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2천 년사 영웅들, 상처(scars)로부터 탄생한 별들(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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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4)

12월 선교편지: 우리가 아직도 연약할 때(When we are still powerless)

▲선교의 영웅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윌리엄 캐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찰스 스터드, 글래디스 에일워드, 데이비드 리빙스턴, 짐 엘리엇, 밥 피어스. ⓒ이윤재 목사
▲선교의 영웅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윌리엄 캐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찰스 스터드, 글래디스 에일워드, 데이비드 리빙스턴, 짐 엘리엇, 밥 피어스. ⓒ이윤재 목사

한 선교사가 쓴 짧은 시가 있다. 제목은 ‘금지된 슬픔 너머로’이다.

솟구치는 눈물에도 슬퍼하지 마라
가눌 수 없는 애달픔에도 아파하지 마라
빼앗겨 버린 애도의 시간조차 기억하지 마라
그저 잊고 또 잊고 살아라.
세월에 찢기워 조각난 마음,
얼마나 더 부서져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글은 홀어머니를 떠나 필리핀에서 선교하던 딸이 갑자기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헤어날 수 없는 죄책감과 우울증, 그리고 무기력증과 대인기피증으로 고생하면서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서 절규하면서 쓴 글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갔을 이런 시가 요즘 내 가슴에 묻어오는 것은 아마도 지난 5년, 작은 선교사의 삶을 살면서 경험한 나 자신 존재의 심연과, 남들에게는 대단한 헌신과 용기 그리고 희생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선교사들의 일상과 내면 세계를 조금 옆에서 들여다본 결과일 것이다.

선교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인가? 감히 말한다면 선교사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 중 하나다. 그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스스로 떠났다는 것과, 척박한 이국 땅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신앙의 영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선교사는 과연 영웅인가? 지난 한 주 모처럼 책 한 권을 읽었다. 루스 터커가 쓴 <선교사 열전(복있는 사람)>이란 책이다. 책 두께가 만만치 않아 일찌감치 책장 뒤에 숨겨놓은 책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은 대림절이 시작된 어느 날 아침, ‘나는 누구이며, 또한 나는 누구여야만 하는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2천 년 선교 역사에는 별같이 빛나는 영웅들이 많았다. 주후 2세기 핍박의 시대,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는 집정관의 위협 앞에 “주님은 지난 86년 간 한 번도 나를 버린 적이 없는데 어찌 내가 그를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며 스스로 화형에 처해진 소아시아 주교 폴리캅 (69-155), 예수회 소속으로 10년간 인도, 말레이 반도, 일본을 거쳐 중국 한 섬에서 열병으로 죽어가면서 아시아 영혼들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했던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1552), 고향을 떠나 길고 긴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중국에 도착한 후 일본군 폭격을 피해 고아 100명을 이끌고 황하 강을 건넌 영국 여자 선교사 글래디스 에일워드(1902-1976), 휘튼대학 출신으로 친구들과 함께 남미 에콰도르 아우카족 선교에 나갔다가 창에 찔려 죽어,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희생한 것은 바보가 아님을 보여준 짐 엘리엇(1927-1956), 그리고 27세에 스코틀란드를 떠나 아프리카 오지에서 사자에게 왼팔을 잃고도 길고 긴 고난의 행군과 질병의 끝에 자신의 심장을 아프리카 땅에 묻고 죽은 리빙스턴(1813-1873)…, 그들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넘어 자신을 희생한 영웅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자. 그들 중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 있었던가? 목숨 다할 때까지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완전한 영웅이 있었던가? 없었다. 영웅같아 보이는 그들의 삶 구석구석에는 너무 심하게 찢겨진 삶의 파편과 갈등과 어지러운 파국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과 부적응,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한 성품, 지나친 욕심, 소외감과 무기력 등으로 생긴 우울감 때문에 매일 힘들게 싸우는 연약한 인간 존재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위대한 선교사들의 경우 대부분 가정생활에 흠이 많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그 중 하나다. 그의 신앙고백,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the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the great things for God)”는 아름답지만, 그의 가정생활은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아내 도로시는 처음부터 그와 인도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서긴 했지만 다섯 살 짜리 아들이 죽자 심각한 정신질환에 빠졌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남편에게 불평을 쏟아냈고, 심지어 그를 바람둥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어느날은 설교하는 남편 앞에서 그가 간음을 저질렀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녀의 병적 우울증은 51세로 죽은 순간까지 계속됐다. 이로 인해 윌리엄 캐리는 불행한 가정생활을 살았다.

