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발전 토대’ 굳건한 한미동맹, 그 토대는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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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칼럼] 한국 근현대사, 대한민국, 그리고 기독교 (5)

박명수 박사님(서울신대 명예교수)께서 지난 1월 16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부당한 폄훼 및 그 시정방안’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소개합니다. 이 글은 지난 2022년 2월 역사연구재단에서 열린 한국근현대사 세미나에서 발표하신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편집자 주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소련제 T-34 탱크와 모터사이클 정찰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소련제 T-34 탱크와 모터사이클 정찰대.

6.25 전쟁이 한반도에 끼친 변화
1. 분명히 서구 세계 일원 포함
2. 자유민주주의 국가 정체성
3. 자유시장 경제 수용

V. 6.25 전쟁과 한국 기독교: 대한민국의 수호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은 한반도 남부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며, 개인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것이고, 이 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반공을 중요한 가치로 삼은 정치 체제 수용이었다. 이는 개항 이후 개화 세력이 꿈꾸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이 같은 대한민국 건국은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남한만의 국가로 제한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선(先) 남한 민주국가 성립, 후(後) 통일민주국가 건립’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입장은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한반도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돼 개인 소유를 부정하고 인민 혁명을 주장하는 인민공화국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북한만의 국가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1948년 분단 체제 성립은 자체적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한반도에서 무력으로 통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은 바로 북한이었다. 이미 김일성은 해방 직후부터 민주기지론을 내세워 북한을 먼저 공산화한 다음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실질적으로 군대를 양성했으며, 1948년 2월에 이미 인민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1948년 9월 인민공화국 수립 연설에서 소위 ‘국토완정(國土完征)’을 강조하였다. 이런 기반 위에서 김일성을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 비해 남한의 이승만은 북진통일(北進統一)이라는 명분만 있었지, 실제로 북한을 향해 무력으로 도발할 아무런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염려해 무장을 도와주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1949년 6월 소수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철수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 중 미군이 공산군의 포탄을 맞고 사망한 스웬슨 중위의 수장식을 함정에서 거행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인천상륙작전 중 미군이 공산군의 포탄을 맞고 사망한 스웬슨 중위의 수장식을 함정에서 거행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이런 상황 가운데 1950년 초 美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이런 상황은 소련과 북한을 오판하게 만들었고, 결국 6.25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6.25 전쟁은 38선을 휴전선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경계선으로 바꾸어, 남북의 분단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한 민족의 견지에서 가장 큰 비극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 가운데서도 6.25는 한반도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6.25 이후 한국사회는 분명하게 서구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된 다음 한반도에 서구문명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것은 여러 문명 가운데 하나였다. 한반도에는 일본·소련·중국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명은 그 중 하나였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내에는 유교적 친중 세력과 친일 세력, 러시아의 공산 세력이 있었고, 서구 기독교 세력은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6.25 전쟁 후 한반도에서 이런 다른 세력들은 많은 힘을 잃었고, 서구 기독교 세력이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휴전선은 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고, 한국 내 일본 문화는 역사의 중심에서 쫓겨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화의 종속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6.25는 한반도를 대륙과 동북아 질서에서 벗어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기독교 문화에 편입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기독교는 성장하게 된 것이다.

둘째, 6.25 이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했다.

사실 1945년과 더불어 만들어진 38선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한반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지저스아미

하지만 6.25 전쟁 동안 남한은 자유민주세계에 속하게 되었고, 공산주의 세계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틸리(Charles Tilly)가 말한대로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든다.” 휴전선은 이제 분명한 국경선이 되었고, 휴전선 이남에서 공산주의는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950년 6월에서 9월까지 남한 사람들은 실지로 공산주의를 체험하였고, 1950년 10월에서 11월까지 북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체험하였다. 이런 체험 가운데 국가에 대한 선택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월남하였다. 이런 경험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셋째, 6.25 이후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경제를 수용하게 되었다.

