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약속 ‘카이로 선언’, 3.1운동에 대한 미국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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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칼럼] 한국 근현대사, 대한민국, 그리고 기독교 (3)

박명수 박사님(서울신대 명예교수)께서 지난 1월 16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부당한 폄훼 및 그 시정방안’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소개합니다. 이 글은 지난 2022년 2월 역사연구재단에서 열린 한국근현대사 세미나에서 발표하신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편집자 주

▲올해 3.1절을 맞아 거리에서 만세를 외치는 대구 지역 기독교인들. ⓒ크투 DB
▲올해 3.1절을 맞아 거리에서 만세를 외치는 대구 지역 기독교인들. ⓒ크투 DB

카쓰라 태프트 밀담, 조약 아냐
1907년 대부흥, 미국 향한 희망
구한말, 미국과 기독교 기대 커
미국 같은 민주 국가 건설 원해

Ⅲ. 일제 시기 조선사회와 기독교: 대한민국의 씨앗

조미조약을 체결한 로버트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의 지적대로, 한반도는 동북아의 세 국가 즉 중국·일본·러시아의 전쟁터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인들은 미국에 의지해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런 꿈이 조미조약 제1조 거중조정 항목에 담겨져 있다. 물론 이 거중조정은 중국이 넣은 항목이지만, 고종은 이 항목을 이용해 미국을 지렛대로 주변 3국의 간섭을 막아 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한반도에 큰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한반도가 특정 국가에 독점되지 않고, 이곳에서 자유경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국의 종주권에 반대했고, 다음으로 러시아가 한반도를 주도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미국은 일본과 밀착하게 되었고, 소위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하는 카쓰라 태프트 비망록이 만들어진 것이다.

카쓰라 태프트 밀약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당시 일본은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대신 카쓰라 사이에 나눈 대화를 비망록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이는 국가 간 정식으로 맺어진 조약이 아니다. 이 비망록의 핵심은 미국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최근 많은 학자들은 이를 조약이나 밀약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동북아로 패권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였다. 이런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바로 한반도의 희망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국은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로 나오게 되었고, 이것은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한국에 신자가 많아지면 미국이 한국을 도와 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1908년부터 일어난 백만 구령운동과도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이것은 기독교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일병합 직전 대한매일신보 사설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사설이 연속으로 게재되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과 기독교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기대는 한일병합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미주에 사는 한인들은 과거 대한제국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생각은 대한제국이 망한 바로 그 다음 달 <신한민보>에서 기사로 나타나고 있으며, 미주 한인들 모임인 대한인국민회의 각종 기록에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입장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소약국대회(小弱國大會)에서 행한 박용만의 연설이다. 당시 이승만의 지시와 후원으로 대회에 참석한 박용만은 그의 연설에서 “한국에서 기독교는 민족종교(national religion)로서 간주되어 왔고, 우리는 기독교만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며, 이것은 선교사들이 전해 준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인들로부터 미국의 이상, 미국의 제도, 그리고 위대한 미국이 만든 참된 자유와 참된 민주주의에 대해서 배워왔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 자주민의 정신이라는 것,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 참된 민주주의의 기초라는 것,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가 민주적인 기관의 원칙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오직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과 ‘모든 국민은 그들이 살아가야 할 정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3.1운동, 민주 국가 기대 높여
기독교, 일본 식민통치 가운데
미국 등 세계 연결 유일한 통로
미국, 한국 대한 관심 매우 미미
상업적 가치보다 기독교에 주목

이 같은 우리 민족의 기독교와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3.1운동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1918년 11월 말, 상해 신한청년당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야소교를 국교로 인정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가 조선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며, 우리도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를 만들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미국에 있던 교포들이다. 이들은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4월 7일 연합통신과 기자회견에서 “이번 독립운동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으로 동양에 처음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겠다”고 밝혔고, 이것을 일본경찰은 “조선은 미국의 제도와 및 동일한 정신 아래 기독교독립국을 건설한다”고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이런 내용을 당시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상해에 파송해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던 감리교 목사 현순에게 알렸다. 그리고 이런 기초위에서 원래 초안으로 작성된 1919년 4월 10일의 가헌법 1조에는 “대한공화국은 미국의 정부를 모방하여 민주정부를 채택한다”(The Republic of Korea adopts a democratic government after that of the United States)고 되어 있다.

