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김명혁 목사. ⓒ크투 DB

장소: 강변교회
일시: 2023년 4월 9일
본문: 마 16:21-24, 고후 12:10

성자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보다 귀중하고 놀라운 일은 없을 것이고, 성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닮고 싶은 충성스러운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영원토록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싶은 것도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귀중하고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신앙”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땅에 오셔서 온갖 고난과 핍박과 저주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일꾼들이 되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아서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시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곧 이어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렇게 찬양을 합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찬송가 496,439).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 세상 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겼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겼네.”(159, 161).

그런데 “십자가”의 색깔이 어떠합니까? 화려하고 찬란한 색깔입니까? 아닙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걸어가신 성자 예수님의 발걸음이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한(고전 2:2) 그리고 부활의 영광과 천국의 소망에 사로잡혔던(빌 3:10,11) 사도 바울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로 달려갔는데 조금도 불평 불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도 바울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몸에 지니고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싫어하고 거부하던 사도 베드로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디베랴 바다 가에서 만난 다음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처절한 회개를 한 다음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즉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권면의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이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따르고 전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유익하고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필수 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통해서 조금은 겸손해지고, 조금은 따뜻해지고, 조금은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조금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조금은 천국을 바라보면서 준비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와 여러분들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살아가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순수하고 생생하게 전하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귀중하고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신앙”을 지니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몸에 지니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귀중한 삶을 사신 신앙의 선배님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스데반 집사

첫째로, 스데반 집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 집사는 일곱 집사들과 함께 구제에 전력했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당당하게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게 되었는데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것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사모하게까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5-60).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은 전혀 지니지도 않았고 나타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성자 예수님처럼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모습만 지니고 나타내 보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너무너무 예수님을 닮은 귀중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만 지니고 나타내 보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이렇게 순수하고 생생하게 전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고난과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달려갔다고 생각합니다.

2. 사도 바울

둘째로,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울은 돌을 들어 스데반 집사를 쳐서 죽이다가 스데반 집사의 사죄를 간구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아마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서 사울을 부드럽게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3-5).

사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 때부터 무릎을 꿇고 울면서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회개의 사람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증거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과 섬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기뻐하고 찬양하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들을 인용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6-58).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1,23,24).

사도 바울이야말로 정말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오히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사모하는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살다가 로마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3. 폴리캅 감독

셋째로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라는 “십자가와 부활”의 성자 예수님의 분부의 말씀을 들었던 서머나 교회의 사자가 주후 155년경 서머나 투기장에서 불에 타서 순교한 폴리캅 감독이었을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사도적 신앙을 계승해서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봉사하다가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는 로마 총독의 명령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서머나 투기장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폴리캅 감독이 체포되어 서머나 투기장으로 끌려 왔을 때 총독은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폴리캅 감독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한번도 잘못하신 일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총독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강요하면서 “나는 야수들을 가지고 있소. 나는 너를 야수들 가운데 던지겠소” 라고 협박했습니다. 폴리캅 감독이 자기를 야수들에게 던지라고 말하니까 총독이 “네가 야수들을 멸시하고 네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불에 태워 없애버리겠소” 라고 협박했습니다.

폴리캅 감독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이 위협하는 불은 한 시간 동안 타고 곧 꺼질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심판의 영원한 불을 알지 못하고 있소. 왜 이렇게 지체하시오.” 폴리캅 감독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폴리캅 감독은 불에 태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폴리캅 감독은 제사를 위해 준비된 고귀한 수양과 같이 하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찬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는 종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내가 당신께 찬양을 돌립니다.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수에 참예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인하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송축하며 당신께 영광을 올립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종이시며 영원한 하늘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과 성령과 함께 당신에게 지금으로부터 세세토록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폴리캅 감독은 온 몸이 불에 타서 하늘로 올라가는 귀중하고 보배로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교의 제물로 인해 소 아시아 곳곳에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폴리캅 감독이 형장에서 남긴 순교를 염원하는 처절한 고백들과 함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들은 그 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헌신과 충성을 새롭게 불러 일으키는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로운 고백들과 기도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폴리캅 감독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죽음을 향해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을 지니고 달려간 “축도록 충성한” 예수님 닮은 순교자였다고 생각합니다.

