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를 만나다
절세미인, 팜므파탈 등 가짜 뉴스
승자 의한 역사 기록, 양념 이야기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영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중 한 장면. 클레오파트라는 ‘절세미인’으로 곧잘 묘사된다. ⓒ위키
지난 글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로마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카이사르를 설득하여 군대를 이끌고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장녀 베르니케는 아버지의 귀환에 반대하였지만, 로마 군대에게 패전하고 사망한다. 이집트 왕위에 복귀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더 이상 ‘피리 부는 자’가 아니었다. 로마 망령 경험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아스완 근처 필래 섬에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크게 사랑받던 여신 이시스를 위한 신전도 건설했다. 그리고 죽을 때 유언장에서 그는 전통에 따라 두 명의 통치자를 임명한다.

그 유언장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와 그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결혼하여 이집트를 통치할 것이다.” 왕과 왕비가 함께 다스리는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관행이지만, 문제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이복 남동생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역사를 말할 때, 그녀에 관한 전설들과 역사적 사실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다음 내용은 분명한 가짜 뉴스다. 로마인들은 그녀를 선량한 로마 남자를 유혹한 음녀, 팜므파탈, 헤픈 여자 등으로 폄하하는데, 이것은 분명 사실과 다르다.

이런 가짜 뉴스가 아직까지 널리 유포된 것은 역사가 승자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이다. 이집트에게 승리한 로마인들이 그들의 무용담에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양념으로 섞어 이야기한 것들이 아직까지 회자된다.

클레오파트라
▲글래스고 대학의 훈테리안 박물관이 소장한 클레오파트라 동전. 매부리코에 미인상이 아니다.
실제 역사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고, 일부일처였으며, 여러 남자와 돌아가며 잠자리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다음 동전은 클레오파트라의 초상을 담고 있는데, 매부리코에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녀의 흉상도 발견되었다. 그녀는 빨간 머리에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유혹녀의 얼굴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은 카이사르를 만나기 전, 카이사르와 함께, 카이사르 이후 등 세 기간으로 나뉜다.

이집트어·그리스어 했던 명석한 여왕
왕권 위해 로마 제국 지지 중요 이해
포티누스 반란 터지자 시리아로 망명

1. 카이사르를 만나기 전

클레오파트라는 매우 명석한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멤피스 근처 사카라를 방문했을 때 아피스 황소의 무덤을 보고 이집트어를 배우기 시작해,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할 수 있는 그리스 왕이 되었다.

이집트어를 마스터한 것이 그녀의 언어에 대한 재능의 결과일 수 있지만, 외국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이집트 원주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했던 것 같다. 초기 통치에서 테베 남쪽 헤르몬티스(Hermonthis, 현 아르만트)로 가서 부키스 황소 축제에 참가했는데, 이때 이집트 사제들이 같은 배에 탄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이집트어를 할 수 있는 그리스 여왕이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집트 축제에 간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베를린 박물관이 소장한 클레오파트라 흉상. 빨간 머리에 평범한 얼굴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어를 할 수 있는 ‘이집트’ 파라오로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또한 그녀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보고 왕권을 유지하는 일에 로마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했다. 이것은 이후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클레오파트라가 여왕이 됐을 때 나이가 대략 17세였고,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10살에 불과했다. 때문에 포티누스(Pothinus)가 이들과 함께 통치하여 로마처럼 3명이 함께 협력하여 통치하는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왕과 여왕의 연소함을 생각할 때, 환관, 정치가, 수사가였던 포티누스가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던 중 클레오파트라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포티누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형성했던 것이다.

포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친로마주의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로마를 매우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언제나 로마에 대한 경멸감을 가졌고, 자신의 지배자가 로마의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했다. 포티누스의 선동으로 발생한 반란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카이사르에 17세 융단 쌓여 배달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복권해
알렉산드리아 전쟁 승리로 회복

2. 카이사르와 함께한 기간

로마가 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당시 로마는 내분 중이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하는 중이었다.

폼페이우스가 먼저 이집트에 도착한다. 포티누스는 폼페이우스를 영접하는 척 하면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인다.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도착하자, 포티누스는 그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때 카이사르가 포티누스에게 대노한다. 구약 성서의 다윗처럼, 카이사르는 그의 적을 존중하는 신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혼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폼페이누스를 죽인 포티누스를 벌하지 않는다. 이집트 곡물의 안정적 공급이 로마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와 대면하여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기로 결심한다. 포티누스와 그의 남동생이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몰래 알렉산드리아에 들어가 궁으로 잠입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라 주연의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를 보면, 그녀는 융단에 쌓여 카이사르 앞에 배달된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역사적 고증이 잘 된 영화이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는 융단에 쌓여 궁으로 들어갔다. 카이사르가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신하들이 “선물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막상 그 융단 안에는 17살짜리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회자되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관계였는가? 연인이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는 교육을 받은 중년 신사였는데,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지성과 강인함에 반했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많은 언어를 했을 뿐 아니라 헤로도투스의 <역사> 등 고전 문서들을 읽어 박식했다.

반면 카이사르가 경험한 로마의 여인들은 집에만 있고 학교에도 가지 않아 글도 깨우치지 못했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중년 남자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이국적 외모에 지적이고 강인한 여자를 보고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다시 그의 남동생과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도록 허락했다. 즉 이전 지위로 클레오파트라를 복권시킨 것이다. 하지만 포티누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을 ‘알렉산드리아 전쟁(주전 47년)’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카이사르가 승리하고 포티누스는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도망하다 나일 강에 빠져 죽었다. 이로서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다.

