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가 감상하고 극찬한 작품
두 인물의 감동적인 포옹과 시선
정신적·육체적 사랑 절묘한 조화
이삭과 리브가 그 시대 끌어들여

렘브란트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이삭과 리브가), 캔버스에 유채, 121.5x166.5cm, 1665년경, 암스테르담 레익스 뮤지엄 소장.
레익스 뮤지엄(Rijksmuseum)은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국립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120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수집된 총 100만 점의 예술품 중 8,000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요하네스 베르메르, 얀 반 호연, 야곱 루이스달의 걸작도 포함된다. 미술관은 새로 단장해서인지, 이전보다 넓고 쾌적했으며 특히 3층에 진열된 17세기 네덜란드의 소장품이 볼 만했다.

소장품 중에서 단연 압권은 렘브란트(Rembrandt)의 <유대인 신부>였다(레익스 뮤지엄은 렘브란트 유화 22점 외에도 수백 점의 판화와 소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과 관련해서 전해 오는 일화가 있다.

1885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친구 안톤 케서마커스와 함께 레익스 뮤지엄을 찾았다. <유대인 신부>(Jewish Bride, 1665)를 보며 “나는 말라 비틀어진 빵만 먹더라도 2주일간 계속 이 그림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기꺼이 내 생애의 10년과 바꿀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두 인물의 감동적인 포옹과 사랑스러운 시선은 반 고흐에게 강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훈훈한 감정이 묻어나는 남성의 얼굴과 따뜻한 손길에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남성의 왼손은 신부의 어깨에 살짝 얹고 오른손은 신부의 가슴에 살며시 대고 있는 구도이다.

19세기 초 암스테르담의 한 수집가는 나이 차가 나 보이는 두 사람을 ‘결혼하는 딸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는 유대인 아버지’로 해석했다. 이로부터 <유대인 신부>라는 명칭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전에 제작한 드로잉 <이삭과 리브가를 훔쳐보는 아비멜렉>(1654)도 이와 비슷하게 남성이 여성을 다정하게 포옹하는 구도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점도 찾아지는데 그것은 그림의 오른쪽 상단 발코니에서 연인들을 몰래 지켜보는 남자의 얼굴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의 주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렘브란트
▲렘브란트, 이삭과 리브가를 훔쳐보는 아비멜렉, 펜과 잉크, 과슈, 145x185cm, 1654.
창세기에 따르면 기근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를 아비멜렉이 다스리던 블레셋 땅 그랄로 보내셨다. 그런데 이삭은 아름다운 아내를 탐하는 사람들에게 살해당할까 겁이 나서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멜렉은 창밖을 보다가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껴안고 있는 것(창 26:8)”을 보게 됐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속임수를 질책하지만 이방인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소묘 작품을 근거로 <유대인 신부>가 나왔고 그림의 주인공이 그랄 지역의 이삭과 리브가라고 파악하게 되었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가 <유대인 신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반 고흐를 고무시켰던 것은 그림의 혁신적인 회화 기법이었다. 렘브란트가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약 6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예술적 솜씨를 동원하여 가장 풍부한 질감과 텍스추어의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삭이 입고 있는 의상에 매우 얇은 선, 즉 망토와 소매, 그리고 그의 저킨 슈트에 지그재그 패턴과 주름을 넣고 스크래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런 테크닉은 특히 넓은 황금색 소매에서 두드러지는데, 두꺼운 물감을 칠하고 나이프로 깎아내고 밀어내는 방식을 통해 풍부한 질감효과를 조성하였다.

밋밋한 바탕과 비교해볼 때, 소매 부분은 부조가 더욱 분명해 보인다.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조작하는 기법에 대해 요나단 비커(Jonathan Bikker)는 ‘매혹적인 클라이맥스’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앞에서 지적했듯 <유대인 신부>를 그릴 때, 렘브란트는 아비멜렉을 배제시켰다. 아비멜렉이 빠짐으로써 이제 관객은 두 연인을 응시하는 정탐꾼 역할을 맡는다. 우리를 현장에 직접 참여시키는 셈이다.

렘브란트
▲레익스 뮤지엄에서 렘브란트 작품을 감상하는 방문객들. ⓒ서성록 교수
렘브란트는 정탐의 역할을 관객에게 맡김으로써 두 사람의 친밀감과 따뜻한 사랑을 깊이 있게 바라보게 하였을 수 있다. 렘브란트 전기 작가인 크리스토퍼 화이트(Christopher White)가 “회화 역사상 정신적·육체적 사랑의 절묘한 조화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중 하나”로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다.

우리는 흔히 구약의 인물인 이삭과 리브가를 아득히 먼 세계에 있음직한, 전설적 인물로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역사적 초상화’의 형식을 빌려, 두 사람을 렘브란트 시대의 인물로 끌어오고 있다. 이삭과 리브가로 분장한 실제 커플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 모델을 정황상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것만도 아니다. 특히 성경의 인물들을 그릴 때 렘브란트가 교유하던 유대인을 모델로 기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는 그들은 스페인의 종교탄압으로 저지대로 넘어오거나 포르투갈에 정착했다가 쫓겨난 사람들의 후예였다.

네덜란드 사회는 이주자였던 부유하고 유능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네덜란드가 발전하는데 기여함으로서 공화국의 일원이 됐다. 렘브란트의 경우 유대인의 초상을 그린 적도 있고 애호가층이 있을 만큼 스스럼없이 지냈다. 그가 거주하던 요덴부르트(Jodenbuurt)도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이런 연유로 훗날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렘브란트에 대해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대인 국민 시인 비알리크(Bialik)는 “렘브란트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유대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공감 때문에 우리는 그를 명예로운 유대인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고, “이 천재는 다른 어떤 이방인 화가도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기적적으로 히브리 영혼의 핵심을 포착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알리크는 수많은 화가가 있지만 렘브란트만큼 자신의 민족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 모두가 렘브란트가 성경 그림을 제작함으로써 비롯된 일이며, 유대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네덜란드 사회의 관용이 빚어낸 결과이다.

이 명화를 통해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의 친밀함, 곧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의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