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믿는 이들의 삶, 질적으로 달라
욕망의 추구 아닌 자신을 희생하는 삶
튀리크예-시리아에 소망이 되살아나길
상실한 북한 주민들의 인권도 살아나길

십자가, 부활절
▲ⓒpixabay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이 9일 2023년 부활절 메시지를 발표하고 “부활의 삶은 욕망 추구의 삶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는 삶”이라며 “예수 부활의 신앙 속에서 젊은이들이 소망을 꿈꾸며 도약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고 밝혔다.

샬롬나비는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서 죽음으로 끝나는 죽음의 극복으로 영생의 길을 보여주셨다”며 “처음 예수 부활 소식은 단순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한 세대 정도 지날 즈음에는 그 내용이 좀 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의 설교 방식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내용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내용의 초점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예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다.

이어 “예수 부활은 죽은 후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을 주고 있다”며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다. 영혼만 산다는 말이 아니다.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다. 부활에 관한 첫 소식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도 예수처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 것을 믿고 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면 반드시 심판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을 인용했다.

또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부활에 대한 믿음 없는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며 “예수 부활의 낯선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인류는 둘로 나누어진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이 믿음과 함께 인류는 역시 둘로 나누어진다. 자신의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로. 부활을 믿는 자는 그 믿음에 근거해서 자신의 일생을 살아갈 것이다. 부활의 이치는 농사짓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비(analogy)로 느낄 수 있는 이치이며, 부활의 원리는 심고 거두는 원리”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의 말씀도 인용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샬롬나비는 “이런 관점에서는 더 이상 세상이 욕망 추구의 장이 아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기회를 따라 심고 또 심는 장”이라며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나 재능이나 은사를 가지고 상대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삶이 아니라, 기회를 따라 섬기는 삶”이라고 했다.

이들은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진 자로서 예수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하며 이웃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고 했다.

아울러 “우리가 부활의 주님께 기도함으로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재건되고 그들의 신앙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들려오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고 했고, “강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튀르키예-시리아에도 다시 재생과 소망이 살아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특히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복음을 통한 생명의 소리와 함께 그들에게 인권의 생명의 소리, 굶주림에서 해방되는 생명의 소리, 어두움 속에서 빛의 생명의 소리가 들리도록 해야 하겠다”며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했듯이, 북한에서 그 깊은 어두움에서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위하여 남한 기독교인들은 기도하며 그들에게 사랑의 섬김을 손길을 펼쳐야 하겠다”고 했다.

샬롬나비는 “대한민국 땅에도 예수 부활의 신앙 속에서 젊은이들이 소망을 꿈꾸며 도약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며 “대한민국 땅에서 젊은이들은 장래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을 하고 있다. 혼인 건수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생명의 잉태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 땅에서 결혼과 생명의 잉태가 감소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꿈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또 “이 젊은이들에게 누가 소망을 심어주어야 하겠는가? 한국교회가 예수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섬기며 그들의 심령 속에 부활의 소망을 심어주어야 하겠다”며 “생명의 환한 웃음이 넘치는 사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부활의 이 소망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이웃과 함께 젊은이들과 함께 그 소망을 나누어야 하겠다”고 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인류구원과 영생의 길을 여셨다.
신자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죽음의 절망 속에 있는 현대인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증언해야한다.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2023년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는 예수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했으면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명은 기술발전을 통해 인류에게 한없는 편의를 제공하지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허무주의로 달려가고 있다. 한국사회 안에서도 출생률은 최저로 떨어지면서 생명의 소멸을 알리는 징조로 다가오고 있다. 예수 부활 이전에는 인생은 죽음으로 끝이었다. ‘한 번 나면 죽게 되고,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거의 모든 인류를 지배해 왔다. 그것이 경험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경험적 상식이 도전 받게 되었다. 그 계기는 바로 예수 부활 소식이다. 예수 부활 이후에 죽은 자가 다시 날아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인류의 새 소망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생명 부활의 역사를 새롭게 체험하고 전파하는 일을 시작해야 하겠다.

샬롬나비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이 부활이 주는 의미를 다음같이 되새겨보고자 한다.

1.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서 죽음으로 끝나는 죽음의 극복으로 영생의 길을 보여주셨다.

예수는 유대 변방 지역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자들을 고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된 랍비였다. 그는 하나님 사랑의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은 당시 지배적율법 준수를 가르친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많은 추종자들이 따름으로써 예수는 종교지배자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고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 의하여 체제 반란 민중 선동가로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죽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예수를 따르는 움직임이 그의 죽음 이후에 더욱 강력하게 되었다. 죽은 예수가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상식에 맞지 않는 증언을 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형당해 죽었던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제자들 외에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런 선동과 추종의 움직임이 허탄하게 보여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풀어 이 무리에 속한 자들을 색출하여 잡아가두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예수 부활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는 움직임은 그런 식의 핍박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특별한 변화의 사건이 사울이라는 젊은 유대 랍비에게 일어났다. 그는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해하려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가 가던 도중에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만나 생의 진로가 바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가 조상 적부터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파하게 되었다. 그는 개명하여 바울이 되었다.

