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후 사등분된 마케도니아
이집트 맡은 프톨레마이오스 장군
1세, 70만 권 보관 도서관 건설해
2세, 70인역 성경 그리스어로 번역
100여 년 전성기 후 권력다툼 쇠퇴
12세, 로마 위해 세금 올리다 퇴위

이집트 애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가 람세스
▲주전 1264년 건립된 고대 이집트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 대신전(Abu Simbel Temple of Ramesses II). ⓒ위키

1. 클레오파트라의 가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열병에 걸려 죽어갈 때, 네 명의 장군들이 그의 방에 모여 후계 문제를 논의했다. 네 명의 장군들은 제국은 누구에게 돌아가느냐고 질문했고, 이에 대한 알렉산더의 대답은 “가장 적합한 자에게”였다고 한다.

이 대화가 얼마나 역사적인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알렉산더가 후계자 문제를 명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죽자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사분된다. 이 때 이집트를 맡아 다스리게 된 것이 프톨레마이오스(주전 323-285)이다. 처음에 그는 알렉산더 가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들 알렉산더 4세(주전 323-309)의 총독으로 섬기다가, 주전 305년부터는 직접 이집트의 왕이 되어 300년 정도 지속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시작한다.

소테르(구원자)라는 별칭을 가진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독특한 어려움을 가졌다. 이전 이집트를 지배한 제국들(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들)은 본래 통치 거점이 있고 이집트를 자국 영토로 편입해 통치하였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외국인 왕임에도 본토라 할 수 있는 통치 거점이 없었다. 그에게는 이집트가 전부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이집트인들에 의해 지지받지 못하면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이집트인들의 왕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이집트 전통 의복을 입고 전통 제의를 수행하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대중들을 만났다.

특히 고대 이집트의 전통을 따라 왕은 자신의 여동생이나 누나와 결혼했으며, 왕과 왕비의 신전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학자들은 이것을 ‘통치자 종교(the Ruler Cult)’라고 부른다. 즉 통치자를 신으로 섬기는 정치 체계이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실질적으로 왕과 여왕 2인 통치 체제였다. 물론 이것이 고대 이집트의 전통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신왕국 이집트에서 왕실 여인의 권한이 강했다는 점, 람세스 2세의 경우 아직 살아있을 때 자신과 아내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을 건설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형식적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이집트 전통을 따르려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전통이 그리스인이었던 그들의 이집트 통치에 도움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초기 통치자들은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 북부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70만 권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보관한 도서관을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집트 애굽
▲당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리아 항구 도서관 상상도.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건립했다. ⓒ위키

70만 권이라는 수는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발견되기 전 유럽에서 제작된 책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이다. 도서관 사서 캘리마쿠스(Callimachus)가 작성한 도서관 소장 목록만 120권 분량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규모보다 더 혁신적인 것은 도서관의 공공성이었다. 과거 이집트 신전에 설치된 ‘도서관’은 비교(祕敎)의 비밀 서고에 가까웠다. 이집트 신전에서 일한 사서의 공식 명칭이 ‘비밀의 감독관(Overseer of secrets)’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반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이것은 지식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리스 문화가 영향을 끼친 덕분이다. 그리고 도서관의 일부로 박물관도 건설되었다. 박물관의 어원 ‘무세이온(museion)’은 본래 9명의 학예 여신들인 ‘뮤즈들의 집’을 의미하며, 그 이름대로 그것은 학예를 장려하는 인류 역사 최초의 국립 고등연구기관이었다.

이전까지 학문과 예술은 개인의 업적이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학문을 혼자 했다. 생물학, 물리학, 수학, 윤리학 등을 혼자 연구했다. 여러분이 점성가였다면 한두 명의 조수를 둘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구는 혼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는 여럿이 공동으로 연구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전국에서 학자들을 모아 함께 연구하도록 ‘박물관’을 지었다. 박물관 소속 학자들은 무료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용하고, 집과 음식도 제공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학자들이 나왔다.

이곳에서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저술하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 길이를 계산했다. 그는 유럽의 탐험가 콜롬버스보다 먼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지름까지 계산한 것이다. 히로필루스는 심장이 아니라 뇌가 지성을 담당하는 기관임을 밝혀낸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박물관은 당시 지식의 발전소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네로 황제(주후 54-68)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이집트 애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가
▲당시 동전에 새겨진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Ptolemy II Philadelphus)의 두상. ⓒ위키

프톨레미마오스 1세를 이어 왕이 된 2세 필라델푸스(Ptolemy II Philadephus, 주전 285-246)도 국가를 잘 경영하였다. 그는 1세 소테르의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는 정책을 이어받았다.

특히 그는 구약 성서를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왕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 성경은 칠십연역으로 알려졌으며, 그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히브리어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가졌다.

