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벚꽃나무
▲벚꽃이 활짝 핀 봄날 모습. ⓒ크투 DB
1. 지난 주부터 이번 주간에는 벚꽃축제가 이어집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면, 저마다 봄구경 꽃구경 가지 않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하얀 벚꽃잎이 하늘로 봉우리를 향해 있는 모습은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를 환대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희한하지요. 언제나 그러하듯, 화려한 꽃 피움의 시간은 잠깐입니다.

그러니 잠깐의 시간만큼이라도 제 몸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할텐데, 1년 340일의 시간 동안 앙상하고 볼품없던 대부분의 시간을 외면했던 우리들을 향해 꽃나무는 온 몸을 아끼지 않고 자기 몸을 떨구며 환대합니다.

화려한 시간을 담으려 사람들이 찾아간 순간이 실은 꽃은 나무와 이별하는 시간이니, 우리가 바라보는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일 수도 있겠습니다.

2. 이맘때면 교회도 이런저런 행사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부활을 묵상하는 시간은 오직 주님이 주인 되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각종 교단 노회도 이때쯤이고, 교회의 중요한 행사들도 이때이고, 교회의 임직이나 은퇴, 취임, 위임 같은 온갖 행사도 이때쯤입니다.

여러 아픔이 있던 교회의 담임을 수락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담임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돼, 지금은 작고하신 유성하 목사님께서 연락이 왔습니다. 담임도 되셨으니 노회에도 들어오고 위임도 곧바로 하자는 것입니다.

통상 담임이 되도 위임을 하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지금 그냥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저나 생명샘교회도 이제 아픔 없이 평탄하고 부흥하기 쉽고 목회하기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제 앞길을 탄탄하게 할지는 모르나,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목회자로 처음부터 긴장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자리요, 제게 주신 무한한 무거운 이 마음을 그 방식으로 덜어낼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교회나 저의 편안함을 위해 담임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 되신 교회가 되기 위한 도구임을 잊지 않기 위해 위임은 스스로 포기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명샘교회에서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벌써 거의 모든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면서 될 수 있는 한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뼈져리게 느껴지는 저의 부족함만 늘어납니다.

3. 지난 주일은 종려주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이들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생명의 상징. 명예와 영광의 상징이던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부르는 이들의 모습은 장관일 테지요.

그러나 정작 예수님 마음에는 모두의 두 손에 쥔 종려나무가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 마음에는 모두에게 외면당한 죽음과 공포, 죄와 혐오의 상징이던 십자가라는 나무만 보였습니다.

생명의 대명사요 명예와 영예의 상징인 화려한 종려나무 가지가 아닌, 혐오와 죽음, 공포와 회피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는 역설의 도구가 된 것은 그 나무 중앙에 생명의 꽃이 되기로 작정하신 예수님 한 분 덕분입니다.

교회, 좀 더 정직히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집단의 크기와 규모, 숫자를 지향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2천 년 전 주님을 만나고 새롭게 변화된 몇몇 사람들이 당시 로마를 뒤집었습니다. 반면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고 나서 안주해 버린 사람들은 교황이라는 제도 아래 갇혔습니다.

다시 새로움을 꿈꾸었던 몇몇 사람들에 의해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개혁교회의 신자들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일제 하 1930년대 국내 개신교인들이 1%도 안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신민회 독립운동가 105명 중 92명이 교인이었으니, 그 당시 교인들 거의 전원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힘과 규모와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과 규모에 대항하는 새로움을 꿈꾸던 사람들에 의해 세상도 새로워졌습니다.

민주화운동이 있던 1980년대, 교회는 절기 프로그램이나 신년 계획, 거대한 선교 프로젝트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의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교회의 몸을 내어줬습니다. 교회 건물이 타자들의 땀과 눈물, 피로 얼룩지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교회로 인해 세상은 새로워졌습니다.

