국노회장협의회(회장 심영섭 목사, 서울강북노회장)는 8일 오후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총회를 위한 전국 노회장 특별기도회’를 열었다. 1부 예배…

복음통일 컨퍼런스 32차

“낙태, 태아가 강도 만난 것… 튀르키예·이란, 재난 후 기독교인 증가”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 교수) 주최 ‘제32차 복음통일 컨퍼런스’ 넷째 날인 4일에는 저출생과 낙태, 북한 인권과 탈북민, 이슬람권 선교 등에 대한 강의가 진행됐다. 지난 7월 1일부터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진행 중인 컨퍼런스 오전 첫 강의…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