4. 성 프랜시스(프란치스코)

넷째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 사랑을 몸에 지니고 달려간 성 프랜시스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귀중한 삶을 살았는데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사모하고 또 사모하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향해서 달려간 너무너무 귀중한 주님 닮은 삶을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너무너무 닮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귀중한 고백을 했습니다. “가난은 나의 애처이고 고난은 나의 스승이고 죽음은 나의 자매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에 따라서 라베르나 산에 올라가서 처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극심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2년 동안 살다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성 프랜시스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감화를 미쳤는데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강원용 목사님과 이동휘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 등에게 깊은 감동과 감화를 끼쳤습니다. 성 프랜시스야말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달려갔다고 생각합니다.

5. 주기철 목사

다섯째로, 일사 각오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선봉에 서서 반대하다가 1938년 2월 8일 1차 검속되었다가 27일만에 석방되었고, 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되었으며, 1939년 8월 3차 검속되었다가 9개월 후에 석방되었고, 1940년 9월 4차 검속되어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7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 주일 아침 평양역에 도착했습니다. 그 길로 주기철 목사님은 산정현 교회로 달려가서 성전에 엎디어서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는 저 하늘 나라에 가서도 조선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가다듬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마 5:11-12과 롬 8:18, 31-39을 봉독한 후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 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했습니다.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 에는 하나님께 대한 주기철 목사님의 절대 충성과 헌신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다섯 종목의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2. 장기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시옵소사.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제 그 설교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고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살고 천 년 살면 무엇 합니까?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셔서 가루가 된다 하여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 각오가 있을 뿐이올시다.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 아! 내 주여!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주기철 목사님께서는 순교의 형장을 바라보시면서 죽음을 도무지 두려워하시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시고 죽음의 형장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순교를 각오하고 처절하게 기도한 대로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 경 평양 감옥에서 47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죽음을 향해서 달려간 “축도록 충성한” 순교자였다고 생각합니다.

6. 손양원 목사

여섯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모두를 사랑하는 사랑의 삶이었고 십자가와 천국과 종말 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선생님으로 죽음을 소원으로” 삼으면서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손양원 목사님은 성자 예수님 사랑과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에 미쳐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사랑과 섬김의 제물로 드렸는데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면서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도 그리워하시고 사모하시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지난 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비통해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그분의 반려자 정양순 사모님은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가난이나 고난이나 슬픔이나 아픔이나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모하고 소원하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시다가 사랑과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7. 정리

이제 “귀중하고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신앙” 이란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우리들 모두의 구주가 되시고 목자가 되시고 스승이 되시고 본이 되시고 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자체가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면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길로 달려가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사모하는 순교적인 삶을 살다가 순교적인 죽음을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폴리캅 감독이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죽음을 향해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을 지니고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사랑과 섬김의 길로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신 “축도록 충성한” 순교자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모두를 사랑한 사랑과 섬김과 순교의 길로 달려가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귀중하고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신앙”을 몸에 지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로 달려가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해도, 누군가를 위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피해가면서 평안과 부귀와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는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드려지는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삶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누군가를 위해서 순교의 제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셔도 순교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거부하는 불순종과 배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두려움을 지니고 부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성경 말씀 두 곳을 인용합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8-10).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 중의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심과 담력을 몸에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는 소위 “막가 파”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11살 때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을 때나, 박정희 정부의 주일 성수 방해 정책을 비판한다고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서 아침부터 다음날 이른 새벽까지 심한 심문을 받을 때나,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밤에 혼자서 뛰어 넘어가서 군인들에게 붙잡힐 때나, 북한을 정식으로 방문해서 가는 곳마다 북한정부의 실상을 진솔하게 비판할 때나 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가기도 했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저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대판 싸우면서 북한 개성으로 달려가서 밀가루 300톤을 북측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면 저는 두려움 없이 달려가곤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두려움 없이 올바른 일을 위해서 달려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저의 삶을 제물로 드리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저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을 모두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드림”의 삶과 그리고 모든 이웃에게 사랑과 도움의 선물로 나누는 “나눔”의 살다가 죽게 하시고 그래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수환 목사님과 박진숙 사모님과 교역자들과 강변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와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귀중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몸에 지니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