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그린 성화(렘브란트).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 24:13-17)”.

해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되면 산과 들에는 벚꽃과 목련화가 만발합니다. 고난주간에도 세상 풍조를 따라 벚꽃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왠지 모양새가 그리 썩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다행히 부활절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때면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고, 진달래와 유채꽃, 철쭉꽃까지 봄의 향연에 빛을 발하며 그 기쁨이 형언할 수 없도록 충만해집니다.

예루살렘 서북쪽 12km 정도에 클로니에로 추정되는 이곳은,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도 ‘엠마오’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신원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글로바는 예수님의 숙부 곧 요셉의 형제 또는 요한복음 19장 25절의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엠마오(Emmaoh)란 ‘따뜻한 샘물’ 혹은 ‘온천’이라는 뜻으로, 나눔과 섬김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날은 안식 후 첫날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 이 하루에 다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욥바 쪽으로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지만, 이 모든 된 일과 예수의 죽으심과 빈 무덤 사건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문의’할 때라는 말은 ‘논의하다’ 또는 ‘열렬히 토론하다’는 뜻이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체가 매우 특이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체가 있었음에도 닫힌 문을 열지 않고 제자들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9절에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시며 모르는 체 하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예수님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끌어내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스승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로마 병정들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힐 때까지 제자들의 마음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함으로, 아마 남은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하지 않았을까요.

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센 바다의 풍랑도 거치면서 줄곧 예수님을 쫓아다녔던 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 희망과 미래 없이, 앞이 캄캄하여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을 지경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도 세상을 살면서 많은 괴로움으로 실망과 낙심이라는 괴로운 고통들이 있습니다. 배고픔과 외로움 같은 육체적 혹은 동물적 고통이 아니라, 이성을 지닌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고통 말입니다.

이상과 사상을 지닌 인간은 미래지향적 기대감과 소망이 있는데, 이를 기대 혹은 소망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대와 소망은 우리 생활에 적잖은 활력소가 되는, 가장 아름답고 값진 것 중 하나입니다.

소망 없는 기쁨은 진정한 기쁨일 수 없습니다. 부귀영화로 기쁨을 채울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크든 작든 이 소망으로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아름다운 소망이 물거품이 되어 돌아올 때의 깊은 고통은 차마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아픈 상처입니다.

이를 실망 또는 낙심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25리쯤 가면 있는 마을이 ‘엠마오’입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가 석양에 타오르는 노을과 같은 슬픈 얼굴로 낙심해 슬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스승인 예수님을 다시 만나, 자신들이 버리고 떠나온 예루살렘 25리 길을 다시 거슬러 되돌아가는 용기 있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병 고침을 받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명예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소위 복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복 받겠다는 이야기만 눈에 들어옵니다. 대신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겠다는 이야기는 잘 들려오질 않습니다.

복 받는 것에는 눈에 뜨이는데, 썩어져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는 소식과 이야기는 거의 들려오지 않는 현실에 참으로 애가 마르기도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났던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향해 만사를 제쳐두고 가장 빠른 발걸음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과 부활에 대해 강하고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발걸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망의 길에서 돌이켜 새 소망과 용기의 새벽길에 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부활의 증인은 새벽 길에 섰습니다. 절망에서 희망과 용기로 가득한. 새벽 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는 이 은혜의 시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낙심할 필요가 없음에도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절망 중에 사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은, 이 시간을 통해 부족했던 믿음을 성찰하며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1초라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나의 조그마한 소원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쉽게 부정하는 것이 문제 아닐까요? 이는 불신앙에서 오는 참으로 나쁜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내게 주신 은혜’라는 이 엄청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근심과 걱정들을 일시에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은혜가 있기에 감사와 찬양이 절로 솟아납니다.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사로잡히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눈으로 보아도 귀로 들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에 집착되거나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과 권력에 의한 영광, 다윗의 왕국, 그 옛날 찬란했던 솔로몬의 왕국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하시는 메시아만 생각했지,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무덤 속에 계시는 주님만 생각하고, 3년 동안 줄곧 따라다니면서 이적과 기적을 체험했던 그 영광의 순간만 기억하고, 진정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무덤 속에서 지내는 일만 생각하며, 부활이라는 거대한 소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인들이 오늘날에도 있을까 무척 염려가 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함께 가시고, 우리가 묵는 곳이면 어디서나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에서 전하는 부활의 의미입니다. 부활절에 나누는 성찬예식은 곧 이러한 예수님을 만나고 기리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교훈해 줍니다. 이 말씀을 고요히 묵상하며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달려가는 새벽 별 같은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덕천교회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