일생을 우울증 속에 살다가 죽은 대표적인 선교사가 미국 청교도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다. 평생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위해 헌신했던 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은 태생적 우울증 때문에 남모를 고통 속에 살았다. 그의 우울증은 그가 사역에 더 매진하고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을수록 더 심화되었다.

인디언 마을 가까이 오두막을 짓고 선교할 때 그는 이렇게 썼다. ‘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라고 우울한 황무지에 살고 있다.’ 질병과 우울증은 일생 그를 따라다니는 고통의 씨앗이었다. 재정 후원만 받고 이룬 것 없다는 무능감, 인디언들을 선교하면서도 때로 그들을 어리석고 무지한 짐승같은 존재로 여긴 자신에 대한 죄책감,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가 없다는 선교의 무기력증과 탈진 등으로 그의 우울증은 그가 스물 아홉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선교사들의 타고난 인격적 결함은 선교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은 매우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심각한 그의 인격적 단점은 평생 그의 사역에 장애물이 되었다. 진젠도르프(Zinzendorf, 1700-1760)는 금욕주의자로 평생 아내와 멀리 지내는 바람에 그의 아내는 평생 외롭게 살았다. 원주민들을 선교하면서도 그들을 미개하게 여기고 그들과 함께 사는 것도 자주 힘들어했다.

월드비전을 창설한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로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라는 아름다운 기도를 남겼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는 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딸을 남겨두고 선교를 떠나는 바람에 얼마 후 칼로 자해한 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중국, 인도, 아프리카 선교에서 큰 발자취를 낸 찰스 T. 스터드(Charles T. Studd, 1860-1931)는 오락도, 휴일도, 안식도 없는 완벽주의로 선교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일했다.

그렇다. 2천 년 교회사를 빛낸 선교의 영웅들 중 흠이 없고 완벽한 사람이 있었는가? 단언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약하디 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셨다는 것이다. 거룩한 삶의 비밀이 여기 있다.

“거룩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The most secret of living a holy life does not lie in imitation Jesus, but letting the perfect qualities of Jesu exhibit themselves in my human flesh)”.

거룩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교는 무엇인가? 선교는 “주님으로부터 거룩하게 되는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거룩의 능력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것이다(Mission is not drawing from Jesus the power to be holy, it is flowing from Jesus the very holiniess that was exhibited in Him)”.

나는 누구인가? 아니 누구여야 하는가? 목회자든 선교사든 평신도 일꾼이든, 우리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자주 물어야 한다. 혹시 우리 인격적 결함이나 정신적 연약함, 부적응과 무능 때문에 낙심과 우울증에 빠져 있지 않은가? 별처럼 빛나는 교회사의 영웅같은 별들(stars)은 그들의 아픈 상처(scars)로부터 온 것이다. 상처는 은혜의 생수가 스며드는 통로다.

깨어져 가는 윌리엄 캐리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도에 광대한 선교의 문을 여셨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브레이너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이 구원받을 길을 열었다. 작은 여성 글래디스 에일워드(Gladys Aylward, 1902-1970)를 통해 중국 선교의 빗장을 여신 하나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도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자.
우리가 질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강한 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실망하기보다, 너무 강하기 때문에 염려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 연약한 부분은 강하게 하시고, 강한 부분은 약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강하신 주님이 나타나고,
우리의 작은 육체를 통해 하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는 질그릇 같이 연약한 채로 대림절의 주님 앞에 선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온 백성 지으신 만왕이시니 그 자비 영원히 변함 없어라(찬송가 67장 4절)”.

▲이윤재 목사. ⓒ크투 DB
▲이윤재 목사. ⓒ크투 DB

이윤재 선교사

아프리카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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