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우호문화재단이 25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송경호 기자
우호문화재단(이사장 신철식)이 25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학술회의에 앞서 인사를 전한 신철식 이사장은 “4년 반 동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활동해 보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왜곡돼 있고 좌경화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임기 동안 열심히 뛰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하다”고 했다.

신 이사장은 “식민지 생활 35년 끝에 기적적으로 해방됐으나, 1948년 건국 불과 2년 만에 공산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휴전 당시 대한민국은 참혹한 전쟁 폐허 속 세계 최빈국이었다”며 “그로부터 70년 만에 세계에서 인정하는 6대 강국의 하나라는 기적을 이룬 데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유시장주의 경제체제를 택했다는 것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미 세계적으로 완패한 공산사회주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설마설마하는 사이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심각한 수준으로 훼손되고 있다. 왜곡된 역사교육과 정치 때문에 자긍심을 가져야 할 기적의 대한민국을 비하하고 부끄러워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며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이승만 박사의 주도로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경제 발전을 경주한 영웅의 열정과 헌신을 살펴보려 한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 정립을 위해 이 같은 학술대회를 개최해 가겠다”고 했다.

이승만, 다양한 역사의 유산 남겨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자유민주주의
한국 소비에트화 막고자 반소반공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정부조직법 서명을 마치고 헌법 공포서를 읽는 이승만 국회의장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정부조직법 서명을 마치고 헌법 공포서를 읽는 이승만 국회의장(1948.7.17). ⓒ이승만기념관
제1주제는 ‘해방 전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국가 건설 구상’으로, 오영섭 소장(대한민국사연구소)가 발표하고 김정권 학예연구사(청와대관리활용기획추진단)가 토론했다.

오영섭 소장은 “초대대통령을 지낸 이승만(1875-1965)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유산을 남겼다. 자유민주주의 도입과 채택,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군사력 확충, 농지개혁 단행과 지주제 해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전후 복구사업 수행과 공업화, 산업화 기반 구축, 의무교육제도의 도입과 교육기관의 확충, 한글전용정책의 시행, 기독교(개신교) 장려운동 등의 업적은 이승만의 탁월한 개인 능력과 헌신적 애국충정의 결과물로, 이후 대한민국이 공전의 비약적 발전을 추진해나갈 토대로 작용했다”고 했다.

오 소장은 “특히 이승만이 우리 역사에 남겨 준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도입과 채택”이라며 “자유, 평등, 정의, 민주 등을 핵심가치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유교사회인 전통 한국에 매우 이질적인 사상체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배운 후, 모든 국민이 이를 향유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의 자유가 국가와 민족의 자유 독립과 문명 부강의 기초로 이어진다고 역설했다”고 했다.

오 소장은 “그는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자유, 평등, 정의를 한국인이 중시해야 하며, 개개인의 자유가 한국의 자주독립과 발전의 기초임을 명심해야 하며, 기독교에 기반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구한말에 이미 제시했다”며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제황제 고종을 의식해 온전한 형태로 제시되지 못했고, 따라서 이승만은 1910년대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완성된 형태를 갖췄다. 한국은 구한말에 입헌군주제와 민주공화제를 신국가의 정치체제로 고려했으나, 이승만은 구한말부터 해방 전까지 일관된 판단과 결단에 의해 기독교에 기반한 미국식 민주공화제를 주장했다”고 했다.

그는 또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상극관계인 공산주의와 이러한 사상체계를 신봉하는 국가나 체제를 극력 반대하는 반공사상의 담지자였다”며 “이승만은 1920년대 전반 공산주의를 처음 연구하여 공산주의의 장단점을 논급한 후, 평등주의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본가와 지식인, 종교, 국가를 무시하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제한적 반공사상을 형성했고, 1930년대 소련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강력한 반소반공사상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1940년대 전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국의 소비에트화를 막을 수 있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려면 소련공산주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강력한 반소반공활동을 벌였다”고 했다.

