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유대교 버렸다고 생각 않아
성전 제사·구전 율법보다, 예수님
헬라파 성도 주장, 바리새인 반감
유대파 기독교인들, 박해 안 받아

바리새인 샴마이 힐렐
▲한 기독교 영화 속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는 예수님 모습.

6. 예수님과 유대교의 관계

1) 유대교 vs 기독교

기독교는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 하에서 그 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1세기 초대교회 때도 유대교와 기독교가 나누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바울도 자신이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였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박해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본격적으로 핍박을 받게 된 것은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의 순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성전 제사’와 ‘구전 율법’의 가치보다 위에 두면서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즉 유대파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참성전이라 하여 성전에서의 제사를 무시 혹은 가볍게 여겼고,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 혹은 완성으로 오신 분이라 하여 율법 대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헬라파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사두개인들(특히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스데반을 포함한 헬라파 기독교인들의 박해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유대 밖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 중 하나가 바로 이방 전도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후 이방 사도인 바울이 세 차례 전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여 준 교회로 헬라인 개종자들을 율법(구전 율법 포함)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있던 유대파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성전 제사를 드리고 (구전) 율법을 준수하는 이들은 바리새파와의 신학적 유사성으로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일으킨 율법 논쟁은 이후 많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반감까지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바울의 가르침에 분노한 몇몇 유대파 기독교인들(바울은 이들을 ‘거짓 형제’라 부름)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바울의 가르침이 거짓임을 주장하였고, 그들은 가는 곳마다 율법 준수 문제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A.D. 49년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4가지 사항은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피를 멀리 하라”는 것이었습니다(행 15:20).

공의회에서 이런 결정을 한 것은 헬라 개종자도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파 기독교인들이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것만큼은 자제하라는 차원의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거짓 형제들의 가르침에 따라 도로 율법을 지키고 유대 관습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에 화가 난 바울이 감정을 실어 쓴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어떻게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게 되었는지 비난하며, 자신의 가르침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 바리새파
▲자코포 로부스티(일명 틴토레토, Jacopo Robusti, Tintoretto)의 ‘바리새인 집에 가신 예수(Christus im Hause des Pharisäers)’.

바리새인들, 구전 율법 매우 중시
예수님, 교리 잘못 지적하는 대신
율법 이해 잘못된 것 깨닫게 하고
율법 참된 의미와 근본 정신 교육

2)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

바울이 기독교의 핵심 신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으로써 율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많은 그룹 중에서도 특히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부활에 관하여 사두개인들과 벌였던 논쟁도 있었지만(마 22:23-33; 막12:18-27; 눅20:27-40), 사두개인들과 그 외 별다른 신학적 논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은 매우 많았음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두개인들의 접근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논쟁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사복음서를 기록한 예수님 제자들도 이런 점을 반영하여 얼핏 보면 경건한 것 같지만 이면을 보면 위선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더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 논쟁의 대부분은 세금 납부 문제나 그리스도 표적 요구 등을 제외하면 주로 바리새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구전 율법에 관한 것들입니다. 즉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마 9:11; 막 2:16; 눅 5:29-32), 금식하는 것(마 9:14; 막 2:24; 눅 5:33-39), 안식일 지키는 것(마 12:2; 눅 6:1-5, 6-11), 식사 전 손 씻는 것(마 15:1-20; 막 7:1-23; 눅 11:37-44), 이혼하는 것(마 19:3; 막 10:2) 등, 주로 바리새파의 핵심 교리에 관한 것들이 논쟁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들에 대하여 취하신 태도는 이들의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기보다, 먼저 이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였음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율법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마 5:17-20).

즉 율법은 언약 백성으로서 반드시 메어야 할 ‘고통의 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영광의 면류관’으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고 지킬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교와 뿌리가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과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율법의 근본 정신, 즉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일깨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년 동안 공생애를 통하여 이런 가르침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믿는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르게 하기에 효과가 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율법의 완성, 율법의 마침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 바리새파 제임스 티소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의 ‘화 있도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1886-1894).
율법 문자 얽매여 이득 보게 해석
실천 일삼던 바리새인, 눈뜬 장님
율법,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역할
하나님, 이웃 사랑할 마음 길러줘

결국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며(빌 2:5-11),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해 보이신 ‘사랑’, 즉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죄악 된 우리 인간을 위하여 희생하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롬 13:8-10).

이것을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마 22:34-40; 막 12:28-34; 눅 10:25-28).

결국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율법을 해석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근본 정신을 도외시한 채 오직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율법의 의미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즉 율법을 주신 이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율법에 흠이 없는 자로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에는 우등생도 열등생도 없습니다. 예수님 사랑이 태양처럼 빛난다면, 우리의 사랑은 아무리 빛나봐야 반딧불 정도도 안될 것입니다. 반딧불끼리 서로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고 또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울의 눈에도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딤전 1:5)”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율법 선생이라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뜻도 모르는 ‘눈 뜬 장님’에 불과한 것입니다.

율법을 하나님 뜻대로 올바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선생’ 또는 ‘의인’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참뜻을 가르치러 오신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마 5:17)”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이방의 사도가 되었을 때, 자신이 유대교로부터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이 불완전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스스로 힘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초등교사(몽학선생)’인 것입니다(롬 3:20; 갈 3:24-25).

이처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즉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율법의 완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율법의 완성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 너무나 확실한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그 실천을 통하여 사랑,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자칭 율법 선생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율법을 위한 율법,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위선적인 율법’으로 만들어 자신들은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즉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지만, 잘못된 해석과 실천으로 말미암아 화를 불러오는 재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왜곡한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잡고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올바른 문/길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좁은 문이며 협착한 길이지만 구원으로 가는 올바른 길/문입니다(마 7:13-14).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는 사람들이 선택할 문이고 길인 것입니다.

바리새인 샴마이 힐렐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의 ‘학자들과 논쟁하시는 그리스도(Christ Among the Doctors, 1560년경). ⓒ위키
예수님 가르침 잘 이해하기 위해
사두개인 및 바리새인 특성 이해
율법 완성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
저주 당한 바리새인에 교훈 얻길

7. 결론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양대 주도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특성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들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도 더욱 분명하여 질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당시 유대교의 잘못된 사상들과 대조시켜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어떤 제자보다 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비록 예수님을 공생애 3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바울이 없었으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 교리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실질적인 기독교 창시자’라고 과장하기도 하지만,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예가 보여주듯이 특히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으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린 신앙으로, 우리가 무엇을 왜 믿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모르면 신앙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만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생각에 율법의 문자만 붙잡고 씨름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는지 또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삼는 이유에 대하여 남들에게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벧전 3:15)”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이는 남들을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까지 속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적인 신앙인이라고 일곱 번이나 저주를 받았던 바리새인들의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실패한 교훈을 통하여 나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루벤스, ‘바리새인 시몬의 집 잔치’
▲피터 루벤스(Pieter Pauwel Rubens, 1577-1640)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그리스도(Christ at Simon the Pharisee, 1618-1620)’,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