이 초안을 조소앙·신익희·이광수가 검토했고, 그 결과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한다고 수정하였다. (조소앙·신익희·이광수는 초안 작성자가 아니라, 검토자들이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바로 민주공화국의 전형적 경우이므로, 초안과 통과된 안은 같은 것이다. 미국 교포들은 1919년 4월 중순 필라델피아에 모여, 앞으로 새로운 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 방향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였던 모습. ⓒ독립기념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였던 모습. ⓒ독립기념관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 민족이 중국 봉건주의도, 일본 식민주의도 부정하고 서구 기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개항 이후 일본을 통한 근대화를 우리에게 강요해 왔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일본을 통한 근대화보다 미국과 기독교를 통한 근대화를 주장했다.

이런 새로운 방향은 서재필·윤치호·이승만·안창호·이상재를 비롯한 기라성같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통치가 지속되는 동안, 기독교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일제 시기 일본이 한반도에 이룩한 것들을 축소시킬 필요가 없다. 일본은 국제사회에 조선이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 주도해서 조선을 개방·개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한반도에 와서 일본은 자신들이 국제사회에 약속한 것들을 지켰다. 일본이 이룩한 사법제도, 교통망, 학교시설, 측량산업 등은 한반도를 과거 조선시대에서 벗어나게 해 준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근대화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을 한반도의 주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하수인으로 생각하였다. 일본이 추구한 개혁은 서구의 본질적 개혁이 아니라 서구문명을 일본식으로 왜곡한 과도문명(혹은 사이비 서구문명)이었다.

헐버트 선교사(Homer B. Hulbert)는 “한국인들은 (일본의) 야만적인 봉건주의에 근거한 문명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미국 기독교인들은 지금 그들 앞에 한국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이념(New Ideal)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민이 요구하는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한일병합을 앞에 둔 한국인들이 무엇을 원했는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상해 신한청년당은 일본이 무력을 좋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민주국가가 될 수 없고, 한국은 문화를 숭상하며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미국과 더불어 민주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물론 평북 운산의 금광이 있었지만, 한반도는 미국의 상업적 이해에 있어 비중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기독교였다.

미국 정치를 움직이는 기독교의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으며, 미국 선교사들은 미국의 외교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개항기와 일제 시기 미국 기독교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일제 시기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의 장로교 선교부와 천주교 선교부가 평양에 있었다.

여기에 주목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자신들이 원하는 국가는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하면서, 윌슨에게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3.1운동 당시 미국 기독교의 협조는 이승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시 이승만이 기댈 곳은 역시 기독교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것이 바로 기독교인친우회였다. 이 단체를 통해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로비를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한미관계의 핵심이었고, 이 통로는 한국이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 ⓒ홍성사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 ⓒ홍성사

일제 시기 기독교의 역할
1. 한국 기독교, 일본에 합병 안돼
2. 서구 근대 국가 비전 공간 창출
3. 한국을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
4. 일본 천황주의에 끝까지 저항해

이런 측면에서 일제 시기 기독교의 역할을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한일합병 이후에도 일본에 통합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남았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철저하게 일본의 일부분으로 만들려 했다. 정치는 물론 경제·교육·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일본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쉽게 일본화가 되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한국 기독교는 일본과의 연대보다는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오히려 1910년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될 때 한국 기독교는 대부흥운동을 경험한 직후였다. 1911년 신구약 성경이 완역 출판되었고, 1912년 장로교회는 총회를 만들어 완전 독립된 교회가 되었다. 일본은 일제 말에도 한국 기독교를 일본화시키려 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를 장로교는 일본장로교, 감리교는 일본감리교로 통합시키려 했다.