4.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신교인입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에 대해 나무위키는 이렇게 구별합니다. “천주교는 어떻게 신이 오셨는데 내가 당당할 수 있나 하면서 무릎을 꿇는 종교이며, 개신교는 어떻게 신이 오셨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 있냐 하고 두팔을 드는 것이다.”

개신교인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워졌다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2022년 기준으로 개신교의 신자는 무려 1,031만에 달합니다. 종교인 중에는 압도적으로 1위입니다. 그러니 무려 1천만 명이 “나는 새로워졌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인 수가 줄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걱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숫자를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던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리며, 동시에 여전히 숫자가 줄고 있는 것만 걱정하며 전혀 새로워지지 않는 우리 모습이 걱정됩니다.

여전히 숫자로 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천주교가 11%, 불교가 7%에 불과한 것을 보면, 종교인 비율로는 한국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개신교회에서 하는 일도 타종교의 구제나 선행보다 압도적으로 그 숫자가 많다고 합니다.

5. 2017년 12월 4일, ‘한국교회의 사회봉사와 국민인식’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당시 저를 비롯해 목회자들이라면 그 결과에 모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응답하신 분들 중 29.2%가 사회봉사에 적극적인 곳으로 기독교인을 꼽았습니다. 천주교 20%, 불교는 그 아래였습니다. 그런데 진정성은 천주교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개신교는 절반에도 못미쳤습니다.

충격적인 결과의 이유로는, 개신교의 사회봉사가 보여주기식이며, 노골적으로 전도 목적이 드러나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연구를 수행한 서울대 조흥식 교수는 개신교의 사회봉사가 진정으로 타인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물어보라 했습니다. 개신교인들인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네이밍한 선교, 구제, 봉사, 목회 모두가 실은 자기 유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입니다.

6. 묵직한 질문이 던져진지 6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신 기간의 두 배가 흐른 지금, 우리는 6년 전 질문에 답을 찾았을까요? 정확히 그 시점부터 제기된 혐오의 문제에 십자가, 사랑, 순교, 선교라는 온갖 깃발을 휘두르며 앞장서온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새롭게 했을까요?

안타깝지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11월 15일부터 열흘 동안 개신교인, 비개신교인 각각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소개하려 합니다.

개신교인 30.5%가 ‘개신교회가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비개신교인의 62.2%는 ‘개신교회가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그 중 약 1/4은 ‘매우 그렇다’고 응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상한 일 아닙니까? 기독교의 사회봉사는 점점 증가하고 다른 종교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선교 프로그램, 구제 사업, 공적 교회와 단체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일들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크리스천들이 미디어를 제작하고 기독교 콘텐츠를 내보냅니다.

전 세계 곳곳, 사회 전반에 걸쳐 사랑을 실천하고 십자가 정신을 부르짖는 분들이 너무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 땅은 서로를 차별하며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혹시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어쩌면 좋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세상에 차별과 혐오가 부추겨지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볼까요. 위 조사에 따르면,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으면 꺼려지는 사람’이라는 문항에 ‘성소수자’를 39.9%로 응답했습니다. 성소수자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대답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치관이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인의 79.7%는 노숙자를 가장 꺼렸고, 그 다음으로 장애인 37.2%, 외국인노동자 26.2% 순이었습니다. 위와 같은 응답을 하는 이유에 대해 세부적 이야기를 나누면 이유는 대개 비슷합니다. ‘냄새가 난다, 나에게 피해가 간다,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등 자기중심적 생각 때문입니니다.

이 연구 결과는 개신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오히려 개인적인 차별과 혐오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목회, 선교, 구제와 같은 명예로운 큰 일을 핑계삼아, 온갖 종류의 작아 보이는 사랑에 실패하고 있음을 꼬집고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집단을 키우며 인정받을 수 있는 일에만 열심인 목회와 선교와 구제, 세상 일에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지만 모두 버리고 있는 일상의 십자가에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도피하는 우리 마음 속의 더럽고 이기적인 마음을 오히려 세상이 우리보다 두 배 이상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7. 부활주일이 다가옵니다.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모릅니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하는 일도 프로그램도 너무너무 다양합니다. 선한 일은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선한 일을 한다면서 차별에 앞장서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처럼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 교회들마다 선한 구제의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선한 일이 뭐라고 했을까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선교를 하면서 좀 더 알려져야 하고 규모가 커져야 한다는 강박에 목적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만나지도 않고 연락도 주고받지 않습니다. 구제를 할 때도 ‘내가 컨트롤 하기 쉬운 대상’들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냄새나고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한다면서 내 옆자리에는 오지 말라고 외면하고, 평상시 전화는 하지도 받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모임에서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고 웃습니다.

