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기독교의 요절이라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은 ‘죄인이 멸망에서 건짐을 받는 궁극의 원천’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렸다.

물론 ‘구원’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속(독생자를 주셨으니)’이지만, 더 근원적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사랑(이처럼 사랑하사)’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멸망에서 건지시려고 그들을 ‘구속한(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구원의 경륜과 방편’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음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때 ‘다양한 은혜의 경륜과 방편들’을 동원하셨는데, 이 역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았다. 우리의 무능함으로 인해,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기여할 것이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 구원의 원인(remote cause, 遠因)’인 ‘선택(election)’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았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5)”.

‘구원(salvation, 救援)의 원천(fountain, 源泉)’인 ‘구속(redemption, 救贖)’도 사랑으로 말미암았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구속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죄삯 사망을 지불했느냐 안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공의’의 문제이지만, 그 공의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기에, ‘그들의 죄 삯 사망’을 지불하는 ‘구속의 은혜(공의)’를 입히셨다.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사 63:9)”,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구원의 통로(through, 通路)인 믿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택자에게 주어졌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삼위일체 복음 진리를 믿지 못하고 이단적인 가르침에 현혹 된 것’을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0-12)”.

반면 ‘삼위일체 진리를 믿어 구원을 얻음’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때문으로 말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죄에 대한 심판의 기준’도 ‘하나님의 사랑’

흔히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을 사용할 땐 항상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둘에 지나치게 ‘공명정대한 균형 개념’을 입히려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공의’도 손상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공의’를 행하신 목적은 사실 ‘택자에 대한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곧 ‘하나님의 공의’를‘하나님의 사랑’에 복속(服屬)시켰다는 말이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정의하여 ‘공의(公義)’라 하지 않고 ‘사랑(요일 4:8, 16)’이라고 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도 그 대상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서도 둘(사랑과 공의)에 ‘공명정대한 균형 개념’을 입힐 수 없다. 택자(the chosen)에겐 ‘공의’보단 ‘사랑’에, 불택자(the unchosen one)에겐 ‘사랑’ 보단 ‘공의’에 더 사경(斜傾)돼 있다. ‘택자’가 구원을 받고 ‘불택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택자’에 대해선 ‘긍휼’을, ‘불택자’에 대해선 ‘공의’를 발동시킨 결과이다.

‘택자’나 ‘불택자’나 다 같은 죄인이고 죄의 경중(輕重)에도 차이가 없지만, ‘택자의 죄’는 사하시고, ‘불택자의 죄’는 심판하시는 것은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시킨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경(斜傾)된 기준’은 “내가 저희(택자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고 하신 말씀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본성적으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택자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 결과 ‘그들의 죄를 사하셨다’는 말이다. 이는 그들의 죄를 ‘공의’가 아닌 ‘사랑’으로 보신 결과이다. ‘하나님의 공의(公義)’대로 라면 ‘죄’는 절대 ‘긍휼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오직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이를 보면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그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외에 달리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고 하신 말씀 역시 ‘택자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담겨있다.

‘네가 회개하고 돌아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이미 네 죄를 다 사(赦)해 놓았으니 더 이상 유리 고생하지 말고 돌아오기만 하라는 애달픈 사랑의 당부를 담고 있다. 여기엔 ’심판자 하나님‘의 ‘엄중한 공의’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탕자를 향해, 이미 그의 지난 모든 죄를 다 용서해 놓고 좋은 옷, 금가락지, 새 신발 그리고 송아지 고기와 잔치를 준비해 놓고 오매불망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택자의 죄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연민’이 가득하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0-24).”

이 말씀들은 모두 ‘그들의 어떤 잘못’도 ‘영원 전에 기원’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을 막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것들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측은지심(惻隱至心)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택자 구원’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연민’에서 비롯됐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