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처장에 훈격 상향 청원서 전달
박 처장은 헐버트 복원 사진 선물
헤이그·미국 등지 독립운동 나서

보훈처 헐버트
▲박민식 처장이 소개한 학생들의 양화진선교사묘원 방문 모습. ⓒ페이스북
부산 지역 초등학생들이 일제강점기 을사 늑약의 부당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전 세계에 호소한 호머 헐버트 박사(Homer Bezaleel Hulbert, 1950년 독립장)의 훈격 상향 요청을 위해 17일(수)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을 만났다.

국가보훈처는 17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부산 서구 동신초등학교 6학년 학생 24명과 함께 이날 오전 11시 45분,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마포구)에서 헐버트 박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학생들로부터 헐버트 박사의 훈격 상향 청원서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이 학교 6학년 박보원 학생은 보훈처로 보낸 편지에서 “저희 반에서는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가고 배우는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며 “여기서 헐버트 박사님에 대해 알게 됐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우리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라고 전했다.

박보원 학생은 “유관순 열사님도 3등급에서 1등급으로 격상시킨 것처럼, 헐버트 박사님도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며 “헐버트 박사님은 한국 역사와 문화 등에 관해 20권의 단행본과 309편의 논문·기고문을 발표하셨다. 이런 헐버트 박사님은 1등급으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민식 처장은 이날 서울로 올라온 학생들에게 답례로 인공지능(AI) 기술로 복원한 헐버트 박사의 사진을 전달했다.

박 처장은 이날 만남 후 SNS에 “초등학생들이 헐버트 박사를 안다는 것도 대견한 일인데, 직접 깨알같이 편지를 썼다니 참 놀랍지 않나”며 “이런 학교가 곳곳에 있다면, 생각만해도 든든하다. 선호승 선생님! 진짜 감사하다. 나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아는 아이들이 만들어갈 대한민국의 미래가 정말 기대된다”고 소감을 남겼다.

보훈처 헐버트
▲박민식 처장이 소개한 박보원 학생의 편지. ⓒ페이스북
이날 헐버트 박사 묘소 참배를 마친 부산 동신초 학생들은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과 청와대 관람 등도 진행했다.

이번 묘소 참배와 청원서 전달은 ‘독립운동의 발자취’라는 학습을 진행하던 동신초 학생들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훈격 재논의 관련 기사를 보고, “헐버트 박사의 훈격이 공적에 비해 미약하다”며 박사에 대한 예우를 다하기 위해 훈격을 상향해야 한다는 편지를 지난 4월 국가보훈처에 보내오면서 이뤄졌다.

학생들은 편지에서 “웬만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해 주시고 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청춘을 바쳐주신 헐버트 박사님”, “솔직히 다른 나라에 와서 누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하기 힘든 일을 호머 헐버트 박사님은 다했다”며 서훈 상향을 요구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7년 5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고종이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고,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알리기 위해『한국평론』지에 실었던 기사들을 발췌·편집해 『한국에서 일본인』을 제작·보급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 기간 중 김규식과 여운홍의 한국 독립 청원 외교활동을 돕기도 했다.

1919년 9월 28일 시카고 청년회에서 한국에 대해 강연하고, 미국 각 지역을 돌며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으며,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고 설파했다.

헐버트 박사는 1924년 4월 중순부터 130일 동안 태평양 연안 110곳에서 한국 사정을 소개하는 순회 강연을 진행했으며,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의 해방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1949년 8월 5일 사망했고, 평소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에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국민과 함께,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훈격을 위한 공적 재평가’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역사학계와 법조계, 언론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학생들이 독립의 역사와 그 역사의 현장에서 헌신한 독립유공자들의 생애와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매우 의미있게 생각한다”며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과 논의를 통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훈격 재평가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국가보훈처가 소개한 헐버트 선교사의 주요 공적사항.

조선 선교사 헐버트
▲과거 조선에서 강의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조선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입국금지를 당했다. 한국인의 심성과 종교성, 특히 유교와 불교와 무속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시도했다.
1886년 9월 육영공원을 개원하여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파송된 관리들과 함께 육영공원 절목(節目)을 만들었다. 1891년 천문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작하여 순한글판으로 발행하였다. 1891년 12월 육영공원 교사 고용계약이 만료되어 귀국했다. 서울에 있던 아펜젤러 등의 주선으로 미감리회 선교사에 임명되었다. 1893년 9월 다시 내한하여 ‘삼문출판사’의 운영책임을 맡고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2년 12월호까지 발행하다가 중단된 최초의 영문 월간잡지『한국보고』를 1895년 1월호부터 다시 간행하였다. 이 잡지 1895년 10월호에서 「한국의 왕비 시해」라는 제목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1897년 5월 미북감리회 선교사를 사임하고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맡았다.

