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대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 하면 ‘율법(십계명)에 나타난 도덕적 의’를 우선 떠올린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죄인을 대신해 성취하려고 했던 ‘의(義)’도 죄인의 힘으론 성취할 수 없는 그 ‘도덕적 의(moral righteousness)’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의’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닌, 자동반사적으로 그것에 그들의 시선이 향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의 영혼에 새겨진 ‘양심의 율법(롬 2:14-15)’이 그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도덕적 의(moral righteousness)개념’에 경도(傾倒)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범죄 한 죄인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한 ‘의(義)’는 ‘도덕적 의’가 아닌 ‘죄삯 사망(롬 6:23)의 지불’로 말미암은 ‘구속적 의’였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도 그 ‘구속적 의(righteousness of redemption)’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성자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은 이유’를 우리 대신 ‘도덕적 의(moral righteousness)’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는 ‘대속물(ransom, 代贖物)’이 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5-10).”

여기서 하나님이 ‘나(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내(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말씀들은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목적’이 ‘어떤 특정한 율법적 의(義)’나 ‘어떤 특별한 임무’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 ‘택자를 거룩케 하려고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드리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또한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는 말씀에서도 ‘의의 한 행동’과 ‘한 사람의 순종하심’ 역시 ‘그리스도의 특정한 한 행위(능동적 순종)’가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수동적 순종)’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성취하려고 했던 ‘구속의 의(righteousness of redemption)’는 죄인들에게 ‘궁극적인 의’이다. 이는 ‘그가 구원을 받느냐 심판을 받느냐’의 기준이 ‘구속의 의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택자의 구원과 피난처가 되어주심으로 ‘그의 의(義)의 실체’가 ‘구속의 의’임을 확증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끝까지 믿고 의지할 것은 ‘그의 긍휼로 말미암은 구속’ 곧, ‘하나님의 헤세드( חֶסֶד)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두고,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Keep yourselves in God's love as you wait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o bring you to eternal life, 유 1:21)”.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2).”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의 의(義)’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시고(눅 2:21),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마 3:13-17).”, ‘십계명’을 비롯해 ‘온갖 율법’을 준수하신 것’은 그가 율법 아래 나신 자(갈 4:4)로서의 ‘개인적인 의무를 준수’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 때 이를 사양하는 요한을 향해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요 3:15)”고 하신 말씀도 ‘택자에게 전가시킬 대행적(代行的) 의(義)를 이루자’는 뜻이 아닌, ‘율법아래 나신 개인 자신의 의(義)의 의무를 완수 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율법 준수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그것을 택자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대행적(능동적) 순종’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율법 준수(능동적 순종)’이 택자에게 전가해 주기 위한 ‘대행적(代行的)인 의(義)’였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대속(代贖)·대행(代行)의 두 가지 의’를 취한 ‘이중과세(二重過歲) 취득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택자를 위해 율법에 순종하신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율법이 요구하는 그들의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기 위한 구속적(수동적) 순종’이었다. 택자의 구원은 그것으로 충족된다. ‘그 외의 그가 준수하신 율법’은 ‘율법아래 나신 의인(갈 4:4)으로서의 율법의 의무’를 행하신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를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구속의 성취’로 못 박았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여기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은 ‘죄인이 육신의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없는 도덕적 의’라는 뜻이 아닌, ‘죄인이 육신의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없는 구속(救贖)의 의(義)’를 뜻한다. 그리고 그 ‘구속의 의(righteousness of redemption)’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 이루셨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의를 좇는다’는 말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거기엔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을 존숭하며 그것을 준수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것의 준수를 통해 그는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소위, 개혁자들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Third Use of the Law)’를 구현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의(ultimate righteousness)’는 아니다. 그들이 우선시 하고 궁극으로 삼는 의(義)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적인 의’이다. 이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족시켜(사 53:11)’ 드리고, ‘죄인을 의롭다’ 해 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재차 말하지만, 성경이 이 ‘믿음의 의(義)’를 ‘여러 의(義)중 하나’로 분류하지 않고 ‘유일하고 궁극적인 의’로 천명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믿음의 의’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지 않는 ‘유일한 하나님의 의’로 천명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진력하고 자랑할 의’이며, ‘영원히 좇을 의’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의’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법의 준수’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하나님께 ‘의(義)’라 할 만한 것은 ‘성자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화를 위한 도덕적 의’를 강조할 때도 ‘믿음의 의’가 퇴색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덕적 의)는 언제나 ‘믿음의 의에 잇따른 결과물’로 존치돼야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