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화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1일 제413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먼저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의 전모와 기획 배경’을 발표한 이고은 교수(전남대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는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사학자)가 1906년과 1908년 사이 15권의 교과서를 간행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책이 시리즈에 포함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채 추정에 그칠 뿐이었다”며 “헐버트 시리즈의 전모는 1911년 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한 서목[이하 서목(1911)]과 1912년 서목[이하 서목(1912)]에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의 구성과 체계는 1905년부터 1908년 전후로 그 수가 점차 증가했다가 1912년까지 감소하는 변화를 보인다. 교과서는 총 13종으로 파악되지만 서목(1911)에 기재된 것은 12종뿐이며 서목(1912)에서는 다시 10종으로 줄어든다”고 했다.

이 교수는 “시리즈물 13종의 저술 양상을 살펴보면 5종이 저술되고 나머지 8종은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번역된 것 중에서도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것(「식물도셜」, 「성리학초권」)과 편역 또는 번안된 것(「텬문략해」, 「산학신편초등」, 「산학신편고등」, 「진리변독삼자경」, 「미국사기」)으로 구분할 수 있다”며 「계오문답」의 경우 중국에서 발행된 한문 서학서를 번역한 것이 확실하지만 현재 유일하게 실물을 찾지 못해 번역 양상이 어떤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헐버트 시리즈는 개화기 신지식의 교육과 번역을 주도하던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문제들, 즉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그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한국어의 변화상과 그로 인한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낸 자료라 할 수 있다”며 “그러나 그런 가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고, 일부 교과서만 논의되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또 “학부에서 발행했던 교과서와 헐버트 시리즈의 교과서는 언어와 내용에서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며 “헐버트 시리즈 교과서들은 순 한글로 쓰였고, 일부 고유명사에 한문을 병기하더라도 한글을 먼저 쓴 뒤 괄호 안에 한문을 넣었다. 반면 학부에서 발행한 교과서는 국한혼용문으로 쓰였다”고 했다.

이 교수는 “내용 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며 “갑오개혁 이후 발행된 학부 교과서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고,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로는 근대적시민의 소양이자 의무로써 국가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반면 선교사들에 의해 저술된 헐버트 시리즈는 창조론에 근거해 기독교 세계관을 강조했다. 헐버트 시리즈 교과서의 내용은 미국 공립학교의 실용적 기술교육과 기독교 교육이 혼합된 것이었으며,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민주적 성격도 강했다”고 했다.

이어 “따라서 헐버트는 조선 정부 관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부침에 따라 달라지는 조선 정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했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정한 배움을 목표로 하기보다 관직을 얻으려고 영어 학습에만 혈안이 된 양반들도 비난했다”며 “헐버트가 보기에 조선에서 필요한 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인물은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정치권 밖에 있으면서 한국인을 깊이 동정하고, 한국에 오래 거주하여 한국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며 “그리고 한국의 교회를 형성하는 중산층이 이러한 변화와 운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헐버트 시리즈의 탄생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한국인들의 신지식 갈구를 배경으로 양질의 기독교 교양서를 공급하려던 선교사들의 입장과 연합출판사로 기능하게 된 예수교서회, 그리고 한국에서 20여 년의 교육 경력을 쌓았던 헐버트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교과서 사업을 시작하려던 입장이 만나 성사된 사건이었다”고 했다.

조선 선교사 헐버트
▲과거 조선에서 강의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논찬한 김동진 회장(헐버트기념사업회)은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는 교육계, 국어학계, 기독교계에서조차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주제다. 매우 적은 수의 학자들만이 이 주제에 관심을 표하고 있는 현실에 이고은 교수가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를 주제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뜻깊은 일”이라며 “특히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의 탄생 배경을 복합적으로 연구하여 기독교계가 어떻게 헐버트와 연합하였는지를 밝힌 점도 큰 성과”라고 전했다.

이후 ‘미남장로회 광주 선교지부의 숨은 조력자, 도마리아 선교사 연구’를 발표한 윤상림 박사(연세대 객원교수)는 “미남장로회 소속으로 1892년부터 1987년까지 내한한 선교사는 약 540명으로, 혼인 여부를 떠나 여성 선교사의 비율이 훨씬 높으나 이들의 선교 사역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지 못한 편이고 남장로회 소속의 남성선교사 연구도 소수의 1세대 개척 선교사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라고 했다.

그는 “주목할 점 중의 한 가지는 1920년대 이후 미남장로회 한국선교부의 선교지역인 호남 지역은 여성들에 대한 전도사역이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이는 여성 선교사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졌고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 시기의 복음 전도사역의 각성은 1906~07년 사이의 부흥 시기와 다른 점이 있다. 이때의 진전은 주일학교와 선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졌고, 사역의 빠른 성장이 여성들 사이에서 있었다. 독신녀들의 사역은 특별히 필요했다. 왜냐하면 사회적 관습은 남자 전도사들이 한국의 여성들을 집에서 만나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해방 이전 내한하여 해방 이후까지 30년(안식년 및 강제 출국하여 고향으로 갔던 기간을 포함하면 38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거의 임지를 옮기지 않고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독신 여성 선교사 도마리아에 대해 “훈련받아 온 대로 순회사역에 충실하고 교육선교활동에도 부족하지 않으며 성실한 교육자였다”고 했다.

그는 “도마리아 선교사는 1913년 햇수로 2년차가 되었을 때부터 여성을 위한 복음 전도사역에 동참했다. 도마리아는 순회하는 지역을 상당히 상세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내한 후 초기 몇 년 동안의 순회사역에 대한 기록에서는 주로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자연을 묘사했고, 첫 안식년을 마친 후에는 성경공부와 순회사역에 대해 조금 더 상술하며 전문적인 과정의 기록을 남겼다. 38년 동안 선교사로 살며 어학 공부에 대한 임무가 있었던 내한 첫 해를 제외하고는 한 해도 순회전도, 전도 사역, 성경 공부 등의 임무가 빠지지 않았다. 몇 해씩 교감, 교장직으로 선교여학교와 남학교를 책임지고 있을 때도 주 업무에는 늘 순회사역이 포함되었다”고 했다.

또 “1929년 서서평 선교사는 22년 선교사역 중 처음이자 유일했던 한 번의 안식년을 맞았다. 그때 이일학교를 맡았던 사람이 도마리아였다”며 “운영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이러한 학교를 지속해 갔던 것은 설립자의 뜻을 존중하고, 미남장로회의 교육 선교, 성경공부(사경회, 열흘 성경학교, 달성경학교 등)을 지지하며 충실했던 도마리아의 드러나지 않았던 교육선교관이었을 것이다. 도마리아는 선교사의 직무에 충실했던 자였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논찬한 논찬한 이재근 교수(광신대)는 “윤상림 박사의 논문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기독교역사 연구의 한 축인 선교사 연구의 중요한 공백 일부를 메운 것이고, 두 번재 기여는 선교사의 ‘일상’에 대한 관심”이라며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 대부분은 대개 시골의 순회지역을 맡아 순회하거나 학교나 병원에서 그저 해야 할 일상을 살아냈을 뿐이다. 이들 ‘숨은’ ‘숨겨진’ ‘소리없는’ ‘조용한’ 이들은 대개 지도자보다는 조력자로서 묵묵히 자기 일을 했을 뿐이다. 이런 이들이 사실은 대부분 선교사들의 ‘전형’이었다. 도마리아는 여성 독신 선교사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