1901년 1월 월간 영문 잡지 『한국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인을 맡았다. 이 잡지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시사적인 문제도 취급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1903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에도 참여하여 10월 28일에 열린 창립총회의 의장을 맡았다. 1903년부터는 『더 타임즈』지 객원 특파원을 겸했다. 1904년에는 AP통신 객원 특파원도 맡아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꾸준히 연구하여 1905년에 『한국사』Ⅰ, Ⅱ권을 발행했다. 1906년에도 『대한제국멸망사』를 출간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해졌다. 그해 가을 고종황제가 그를 비밀특사로 미국에 보냈다. 미국 정부의 면담 지연으로 11월 25일에야 미국 국무장관 루트를 만나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항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12월 11일 고종황제의 “나는 보호조약을 인정하지 못하오. 조약은 총칼의 위협 아래 강압으로 이루어졌소. 나는 이 조약에 서명하지도 않았으며 윤허하지도 않았소”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아 12월 14일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답변은 단지 파일만 철해 놓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1905년 12월 12일자 『더 워싱턴 포스트』지와 12월 13일자 『이브닝 스타』지에 보도되었다.

헐버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내 헐버트 선교사의 묘.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는 글귀가 쓰여 있다.
결국 미국 정부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고 1906년 6월초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6월 22일자로 ‘특별위원’으로 임명하는 특사증을 받았다. 고종황제의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아,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벨기에 및 중국 정부를 방문하여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앞서 제반 문제를 조율하게 했다. 1907년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 그 동안 『한국평론』지에 실었던 기사를 발췌 편집하여 『한국에서 일본인』을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반일활동으로 일제의 감시와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한국에 있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하여 1909년 8월 비밀리에 다시 내한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강제로 퇴위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던 고종은 1909년 10월 조카 조승남을 통해 상하이 덕화은행에 예치한 자신의 예치금을 찾을 수 있는 서류와 10월 20일자로 된 위임장을 비밀리에 보냈다. 이 예치금을 찾아 우선 미국 은행에 예치해 두었다가 후일 나라를 위해 쓰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11월 초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여 상하이 주재 독일영사를 만났지만, 일본이 이미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와서도 뉴욕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은행가 재콥 쉬프(Jacob Schiff)를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1911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성인 교육운동인 셔토쿠어 순회 강좌(Chautauqua Circuit) 강사로서 1922년까지 미국 전국을 순회하며 극동의 정세 및 한국의 역사 등을 강연했다. 언론과 저술활동도 계속하였다. 7월 14일자 『뉴욕 헤럴드』지에 장문의 성명을 기고하여 한국에서 일제의 만행과 기독교 탄압 및 당시 재판중이던 ‘105인 사건’ 등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 때 한국과 맺은 통상조약에 따른 고종의 도움 요청을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절한 것을 비판하였다.

이 기사는 『신한민보』 1912년 7월 29일자에 번역 게재되었다. 같은 신문 1917년 8월 16일자에서도 “헐벗 박사는 한국역사를 저술… 한국 옛문명을 자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그의 문필 활동을 소개했다.

헐버트
▲헐버트 선교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미국종군 기독청년회 연사로 프랑스에 건너가 군부대 강연을 하였으며,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파송된 김규식과 여운홍의 외교활동을 도왔다. 다시 미국에 돌아와 각처를 다니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강연을 하였다.

1919년 8월 15일자로 「한국은 어떤가?」라는 진술서를 미주리주 상원의원 스펜서를 통해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 제출하여 의사록에 실리게 하였다. 이 진술서에는 을사늑약을 비롯한 일제의 한국침략 자료와 미국정부의 한국 도움 거절에 대한 자료 및 고종 황제의 상하이 덕화은행 예치금에 대한 확인서가 포함되어 있다.

1919년 9월 28일 시카고 청년회에서 한국에 대한 강연을 하고,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의 상황을 알리며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20년 2월 23일 델라웨어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에서도 한국 사정을 강연하여 미국인의 동정과 후원을 요청하였다. 1924년 4월 중순부터 130일동안 태평양연안 110곳에서 한국사정을 소개하는 순회 강연을 하였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동안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한미협회가 공동으로 미국 워싱턴의 라파예트호텔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에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다. 여기서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무렵 한미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1월 20-21일에도 오하이오 애쉬랜드(Ashland)에서 개최된 ‘한인대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압제에서 조속히 해방되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희망에 대해서 강연하고, 미국인들이 도울 방안을 의논하였다. 특히 워싱턴에 기독교인친한회 사무실을 차렸다. 3월 16일자로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인을 돕기 위한 친한회 가입을 권고하고, 이미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회원 확보 활동과 기부금을 부탁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의 해방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하였다. 1949년 8월 5일 사망하였으며 장례식은 8월 11일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