테베 헤르몬티스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여행
▲테베 남쪽에 위치한 헤르몬티스 신전의 1857년 모습. 그후 무분별한 발굴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와 여행
아들 낳자 카이사리온이라 지어
로마 입성시 화려한 볼거리 유혹

전통에 따라 클레오파트라는 남자 통치자를 곁에 두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남동생과 결혼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된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그는 기록에서 곧 사라진다.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때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은 카이사르가 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데리고 나일 강을 따라 이집트 여행을 떠난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기 위해 계산된 여행이었다. 카이사르는 교육받은 신사이지만, 피라미드, 신전, 탑 등의 이집트 문명을 본 적 없는 로마 ‘촌놈’이었다.

그는 탈라메고스(Thalamegos ‘houseboat’)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이집트의 다양한 건축물과 예술들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또 이집트 사람들이 클레오파트라를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고, 곁에선 자신도 숭배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때 카이사르는 통치자가 일반 백성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죽게 될 것이다.

여행 중 그들은 테베 남쪽에 위치한 헤르몬티스에 방문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임신 중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것이라 주장하며, 만약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곳에 그의 출생을 기념하는 작은 신전(맘미시 mammisi)을 짓겠다고 약속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여신이기 때문에, 그의 몸에 태어난 아이도 자동적으로 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카이사리온, 즉 ‘작은 카이사르’라고 짓는다. 오늘날 카이사리온 신전은 파괴됐지만, 지금 남아 있는 돌에 클레오파트라의 카르투쉬 이름이 아직까지 새겨져 있다.

카이사리온이 정말 카이사르의 아이인지는 논쟁이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이라는 이름을 쓰도록 허락한 것 같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갈 때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을 데려가, 그들에게 아내와 아들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집트인들 관점에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합법적 남편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번에 한 명의 남편만을 두었다. 당시 카이사르가 유일한 남자요 남편이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이미 좋은 로마인 아내를 두고 있던 카이사르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데려왔을 때, 로마인들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런 안 좋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대중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입성할 때, 화려한 수행단이 그녀를 호위했다. 당시 이시스 신으로 분장한 이집트 여왕의 모습은 로마인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그후 카이사르는 그녀를 로마 교외 자신의 빌라에서 살게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내로 인정받고 카이사리온도 그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것 같다.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덴데라 신전의 클레오파트라(하토르 분장)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XV 카이사리온.
원로원, 카이사르 신격화 우려해
카이사르 死, 클레오파트라 위기
이집트로 도망, 아들 왕으로 세워

카이사르도 대중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알렉산드리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 행진을 한다. 그 때 그가 전쟁에서 취한 다양한 전리품들을 보고 로마인들은 매우 신기해했다. 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기린을 처음 본 로마인들은 그것을 ‘표범 가죽을 가진 낙타’라고 표현했다.

이 개선 행진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 아르시노에(Arsinoe)가 쇠사슬에 매여 행진한 것이다. 아르시노에는 포티누스와 협력해 클레오파트라를 죽이려 했고 클레오파트라도 그녀를 싫어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족이 쇠사슬에 매여 다른 노예나 동물 들과 함께 행진하는 모습에 클레오파트라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족은 300년 동안 이집트를 다스린 가문인데, 그 가문의 공주가 그런 모습으로 조롱당하는 것이 마냥 기분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카이사르는 큰 위기를 맞는다. 그는 이시스 신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의 신상을 로마 신전에 세웠는데, 이것을 본 로마인들이 크게 분노하였다.

이집트 여인을 로마 신전에서 여신으로 섬기는 것은 민중의 정서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로마인 아내가 있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신으로 생각하는 카이사르가 점점 자신도 신격화할 것이라는 염려도 생겨났다.

로마 원로회는 카이사르가 왕이 될까 걱정했다. 사람들은 그가 너무 이집트 왕처럼 되어간다고, 너무 그리스인처럼 되어간다고 걱정했고, 정치인들도 그가 공화정을 포기할까 걱정했다.

이런 카이사르에 대한 백성들과 정치인들의 분노는 결국 카이사를 죽음으로 이끈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Plutarch)에 따르면, 어떤 예언가가 카이사르에게 3월 15일에는 원로원에 가지 말라 예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 예언을 무시하고 그 날에 원로원에 갔다가 칼에 찔려 암살당한다. 그 때가 주전 44년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클레오파트라를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한다. 남편이 암살당한 지금 로마에 아들 하나와 함께 홀로 사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물론 로마 여자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매우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의 화장술이나 패션 등이 유행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그런 그녀의 인기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녀는 도망해야 한다. 이집트로 아들을 데리고 도망한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세트(Seth)에게 남편을 잃은 여신 이시스의 처지와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실제로 평소 이시스처럼 화장하고 치장한 그녀는 이제 이시스처럼 지켜야 할 어린 아이도 가졌다. 그래서 이집트로 도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집트의 여왕으로 복귀하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왕으로 세운다. 덴데라 신전의 벽에 이시스-하토르 여신의 모습을 한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 카이사리온의 모습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카이사리온은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된다. <계속>

김구원 교수
▲김구원 교수. ⓒ크투 DB
김구원 교수

단국대 고대문명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통독주석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쉬운 구약 개론(공저, 이상 이상 홍성사)>, <가장 아름다운 노래> 등
역서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고대 근동 역사>,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이상 CLC)>,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출애굽 게임(이상 홍성사)>, <책의 민족(교양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