대체 우리의 성전은 예배당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몸입니까?

8. 최근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정독하면서, 제가 로마 교회 교인이라면 바울의 서신서를 받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 교회 성도요 직분자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황제가 신이고 예배자로 살다 걸리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형제나 가족이 사라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사라지면 감사의 마음이 생기기보다, 혐오의 마음이 가득해질 겁니다. 새로운 교우가 오면 환대보다는 의심의 마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누군가 결혼한다면 내 믿음을 앞세우면서 ‘순결을 버렸다’고 정죄하기 바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곳에서 예배드리는 일과 선한 사업에는 앞장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저와 같은 교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마지막 16장 결론에서 “서로 문안하라”고 매듭을 짓습니다. 누구와 문안하라고 했는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전혀 얼굴도 몰랐던 겐그레아 교회의 여성 뵈뵈를 로마 카타콤 교회에 추천합니다.

심지어 “예절로 영접하라”고 하니, 그들의 팽배했던 의심과 시기의 마음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뿐만 아니라 9절에서 노예들로 알려진 우르바노, 귀족의 비문에 등장하는 스다구를 보내며 문안하라고 합니다. 전혀 친해질 수 없는 적대 관계의 사람들을 동시에 추천합니다. 또 11절에는 온갖 악을 행했던 당시 죄인이요 악인인 나깃수의 가족에게까지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그들은 로마서 1장정도까지는 기분이 좋았을 겁니다. “와 우리 소문이 거기까지 갔구나, 우와 우리도 사도라고 인정받았다.”

그러나 나머지는 온갖 불편한 말씀 투성이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아!”에서부터 기분과 감정이 뒤틀렸을지 모릅니다. 마지막 결론에서 심지어 바울이 직접 지금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일을 같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투성이인, 심지어 악인이요 죄인의 집안까지 가라고 명령하니,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9. 이제 이 땅에 여전히 혐오와 불만으로 가득찬 이유를 알게 됐을 겁니다.

내 신앙의 울타리는 깊고 높아 여전히 누군가가 내 자리에 들어오는 것에는 환대하지 않고, 내 목적과 뜻에 맞는 사람일 경우에만 두 손 높이 들고 어서오라고 외치는 우리 모습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손에 여전히 환대의 가지는 있으나 그 가지는 누군가의 생명을 꺾어버린 것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버린 이름 모를 십자가라는 나무는 텅 비어 죽어가고 있는 채 말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2천 년 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리스도가 성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대하는 듯한 그 현장의 진실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비록 한 목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어서 오소서”라고 외쳤을지 모르나, 그들 마음에는 모두가 각자 다른 목소리, “예수여 내 옆으로 어서 오소서”라고 외치는 이기주의로만 가득찬 종려나무 가지의 소용돌이였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으로 소멸되지 말라는 압박의 아우성으로 가득찬, 그리고 저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어서 오라고 외치는 집단의 아우성만으로 가득찬 아비규환의 현장입니다.

그곳에 예수는 나귀를 타고 그들이 버린 나무, 애초에 죽음과 공포, 적대와 환멸, 냉대와 혐오의 십자가라는 나무로 걸어가셨으니, 그 광경의 전경은 수많은 집단의 아우성에서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향하는 십자가가 되고 있습니다.