처음 예수 부활 소식은 단순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한 세대 정도 지날 즈음에는 그 내용이 좀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의 설교 방식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내용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내용의 초점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예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2. 예수 부활은 죽은 후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을 주고 있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다. 영혼만 산다는 말이 아니다.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다. 부활에 관한 첫 소식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도 예수처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 것을 믿고 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면 반드시 심판을 생각하게 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3.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삶 방식은 부활에 대한 믿음 없는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자기 또한 예수처럼 부활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최후 심판을 현실에 앞당겨 매 삶의 순간을 살아간다. 예수 부활을 처음 전했던 사도들도, 특히 바울 사도도 처음에는 부활을 믿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열망한 나머지 예수 부활을 투영(投影)한 것이 아니다. 전혀 반대다. 이들도 상식을 따라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 모임에 나타나신 예수의 모습을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예수 부활을 증언하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있는 것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의 바른 질서라고 증언하였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5b).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고전 15:16)

죽은 자의 부활이 당연히 있는 질서인데, 그 질서를 따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라고 논증하는 말씀이다. 창조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가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낯선 첫 경험인 셈이다.

예수 부활의 낯선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인류는 둘로 나누어진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이 믿음과 함께 인류는 역시 둘로 나누어진다. 자신의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로. 부활을 믿는 자는 그 믿음에 근거해서 자신의 일생을 살아갈 것이다. 부활의 이치는 농사짓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비(analogy)로 느낄 수 있는 이치이며, 부활의 원리는 심고 거두는 원리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4. 부활의 삶은 욕망 추구의 삶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는 삶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더 이상 세상이 욕망 추구의 장이 아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기회를 따라 심고 또 심는 장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나 재능이나 은사를 가지고 상대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삶이 아니라, 기회를 따라 섬기는 삶이다.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19도 이제 기세가 꺾인 모습이다. 2020년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약 3년 만에 대중교통에서의 마스크 착용 의무가 없어졌다. 봄의 신선한 기운을 마음껏 들이마시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지난 3년을 돌아보며 자문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였던가?” 살아남기 위하여 온통 자신만 살피며 지내왔던가, 아니면 부활을 바라보며 자신보다 이웃을 섬기며,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편의까지 양보했던가? 우리는 부활 신앙 가진자로서 예수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하며 이웃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

5. 우크라이나의 전쟁터에서 포성이 멈추고 평화의 재건을 알리는 부활절이 되어야 하겠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와중인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었다. 한 주간이면 끝날 것 같던 전쟁이 무려 일 년을 넘겨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 세계가 이 전쟁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난민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 그 전쟁 속에서 수많은 젊은 군인들과 어린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 그 전쟁은 전선의 정체 속에서 수많은 인명의 소모전으로 지루하게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우크라이나에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고 평화 재건의 소식이 들려오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힘을 모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께 기도함으로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재건되고 그들의 신앙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들려오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6. 강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튀르키예-시리아에도 다시 재생과 소망이 살아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코로나19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고통도 겨울의 추위도 채 지나기 전에 튀르키예 안타키아 서남서쪽 16km 지역에서 강도 7.8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사망자만 무려 5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권을 챙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섬기는 자가 있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보게 된다.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듣는 계절에 영원을 바라보며 심고 또 심는 삶을 살기를 다짐하게 된다. 부활을 믿는 자들의 섬김을 통하여 죽음과 파괴의 땅이 서서히 생명과 소망이 부활하는 땅으로 바뀌어 가기를 기도한다. 아무리 모진 시련이라도 부활의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셔서 다시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다.

7. 부활 소망 가진 자로서 독재 치하 북한 주민들의 상실한 인권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의 독재 아래서 인권을 유린당하며 식량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며 살고 있다. 봄의 화창한 날들이 다가오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새 봄을 맞이하는 생명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있다.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복음을 통한 생명의 소리와 함께 그들에게 인권의 생명의 소리, 굶주림에서 해방되는 생명의 소리, 어두움 속에서 빛의 생명의 소리가 들리도록 해야 하겠다.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했듯이, 북한에서 그 깊은 어두움에서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위하여 남한 기독교인들은 기도하며 그들에게 사랑의 섬김을 손길을 펼쳐야 하겠다.

8. 대한민국 땅에도 예수 부활의 신앙 속에서 젊은이들이 소망을 꿈꾸며 도약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대한민국 땅에서 젊은이들은 장래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을 하고 있다. 혼인 건수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생명의 잉태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 땅에서 결혼과 생명의 잉태가 감소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꿈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젊은이들에게 누가 소망을 심어주어야 하겠는가? 한국교회가 예수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섬기며 그들의 심령 속에 부활의 소망을 심어주어야 하겠다. 생명의 환한 웃음이 넘치는 사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부활의 이 소망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이웃과 함께 젊은이들과 함께 그 소망을 나누어야 하겠다.

 2023년 4월 9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