좌·우익, 서로 다른 민주주의 주장
개개인의 자유 vs 특정 계급 중시
자유민주주의 vs 소련식 민주주의

박명수 명예교수(서울신학대)
▲‘미국식 민주주의인가? 소련식 민주주의인가?’를 주제로 박명수 명예교수(서울신대)가 발표하고 있다. ⓒ송경호 기자
제2주제는 ‘미국식 민주주의인가? 소련식 민주주의인가?’로, 박명수 명예교수(서울신대)가 발표하고 홍후조 교수(고려대 교육학과)가 토론했다.

박명수 교수는 “해방 직후부터 1948년까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논의된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이며, 대한민국은 어떤 민주주의를 선택했는가를 밝히려 한다”며 “해방 당시 한반도에서 좌익과 우익은 다같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저마다) 자신이 진정한 민주주의라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과 김일성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미국과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서로 달랐다”고 했다.

박 교수는 “최근 자유민주주의는 역사교과서 서술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논쟁점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에는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민민주주의가 있는데,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이것이 교과서 서술에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며 “그런데 기존 역사학계가 ‘해방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며 ‘민주주의라는 단어만으로 해방 공간을 서술하는 데 족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해방 공간에서 민주주의 정의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비출 때 설득력이 약하다”고 했다.

그는 “민주주의 정의를 둘러싼 논란은 해방 후 점점 강화되어 갔고, 1947년 이승만, 김구, 오세창이 서명하며 날인한 공위(미소공동위원회: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회의)에 보낸 문서에서 논의가 좀 더 구체화됐다. 이 문서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민주주의는 자유스럽고 공정한 선거로 결정된 다수파의 지배를 의미하되 소수파에도 언론 자유와 반대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소련식 민주주의는 그 결과에 있어 특정 계급에 한해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고 기존 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민주주의 개념이 가장 치열하게 논의된 자리는 미소공위”라며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진정한 민주주의라 생각했고, 미국식 민주주의자들을 반동파쇼 친일 세력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북한에 만든 공산주의 단체를 민주주의 단체라 규정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가능한 모든 계층을 다 포괄해야 하며, 소수자의 권리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소련은 친소단체만 협의 대상으로 정하려 했고, 미국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아 미소공위는 결렬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미소공위의 중요한 쟁점은 ‘표현의 자유’였다”며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 원칙으로 간주하며,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승만과 김구를 제외하려는 소련의 행동을 비민주적이라 비난했고,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어떤 종류의 독재와도 선을 그으며, 대한민국이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반국가적인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승만의 이런 민주주의는 서구식 민주주의, 미국식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라고 상호 교환해 사용할 수 있다”며 “당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사용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같은 뜻이며, 소련식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고 했다.

제3주제는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본 이승만 정권(1948-1960)’으로, 이철순 교수(부선대 정치외교학과)가 발표하고 서희경 연구원(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이 토론했다. 제4주제는 ‘산업화 기틀 다져 자유민주주의 뿌리내린 12년’을 주제로 김용삼 대기자(펜앤드마이크)가 발표하고 최상오 학예연구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가 토론했다.

이승만 정권, 정치학 관점서 독재정권 아냐
어려운 조건 속에 자유민주주의 지킨 이유

이철순 교수는 “이승만 정권을 4.19로 붕괴된 독재정권이라고 일컫는데,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며 “일상에서 김일성 독재, 스탈린 독재, 히틀러 독재라는 말을 쉽게 쓰게 되는데, 이승만 정권을 독재 정권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한 인식을 가로막는다. 이승만 정권은 비민주주의 체제인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반(半)민주주의 체제에 가깝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승만 정권은 당시의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에 비해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은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는데, 이런 경제 수준에서 형식적 수준으로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950년대 비서구권 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한 나라는 인도, 일본, 필리핀, 코스타리카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이 더 높은 단계의 자유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어려웠던 것은 국가 건설의 초기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여러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이승만 정권이 외형적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적 신념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 교육의 실시를 들 수 있다. 또 미국은 한국이 민주주의 진열장이 되도록 노력한 것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