하지만 초기 100여 년 간 전성기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가장 큰 이유는 왕가 내 권력다툼이다. 형제들이 형제들을 죽이는 일이 일상이었다.

이런 왕가 내부 혼란은 국내외 반란을 조장하였다. 주전 205-186년에는 이집트인들이 테베를 수도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부터 독립적 국가를 세웠고,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때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던 시리아-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았으며, 주전 170년 알렉산드리아까지 함락하려 했다.

로마의 중재로 간신히 독립을 유지했지만,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로마 영향권 아래 들어간다. 로마의 원로원이 이집트의 지배자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집트 애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네오스 디오니소스(아울레테스, Ptolemy XII Auletes)의 두상. ⓒ위키

이런 가운데 왕이 된 것이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제위 주전 80-58)다. 그는 왕조의 창시자 알렉산더 대왕처럼 스스로를 ‘디오니시우스’라고 불렀지만, 백성들은 그를 ‘호로자식’, 즉 부적절하게 태어난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의 왕위 정당성을 의심했다. 혹자들은 그를 아울레테스, 즉 ‘피리 부는 자’로 부르며 조롱했다. 피리 연주자는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놀기만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로마의 관계는 미묘했다. 당시 로마 군대는 세계를 호령했지만,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에게 그다지 존경받지 못했다.

이집트의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이 무식하고 교양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가 자랑할 것은 강한 군대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힘 세고 돈 많다 해서 문화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로마를 관광하는 사람들은 로마를 문화의 도시라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 남아있는 건축물과 조각 등은 모두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로마는 알렉산드리아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로마는 면적도 작고, 집들도 진흙 돌로 된 것들이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처럼 석고나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에 살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기본적으로 로마인들을 무시했다.

이집트 애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가
▲주전 300년대 알렉산더 사후 4등분된 제국 중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y I Soter)의 왕국(푸른색). ⓒ위키
문제는 백성들이 로마를 미워해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로마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왕위에 계속 머물기 위해서는 로마 원로원의 승인과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오랜 내부적 다툼으로 대내외적 통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이집트 원주민들은 독립을 원했고,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는 틈만 나면 침략하려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게 매우 중요한 동맹이었다.

한편 로마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를 유지시키는 것이 국익에 부합했다. 그 이유는 이집트가 ‘로마의 빵 바구니’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수입하는 곡물은 로마 경제에 필수적 요소였다. 당시 이집트 곡물의 중요성은 오늘날 세계 경제에서 석유나 천연가스가 가지는 영향력에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이집트에 강력한 왕권이 유지되어 로마로 곡물이 안정되게 공급되기를 원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에게 곡물을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그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경멸했다는 것이다. 문학·예술·학문에 많은 자부심을 가진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왕이 로마인들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다 반로마 정서에 불을 붙인 사건이 발생한다. 주전 60년, 로마에서 크라수스·폼페이우스·카이사르에 의한 제1차 삼두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새로운 로마 정부와 협상을 한다. 자신의 왕위를 보장해 주면, 더 많은 공물을 로마에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재원 마련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세금을 올렸다. 이것이 민중의 분노를 일으켰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쫒겨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큰 딸 베르니케(Berenice IV, 제위 58-55)가 왕이 된다. 아버지가 로마로 도망가고 큰 딸 베르니케가 왕이 되었을 때, 나머지 가족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왕가의 이전 역사에서는 왕이 된 형제가 나머지 가족들을 죽이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베르니케는 2인 통치 전통에 따라 사촌과 결혼하지만, 곧 그를 죽이고 오랜 친구와 재혼한다. 후에 여왕이 될 클레오파트라의 동명 누이도 기록에서 사라진다. 아마 제거되었을 것이다. 당시 7살이었던 클레오파트라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어린 나이가 그녀를 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집트 애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가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이집트 제30왕조 아피스(Apis)의 여신상. ⓒ위키

다음 글에서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야기 전에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주전 76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온 가족을 데리고 멤피스에 여행한 일이 있다. 이것은 그의 14살짜리 아들(Pasherienptah III)를 대사제로 임명하는 의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일을 마친 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가족들과 함께 멤피스 주변에 있던 아피스 황소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때 이집트인 사제가 성각 문자의 내용을 설명해가며 왕의 가족들을 안내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그 모습에 크게 감명받은 듯 하다. 그후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로마로 망명한 후에도 그녀는 여느 10대처럼 궁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전통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 언어도 습득했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고 이집트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도 가졌을 것이다. 당시 로마 여인들이 학교에 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후에 로마 남성들이 글과 문학에 박식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하게 된 이유를 조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김구원 교수
단국대 고대문명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통독주석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쉬운 구약 개론(공저, 이상 이상 홍성사)>, <가장 아름다운 노래> 등
역서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고대 근동 역사>,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이상 CLC)>,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출애굽 게임(이상 홍성사)>, <책의 민족(교양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