10. 마태복음 26장에는 향유옥합을 깨트린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멀리서 보기에는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식탁의 주인공이었다면, 그 여인이 들어오는 광경부터 불쾌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전경이었는데, 그 여인이 옥합을 깨트림으로 배경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흔히들 오해하는 것은 향유옥합을 깨트린 순간 가룟 유다만 그 여인에게 분개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만 셈에 밝고 예수를 배신했으니 그때 이 여인의 헌신에 격노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나의 분노를 가리기 위해 가룟 유다가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까? 그 여인에 대한 비난을 위해 가룟 유다만 기억한 것은 아닙니까?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고발합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마태복음 26:7-9)”.

여인의 행동을 보고 그 자리 모든 제자들이 똑같이 분노하고 혐오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그럼에도 선한 일을 하자고 말했습니다. 같은 입에서 어찌 사랑의 말과 혐오의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라는 정죄할 대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 본문을 보면서 멀리서는 아름다우나 우리 삶의 공간에서는 제자들과 같은 감정과 언행을 보이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멀리서는 아름다운 십자가의 이름을 걸고 여러 가지 사역을 하지만, 가까운 곳의 형제를 원수 삼고 돌아서는 우리 모습, 화려한 종려나무 가지는 흔들지만 냄새나고 더러운 십자가는 외면하는 우리 모습 말입니다.

11. 금요 새벽기도에서 향유 옥합 여인에 대한 설교를 마친 뒤, 몇몇 지체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미 카페가 마감되었는데 한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주문해도 되나요?”

“당연히 되지요. 뭐 드실래요?”라고 묻자, 뭔가 주변을 신기하게 둘러본 청년은 딸기라떼를 주문했습니다. 그분은 이곳에 오기 전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그분에게 왜 용기가 필요했는가 물었습니다.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가끔 지나갈때 문이 닫혀 있거나 아이들이 왔다갔다 해서 들어갈까 망설였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곳이 카페이지만 동시에 대안학교이고, 한 사람을 위한 학교라는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왜 한 명인지에 대한 이유도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실 차별과 폭력이 사람의 건강과 수명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연구학도로, 현재 박사 수료를 하고 계속 논문을 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혹시 외롭고 분노로만 가득찬 누군가에게 그저 총알처럼 쓰여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아무리 노력해도 누구 하나 그 벌판에서 손잡아주지 않고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일렁일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분노로 가득차 이 지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상태에서 ‘달꿈’이라는 곳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고민하다 들어왔는데, 뭔가 큰 위로가 밀려 들어온다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분노가 가득한 상태에서, 버텨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분노는 누군가 분노해야 할 상황에도 힘이 없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하는 분노였을 것”이라고, “이제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언제든 이곳에 오시라”고 말입니다.

향유옥합 말씀을 주신 날, 이와 같은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만남은 화려함을 좇아가기 너무 쉬운 저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향유옥합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이런 일상을 들으면서도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연이라고만 생각하면, 우리는 매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낯선 타자들을 향해 여전히 나의 기대로만 흔드는 종려나무 가지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두 손에 종려나무 가지만 가득하면, 결코 십자가를 붙들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들지 못하면, 우리는 매일 두 손에 내가 붙잡고 싶은 사람의 손만 붙들 뿐입니다. 그곳에는 나의 만족만 있을 뿐, 은혜도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은 언제나 공허할 뿐입니다.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을 기점으로 사람들이 흔드는 나뭇가지 너머 십자가를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생명의 상징이신 분이 죽음의 상징인 곳에 박힌 사건. 아무 죄가 없다며 죄책감도 못느끼는 죄인인 저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 된 사건. 그래서 고개 들 수 없는 그곳에 가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언제나 그렇게 말합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왜 저 분이 죄인이 되신 것일까요. 그때서야 몇 마디 진심으로 고백하면 그분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맙다 고맙다…, 와줘서 고맙다.”

죄인이 아닌데 미안하다 말하고, 미안하다 말했는데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요.

12.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이 사건을 저는 지난 주 전두환 씨 손자 전우원 씨와 5.18 유가족들의 만남을 통해 느꼈습니다.