해방 공간에 나타난 한국인들의 사회의식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자본주의를 선호했다. 유교적 멘탈리티에 깊숙이 뿌리내린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승만은 건국 이후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을 땅의 소유자로 만들어 개인의 소유의식을 갖게 했지만, 일본 적산을 유업으로 받은 기업은 여전히 국유화 상태였다. 또 1948년 헌법에는 사기업에도 근로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이익분배균점권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6.25 전쟁 이후에 한국에 대해 헌법을 자유시장경제에 맞도록 개정할 것을 요청했고, 이것이 반영돼 1954년 헌법이 개정돼 기업을 민간인에게 불하해 국가의 통제보다는 민간 주도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1948년 자유민주주의는 확립되었지만, 시장경제가 확립된 것은 1954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본다면 대한민국 체제는 6.25 종전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57년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밥 피어스 목사(왼쪽)와 통역하는 한경직 목사의 모습. ⓒ월드비전 제공
▲1957년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밥 피어스 목사(왼쪽)와 통역하는 한경직 목사의 모습. ⓒ월드비전 제공

신생 대한민국에서 기독교 역할
1. 한미관계 공고화에 기여
2.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보루
3. 대한민국 건설 중심에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신생 대한민국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우선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독교를 통해 한미관계가 공고해졌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남한에서 미군은 철수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떠난 빈자리에 새로운 미국인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교사였다. 특히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중국에서 추방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고, 이들은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이들은 미국 본토 국민들과 달리 공산주의의 위협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북한의 남침을 알렸으며, 이는 미국에서 참전에 대한 여론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미국 기독교는 한국전쟁을 공산주의와의 이념전쟁으로 이해했고, 여기 앞장선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월드비전 창시자 밥 피어스(Bob Pierce) 같은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전도와 구호활동으로 한국과 미국은 단지 정치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연대하게 되었다.

6.25 전쟁을 통해 한국 기독교는 가장 강력한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보루가 됐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집단은 기독교였고, 따라서 1950년 6.25 발발 시 북한에서 기독교는 거의 전멸됐다. 이런 북한은 남한에 와서도 기독교를 박해했고, 기독교는 공산주의의 적대 세력이었다.

▲6.25 당시 부산 초량교회 회개기도회 모습. ⓒC채널
▲6.25 당시 부산 초량교회 회개기도회 모습. ⓒC채널

이는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남한의 공산주의와 가장 강력하게 싸운 집단은 바로 각 지역에 속한 교회였고, 교회 목회자들은 가장 강력한 반공 세력이었다. 6.25 전쟁 기간 북한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도 바로 교회였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신생 대한민국과 운명을 같이하는 종교가 되었고, 이런 성향 때문에 ‘정교분리(政敎分離)’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거의 ‘국민 종교(national religion)’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6.25 전쟁 가운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6.25 수복 후 많은 좌익들은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자신이 전향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6.25 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설의 중심에 서게 됐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 피해로 인한 고아, 과부,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미국 각종 단체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월드비전, 컴패션, 홀트아동복지회 등이 그런 단체들이다. 한국의 사회복지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각종 계몽운동에 나섰고, 수많은 사립학교들을 세웠다. 이런 사립학교를 통해 기독교 교육과 민주주의 교육을 시켰다. 기독교 사립학교들이 대한민국 교육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물론 미국 선교부를 배경으로 한 것도 있지만, 순수하게 한국 기독교인들의 손에 의해 시작된 것도 많았다.

아울러 한국 기독교가 의료활동에 기여한 것도 중요하다. 일본 패망 후 일본 의사들이 철수하였고, 그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기독교 학교에서 훈련받은 기독교인 의사였다. 필자는 6.25 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사회복지, 교육, 의료 분야에서 ‘유사 정부’ 역할을 했다고 본다.

▲1950년대 초, 밥 피어스 목사가 한국의 넝마주이 소년들 앞에서 풍선을 불어주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1950년대 초, 밥 피어스 목사가 한국의 넝마주이 소년들 앞에서 풍선을 불어주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하지만 1960년을 전후해 한국 기독교는 중대한 시련을 맞이했다.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기독교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주류 교단들은 WCC에 가입해 공산주의와의 대화에 나섰다. 이는 한국 기독교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대립된다고 생각했던 한국기독교는 WCC 내에 러시아정교회와 중공 기독교가 가입된 것을 보고 놀랐다. 한국 기독교는 이 문제를 놓고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미국 주류 교회와 손을 끊고, 미국의 극단적인 근본주의 단체와 손을 잡게 되었다.

좀 더 온건한 그룹은 미국 주류교회와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한경직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경직은 빌리 그래함이나 밥 피어스와 같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미국 교회의 원조 단절에도 불구하고 반공 입장을 고수하였다. 다시 말하면 많은 한국교회들은 자신들의 모교회와 달리 보수/복음주의 입장을 고수했다.

현재도 한국 기독교는 미국 교회 주류와 달리 반동성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런 한국 복음주의 교회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과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박명수 박사
서울신대 명예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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