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텐베르크 교회 성도들, 왜 설교자 루터를 바라보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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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루카스 크라나흐가 추억하는 마르틴 루터

크라나흐, 루터 설교 장면 표현해
회중들, 루터 대신 십자가 응시해
‘십자가 못박히신 그리스도’ 강조
예수님 중심, 결속·연합한 공동체

▲루카스 크라나흐의 비텐베르크 제단화 중 하단 패널. 루터의 설교 모습을 담고 있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비텐베르크 제단화 중 하단 패널. 루터의 설교 모습을 담고 있다.

마르틴 루터와의 두터운 친분 탓인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는 루터의 초상을 여러 차례 제작하였다. 그가 그린 루터의 초상화들은 이탈리아의 피렌체 미술관, 바이마르의 슐로쓰 미술관, 스웨덴 국립미술관 등 유럽 각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종교개혁 운동이 불타오르는 기간 동안 회화와 목판화를 통해 루터의 신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1505년부터 1550년까지 신흥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중심지인 비텐베르크에서 활동하였던 크라나흐의 후원자들은 마르틴 루터의 강력한 지지자들이었고, 크라나흐의 작품을 ‘새로운 신앙의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크라나흐는 마르틴 루터의 신학, 나아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아냈는데, <비텐베르크 시(市) 교회의 제단화(1547)>도 그런 작품중 하나였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모습을 묘출하였다면, ‘루터의 설교’에서는 비텐베르크 시 교회에서 수십년간 목회하였던 마르틴 루터의 설교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니 코블(Bonnie Noble)에 따르면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 교회에서 33년간 매해 100여 차례의 설교를 했으며, 교회는 루터 공동체의 심장과 다름없었다.

그림 왼쪽에는 강단에 선 마르틴 루터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한 손은 펼쳐진 성경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앞을 향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루터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보인다.

미술사학자들에 따르면, 회중 가운데는 아이를 무릎에 올린 부인 카타리나 폰 루터(Katharina von Luther), 그녀의 뒤에는 딸 막달레나(Magdalena), 그리고 회중과 약간 떨어져 있는 수염을 기른 인물은 크라나흐 자신으로 분석했다. 이때 그림을 완성한 1547년 크라나흐는 75세였으므로, 그림에 묘사된 인물의 나이와 비슷해 보인다.

크라나흐는 회중을 아이에서 청년과 노인, 여성까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하여 루터의 설교를 들었던 비텐베르크의 신자들을 모델로 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은 흥미롭게도 설교자인 루터를 향하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예배자들은 루터보다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들은 루터와 회중 사이 빈 공간, 즉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중이다.

(츠빙글리와 칼뱅이 교회 내 성상을 비성경적으로 보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에 반해, 루터는 우상화되지 않는 한 성상을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이해하여 교회 내에 존치시켰다.)

사실 크라나흐가 루터와 회중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이나 회중이 루터 대신에 십자가를 응시하게 구도를 설정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고통받는 구세주의 몸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머리글자 ‘INRI’가 보인다. 가시면류관은 그의 오른쪽 어깨로 기울어진 그의 머리 위에 얹혀 있다.

이 작품을 구상할 때 크라나흐는 루터가 그의 설교를 통해 끊임없이 십자가를 가리킨 것을 떠올렸다. 이 작품은 루터가 사망한 지 일년 후에 완성되었으므로, 그림을 제작할 때 크라나흐는 루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였을 것이다.

▲루카스 크라나흐, 비텐베르크 제단화, 패널에 유채, 1547.

▲루카스 크라나흐, 비텐베르크 제단화, 패널에 유채, 1547.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는 루터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십가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이 담금질되는 도가니이다”고 하였다. 크라나흐 역시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고 말한 루터의 말을 잊지 않았다.

크라나흐가 이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등장시킨 것은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그 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고난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토론회에서 발표한 28개조 테제 중 21번째 테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마르틴 루터는 로마 교회의 핍박의 표적이 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루터의 생각을 돌리고자 시도했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루터를 국법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로 규정, 그에 대한 모든 법적 보호를 박탈하고 덩달아 루터를 따르는 사람들도 유죄 판결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누가 루터를 해치거나 상해를 입히더라도 자신의 행위에 어떤 법적 책임도 지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

점증하는 위협의 징후를 알아차린 작센 지방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Ⅲ)가 나서 루터를 아이제나흐 근처 바르트부르크성(Wartburg)으로 피신시켰다. 그는 그곳에서 머리와 얼굴에 턱수염을 기르면서 기사로 변장했고, 이름도 융커 외르그(Junker Jörg)라는 가명을 썼다.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오자, 루터는 자신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에게 닥치는 고통과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루터가 십자가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본 데는 8개월 간의 은둔 생활이 자리잡고 있다.

루터는 은둔생활 도중 잠시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처음으로 찾은 곳이 크라나흐의 집이었다고 한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신학이 추상적 사유 속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텐베르크 제단화> 중 ‘루터의 설교’를 보면 설교자가 회중을 보는 것도 아니고, 회중은 설교자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제단화의 전통을 무시하고 메시아를 살아 있는 모습으로 묘출하였으며, 형식도 흔히 사용되는 수평 구도가 아닌 수직 구도를 사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림의 중요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은 종교개혁 당시만 해도 1천 5백년 이상이 흐른 과거 이야기였다. 따라서 갈보리의 예수님을 그리려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그렸어야 했다. 그러나 크라나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에 주목하였다.

예수님 최후의 순간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통과하는 그리스도, 현존하는 그리스도, 그 분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일환일 것이다.

예배를 드리러 온 비텐베르크 신자들이 교회의 그림을 보았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과 아직도 그 분이 자신들과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 그런 예수님을 중심으로 비텐베르크 공동체가 단단히 결속하고 연합해 있다는 사실을 공유했을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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