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 율법 적용 간단치 않아
해석 중요해져, 두 학파가 체계화
예루살렘 멸망 전후 주도권 변화

바리새인 샴마이 힐렐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의 ‘학자들과 논쟁하시는 그리스도(Christ Among the Doctors, 1560년경). ⓒ위키

4) 힐렐 학파 vs 샴마이 학파

① 대립의 배경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더라도,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613가지 율법만으로 유대인들의 삶을 모든 부문에서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경우에 따라 확대 해석할 필요성이 있었지만, 문제는 그 해석이 사람이나 그룹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사두개파의 경우에는 이미 성전이 존재하고 있고 성전에서 수행하여야 할 제사의 규칙들은 이미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전 제사와 관련하여 더 이상 자세한 메뉴얼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이 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더라도 이미 수천 년 동안 진행해온 관례에 따르거나 대제사장의 유권적 해석과 지시에 따라 성전 업무를 수행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율법을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새롭게 바뀌는 환경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구약 왕정 시대와 신약 로마 통치 시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타락한 성전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커진 신약 시대에는 그만큼 율법에 대한 의존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관심은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내려오다, 하스모니아 왕가에 의하여 성전 부패가 점점 심각해지자 율법에 따른 삶의 추구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활짝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성전에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 말씀인 율법에 따라 사는 삶이 훨씬 큰 만족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는 삶의 방식에 바로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열망에 따라 율법 해석에 일관성과 체계성을 제공한 것이 바로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였습니다.

이 두 학파는 율법에 대한 사랑과 실천을 공유하였지만 율법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많은 면에서 서로 대조를 이뤘습니다.

샴마이 학파가 매우 엄격한 율법 해석(firmness and strictness)을 강조하였다면, 힐렐 학파는 유연한 율법 해석(tireless patience)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들은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그 결과 구전율법은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이는 앞으로 전개될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 두 학파의 차이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이 와서 “한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짧은 시간 내에 율법의 핵심을 설명해 주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하자, 샴마이는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그 이방인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힐렐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고 나머지는 설명이다”라고 설명하자 그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보여 주듯 엄격한 샴마이 학파보다는 유연한 힐렐 학파의 율법 접근법이 무식하고 먹고 살기에 바쁜 일반 유대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매우 권위적이었던 샴마이 학파가 주도하던 산헤드린이 A.D. 70년 폐쇄되자, 백성들은 일제히 힐렐 학파의 유연한 율법 해석을 따랐던 것입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제국에 강경한 자세를 취했던 샴마이 학파보다는 타협의 자세를 취했던 힐렐 학파 쪽을 더 선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A,D. 70년 전에는 산헤드린을 주도하던 샴마이 학파가 율법 해석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A.D. 70년 이후 산헤드린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힐렐 학파가 율법 해석의 주도권을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랍비 유대교는 힐렐 학파의 율법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샴마이 힐렐
▲한 기독교 영화 속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는 예수님 모습.

샴마이, 열심당 동조한 율법주의
너그러운 힐렐, 가말리엘 대표적
정반대 해석 내놓는 경우들 많아

②치열한 율법 논쟁

샴마이 학파를 설립한 샴마이(B.C. 50-A.D. 30)는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무역을 하여 많은 돈을 번 제사장 출신 사업가였습니다. 그의 배경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어릴 적부터 율법을 지키는 것을 유대인의 책무라 생각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당원들의 파괴적인 활동에도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율법 해석에도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힐렐의 뒤를 이어 산헤드린의 대표가 되자, 샴마이는 힐렐 학파를 누르고 주도적으로 산헤드린을 장악하였습니다. 샴마이 학파의 산헤드린 장악은 앞서 말씀드렸듯 A.D. 7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반면 힐렐 학파를 설립한 힐렐은 바빌로니아 디아스포라 출신으로, 가나안에서 날품을 팔면서 율법 공부를 하였습니다. 학비가 없어 지붕위로 올라가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당시 율법 선생은 힐렐의 이런 열심을 보고 돈을 내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자라서 그런지 그는 율법 해석에 있어서도 매우 너그러운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런 관대함은 힐렐의 손자였던 가말리엘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리새파 제자였던 바울이 산헤드린에 잡혀왔을 때, 가말리엘은 산헤드린의 처벌 대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것을 제안하였습니다(행 5:34-39, 22:3).

이렇게 성장 배경부터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두 율법학자는 율법 해석에서도 많은 부분 서로 반대되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이 중에서 많이 회자되는 대표적인 것 세 가지만 거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해석의 차이들이 워낙 대조적이어서, “마치 두 종류의 다른 토라(Torah, 율법 가르침)가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입니다.

[1] 율법 공부

당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공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샴마이는 아무나 토라를 공부하여서는 안 되고, 오직 자격이 있는 학생만이 율법 학교에 입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힐렐은 어느 누구나 본인이 원하면 토라를 배울 자격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비록 지금은 자격이 부족할지 몰라도 누구나 회개하고 자격 있는 학생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힐렐 학파 출신 바리새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2] 선의의 거짓말(White Lies)

십계명은 거짓말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에는 ‘선의의 거짓말’과 ‘악의의 거짓말’이 있습니다. 문제는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결혼식 때 아름답지 못한 신부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샴마이는 거짓말은 무조건 잘못이라 하였고, 힐렐은 모든 신부가 결혼식 날에는 (평상시보다)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샴마이가 일반적 관점을 중시하였다면, 힐렐은 개인적 관점을 중요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샴마이 힐렐
▲(왼쪽부터) 샴마이, 힐렐.

[3] 이혼 문제

신명기 24장 1절은 “수치되는 일(Something Indecent)”이 아내에게서 발견되면 모세가 명한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보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이혼의 기준이 되는 ‘수치되는 일’인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샴마이는 오직 아내가 ‘부정한 짓(즉 간음)’을 한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반면 힐렐은 ‘음식을 태우는 것’ 같은 작은 실수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하여 샴마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주셨는데(마 5:32), 오늘날 힐렐 해석을 따르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이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③ 정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혼 문제(마 5:32)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힐렐 학파와 유사성을 보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황금률(Golden Rule)도 힐렐의 가르침(Silver Rule)과 유사성이 있습니다. 또 이방인에 대한 열린 자세, 율법의 문자보다는 정신을 강조하는 점, 교만에 대한 경고와 겸손에 대한 칭찬,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 등은 샴마이보단 힐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세리나 죄인들과의 식사, 엄격한 안식일 준수 등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할 때, 그 상대 바리새인들은 샴마이 학파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무렵 바리새인들을 일곱 번 저주하셨을 때(마 23장), 당시 산헤드린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것은 샴마이 학파였습니다. 따라서 저주 내용은 특별히 샴마이 학파를 향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계속>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