처음에 저는 단지 마약을 한 청년의 쇼 혹은 패륜적 죄를 저지른 집안의 MZ세대가 관심을 받기 위해 보이는 쇼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방송으로 마약을 하면서 ‘내 죄를 모두 다 고발한다’고 하는 것도 이상해 보였습니다. 당연히 할아버지가 대죄인이라 말하는 그의 고백도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마약을 한 죄인이기는 하지만,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에 할아버지의 죄를 직접 짊어질 당사자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흔쾌히 “아니에요, 그 가족의 죄 자기도 책임이 있지요”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아담의 죄와 내 죄 사이에서 죄인됨을 느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죄인됨을 느낀다면, 오늘 하루를 그렇게 당당히 살 수 없지 않습니까? 내 가족과 형제의 죄가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우리 모습에도 대답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치인들 가족의 죄에 대해서는 끝까지 파고드는 우리가, 내 가족이 저지르는 작은 범법행위에는 ‘이 정도는 뭐’라며 둔감한 것에 대해 면죄부가 가능할 리 없습니다.

어찌 됐건 그런 그가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여기에 왜 왔냐고. 그는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왜 구태여 여기까지 왔냐고 하자 “저는 살아있지만 그분들은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현존과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인과관계를 느끼는 청년의 고백에 뭔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 중 누구도 찾아가지 않은 곳, 할아버지가 대역죄인이니 그곳에 가면 어떤 돌팔매질을 당할지 모르는 5.18 피해 유가족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로워서가 아니라 죄책감이 커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삶을 의롭게 살면서 제가 느끼는 책임감을 국민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회개하고 반성하고 살겠습니다.”

그 진심어린 고백에 이어 유가족들 앞에 “저의 죄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떨며 눈물 흘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젊은 청년은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옷을 벗어 이미 죽어 차갑게 식어버린 묘비를 닦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죄는 수십 년을 누구도 사과하지 않아 외면받고 버림받은 황량한 벌판 위에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가족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가족들은 용기를 내 와줘서 젊은 청년에게 “고마워, 고마워”라며 꽉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차갑게 식은 묘비, 죽음과 회피, 핑계와 원한으로 가득찬 그곳에 용서의 꽃이 피어났습니다. 유가족도 청년도 울고, 그 광경을 보는 저도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광경은 목회자인 저를 얼마나 부끄럽게 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피상적으로 선교, 구제, 프로그램, 설교로 연명하는 제게 이 청년이 편안한 삶을 내려놓고 스스로 죄인의 길로 들어간 며칠 동안의 삶이야말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진심어린 사과 앞에, 학살당하고 외면당했던 그 누구도 감당못할 분노와 외로움에 살아온 마음 문을 열고 “와줘서 고맙다”고, “앞으로 용기 내서 살라”고 말하는 희생자들의 말과 품은 십자가의 품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문안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주간 누구를 환대하며,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문안하고, 무엇을 위해 두 팔을 흔드셨습니까?

이제 우리 손에 사실은 내가 인정받고 싶어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내려놓으십시다. 힘차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것은 나의 인정만을 위한 욕망이었음을 회개하십시다.

베이고 잘리고 나의 몸 너의 몸 누구의 몸인지 모르는 나무들의 몸덩이, 깊게 패인 골고다의 십자가가 선 곳에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고 외면한 죄인들, 그 가운데 생명의 꽃이 되신 예수가 여전히 덩그러니 외로이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그 예수께로 가십시다.

그 분 앞에서 새 사람이 되기로 결단한 개신교인이라면 숫자와 규모로 능력을 따지고 평가했던, 나를 인정해 달라고 두 손 높이 들며 가차없이 타자의 생명을 훼손했던 내 옛 삶을 주님이 계신 십자가에 못박으십시다.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된다면, 바로 그대를 통해 분열의 땅은 화목의 땅으로, 갈등과 차별로 움푹 패인 곳은 존중의 샘물로, 혐오하는 사이 무덤마다 십자가의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유한승 달꿈예술학교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류한승 목사

서울 정릉 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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