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박사님(서울신대 명예교수)께서 지난 1월 16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부당한 폄훼 및 그 시정방안’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소개합니다. 이 글은 지난 2022년 2월 역사연구재단에서 열린 한국근현대사 세미나에서 발표하신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독립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중앙청 앞에서 열린 독립 1주년 기념식. ⓒ크투 DB

38선 만들려 한 세력은 소련
38선 막으려 한 세력은 미국
한반도 지도자들, 미국 환영

IV.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기독교: 대한민국의 탄생

해방은 한반도가 개항 이후 꿈꾸었던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생각은 1882년 조미조약에서 기원되고, 1919년 3.1 운동에서 확인되었지만 우리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다음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미·영·중·소의 공동 신탁통치였다.

미국은 처음부터 한반도가 동북아의 전쟁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를 누구도 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미국 주도의 공동 신탁통치를 통하여 한반도를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 세계에 편입시키려 했다. 소련은 이것을 얄타회담에서 수용하였다.

종전을 앞둔 미국과 소련의 약속은 공동 신탁통치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38선 이북과 이남의 군사주둔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런 공동 신탁통치 원칙을 부정하고, 무장해제를 위한 38선을 실질적 국경선으로 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종전 후 하지에게 8월 하순 경에 내린 첫 번째 명령에서 “국무성으로서는 민간 행정업무가 일본군 항복이 종료된 후 현실적이 되며, 그때까지 민간 행정업무는 통합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한국이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행정구역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련은 9월 21일 스탈린 지령에서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38선을 분단선으로 만들려 한 것은 소련이었다는 것이며, 미국은 이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38선 철폐를 위해 소련에 양보해 김규식·여운형과 같은 중간파를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소련은 한반도에 친소 정권을 세우려는 목적이 있었고, 따라서 미국 주도 동북아 질서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 소련이 내세운 것은 선 정부수립(인민정권), 후 공동신탁통치(통일)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모스크바 외상회의였다.

하지만 미국은 1·2차 미소공위를 통하여 소련이 한반도에 친소 정부를 만들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대소 협력체제를 봉쇄전략으로 전환하고, 미소공위를 해산하고, 이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의 운명은 미소공위에서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대한민국은 바로 유엔 결의에 의해 탄생되었다.

해방 후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한반도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환영하였다. 특별히 기독교 배경을 가진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한반도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은 연합국 원수들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먼저 스탈린에게 “통일민주독립 한국은 소련과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의 보증”이 될 것이라고 하여, 한편으로는 통일민주독립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소련에 유화적 제스쳐를 보냈다.

영국 애틀리에게는 소련이 한반도를 또 하나의 폴란드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중국과 함께 “통일민주독립 한국”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장개석에게 국제사회가 한국을 꼭두각시로 만들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트루먼에게 이것을 승인하지 말라고 전보를 보내줄 것과 “통일민주독립 한국”은 중국의 신실한 동맹이 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트루먼에게 한국민은 한반도 분열을 가져올 공동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오히려 미국의 단독점령과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아울러 수많은 미국인들이 전쟁에서 희생한 이유는 한국을 민주국가로 만들어 극동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하나의 독립민주국가로서 한국의 미래는 미국 대통령 당신의 손에 달려있다”고 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은 8월 15일 스탈린에게, 8월 21일 영국의 애틀리 수상에게, 같은 날 중국 장개석에게, 8월 27일 미국 트루먼에게 각각 전보를 보낸 것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우리 민족이 미국주도의 자유민주국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런 한반도는 극동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해방의 종교적 의미도 이해해야 한다.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바로 일본인들의 신사였다. 이것은 해방이 일본의 정치에서 해방되는 것뿐 아니라 일본의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 전쟁 직후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문에는 연합국의 점령목적이 카이로 선언에 나타난 자유와 독립을 이루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하는데 있다고 언급하였다.

중국 임시정부도 8월 31일 중경의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자신들이 신봉하는 것은 “미국식 입헌주의”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미군정과 협력하여 새로운 나라를 이끌고 가고 싶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임시정부의 많은 인사들이 기독교인들이라면서 현재 북한 지역에 공산주의자들이 진주하고 있으며, 이곳에 미국 선교사들을 즉각 파송하여 그들의 위협에서 북한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미군 보고서에도 미군이 조선에서 활동하는데 있어 조선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승만
▲이승만과 김구가 함께한 모습. ⓒ피스코리아

해방기 한국 여론 좌익 우세?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원해

그러면 당시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많은 학자들은 해방기 한국인들은 좌익이 우세했고, 미군이 아니었으면 한반도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진보적 해석을 주도한 송건호는 “우파는 해방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국내 대세는 좌경화로 기울어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일까? 먼저 해방 직후 일본은 망하고, 아직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모임인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을 보면 전국 13개도 가운데 약 7곳(평북·평남·황해·강원·충북·전북·전남)이 우익 기독교인이 위원장, 좌익이 4곳(서울·함북·함남·경남), 좌우각축이 2곳(충남·경북)이다. 따라서 좌익이 우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울의 경우 처음에는 좌익이 우세했으나 약 한주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미군정의 진입, 이승만·김구의 입국 등으로 얼마 후 우익이 우세했고, 나중에 우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1946년 3.1절 대회에서 잘 나타고 있다. 서울운동장에 모인 우익의 인원은 약 15만 명, 남산에 모인 좌익의 인원은 약 1만 5천 명이었다.