여기에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장로교이다. 성결교회도 처음에는 일본 성결교회의 지부로 시작했지만 1910년 독립했고, 일제 말에도 일본에 병합되는 것을 반대했다. 한국 기독교는 일본 기독교에 통합되지 않고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둘째, 일제 시기 한국 기독교는 전통적인 봉건주의도 일제의 식민 지배도 반대하는 서구식 근대국가를 꿈꾸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였다.

지금까지 한반도는 전통적 봉건주의 공간에 속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 한반도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일본인 거주지역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시마다 더러운 조선인 지역과 깨끗한 일본인 지역이 나뉘어졌고, 직업도 과거 봉건 직업과 일본식민지가 창출한 새로운 식민 직업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일제 시기 한국 사회에는 이런 양 공간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일제 시기 전국에는 약 20여개의 부(오늘의 시)가 있었고, 이들 부에는 대부분 미션 스테이션이 있었다. 이 선교부와 함께 주변에 교회, 학교, 병원, 그리고 기독교 사회단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선교부와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봉건 시대에도 일제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미국 중심 기독교 질서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필자는 이 공간이 매우 중요했다고 본다.

이 공간에서 각종 독립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1운동, 신간회, 그리고 해방 후 건국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바로 이 공간에서 성장한 것이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한국을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히 일본의 한 지방으로 전락시키려 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것을 거부했고, 세계로 나가기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선교사들은 영어를 가르쳐 주고 유학을 알선해 주는 등 그 길을 알려주는 통로였다. 이승만도 이 통로를 통해 미국에 갔고, 박헌영도 원래 선교사를 통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이 통로를 통해 한국 기독교는 세계를 알게 됐고, 더 큰 세계가 있음을 알게된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국제정세를 살펴보며 독립을 기다리고 민주공화국 건설을 고대했다.

넷째, 한국 기독교는 일본의 천황주의와 싸웠다.

원래 서구 열강을 따라 국제질서에 따라 근대국가가 되었던 일본은 1920년대를 지나면서 2등 국가가 아니라 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황제가 되면 한 국가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의 지배자가 돼야 하며, 따라서 일본의 황제는 섬나라의 왕이 아니라 한 문명권을 지배하는 황제여야 하는 것이다.

▲1919년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1919년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필자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대동아공영권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판 중화주의로 본다. 중국의 천자가 일본의 천황으로 바뀌었고, 그 중심이 유교가 있던 것이 신도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이런 일본의 천황제에 끝까지 저항한 것은 기독교였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은 단지 정치적인 전쟁이 아니라 종교적인 전쟁이었고, 이것을 잘 간파한 사람은 다름이 아닌 이승만이었으며, 그의 <일본 내막기>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일본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다.

일제 시기 한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은 ‘누가 일본과 싸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 힘으로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관심은 누가 일본과 싸울 것인가를 살펴 보면서, 그 싸우는 편에 속해 그 힘으로 독립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한국인들은 독일과 중국이 일본과 싸울 것을 기대해 신한혁명당을 만들었고, 연해주와 북만주 한인들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 교포들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기대했다.

박용만은 미국은 만주를 놓고 일본과 싸울 것을 기대했고, 이럴 경우 무장해 미국을 돕는다면 독립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태평양 전쟁을 통해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미국 편에 섬으로써 독립을 얻으려고 했다.

우리는 3.1운동을 한민족의 민족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민족운동의 핵심은 국제사회,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을 향해 우리 독립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우리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면서 동시에 서구 민주세계의 일원이 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였다.

그 사이 우리 민족은 여기에 실망해 소련 공산주의에도 기웃거렸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여기에 대한 답변이 주어졌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시작과 함께 대서양 헌장을 통하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다시 한번 천명하고, 그 다음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다음 카이로 선언을 통하여 한반도를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필자는 ‘카이로 선언’이야말로 3.1운동에 대한 미국의 응답이며, 이것이야말로 1882년 조미조약에 있던 거중 조정을 미국이 구체적으로 약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명수 박사
서울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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