이런 현상은 1946년 봄 미군정에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정치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한 제도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정치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우익인사 지지가 70%, 좌익인사 지지가 30%에 이르고, 정당 비호감도에 있어 우익이 35%, 좌익이 66%로 나타나고 있다. 누가 정말 신탁통치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소련 60%, 미국 6%, 둘다가 32%, 아무도 아니다가 3%였다. 미소공위 지연에 대한 책임에 대해 미국 1.6%, 소련 69.3%, 둘다 13.3%이며,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54.0%, 군정 지속이 43.8%, 남북 외국군인 철수가 10%였다.

미래 한국 정부 형태에 대해, 먼저 정치적인 측면은 대의제도가 85%, 삼권분립 제도가 80%, 대통령 직선제가 68%였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인들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에 대해서는 당시 북한식 토지개혁에 대해 긍정이 21%, 부정이 73%, 모른다가 5%였다. 일본 기업에 대해선 국유화를 주장했지만 일본 소유의 토지에 대해선 국유화와 사유화가 비슷했고, 한국인 소유 토지에 대해서는 유상분배를 주장했다.

한국의 경제제도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13%,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였다. 하지만 여기서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전 단계가 아니러 독점자본주의를 개혁한 온건한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농지개혁 정책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 남한 사람들은 북한식 개혁이 아니라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범주 안에서 어느 정도 평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당시 미군정의 입장이었고, 이승만도 이런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필자는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은 대통령직선제를 제외한다면 바로 이런 1946년 여론조사의 주요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한국인들의 입장은 오래동안 한국인들이 갖고 있던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건국 과정 한국 기독교 영향
1. 미군정의 중요한 파트너
2. 사회 이끈 정치 지도자
3.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
4. 좌익 세력과 싸우며 건국

해방 후 혼란한 정국, 기독교 토대 위에 바로 서다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박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면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가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첫째로 한국 기독교는 미군정의 중요한 파트너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리는 1945년에서 1948년에 이르는 미군정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미군정 요원은 미군 가운데 최고로 학력이 높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미국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원래 일본의 통치를 위해 준비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식 행정을 미국식 행정으로 바꾸려 노력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들과 그의 자녀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인들 가운데 한국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었다. 이들과 파트너가 되어 해방 직후 3년을 이끌어 간 한국 사람들도 대부분 기독교인들로서, 영어를 알고 민주주의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과게 일제 시기 변두리에 있었던 친미 기독교 세력이 이제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다.

둘째, 해방 후 한국사회를 이끌어 갔던 정치지도자들은 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해방정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치인은 이승만·김구·김규식·여운형·박헌영이었다. 이 중 이승만·김구·김규식은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다같이 귀국하여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귀국해 기독교인들을 배경으로 독립촉성중앙회를 만들었고, 김구는 반탁투쟁을 했으며, 김규식은 기독교청년회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셋은 다같이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같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들 중, 김규식이 좌우합작에 나섬으로, 김구가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함으로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결국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유일한 지도자로 지지하게 되었다.

셋째,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세력은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다.

해방 직후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이 공산화되자 월남하여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커다란 노력을 다 기울였다.

비록 조만식은 북한에 잔류했지만 평북의 한경직, 평남의 이윤영 등은 월남해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서북 기독교와 미국 기독교의 관계를 활용하여 미군정을 잘 활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친미 유학파를 통해 미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넷째, 해방정국에서 각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좌익 세력과 싸우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해방 직후 기독교인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미군이 늦게 한반도에 늦게 상륙함으로써 한동안 좌익이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하면서 이들은 국내의 기독교인들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세력을 각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이승만·김구, 그리고 임시정부요인들은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각 지역에 지부를 형성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설립되었던 인민위원회와 투쟁하였다. 이런 지역 기독교인들의 노력 없이는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와 투쟁할 수 없었다.

필자는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집단이 바로 독촉국민회라고 생각한다. 이 국민회는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임정 요인들을 지도자로 하며,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각 지역인사들을 지역 책임자로 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큰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이 단체에서 제헌 국회의원이 가장 많이 탄생했고, 이 단체와 관련된 사람들 가운데 각료들이 다수 선출되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와 싸웠을 뿐 아니라 6.25 전쟁 시에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은 주로 정당이 아닌 독촉국민회를 통하여 정치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하였다.

3.1절 기념 국가 금식기도성회
▲박명수 교수.

박명수 박사
서울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