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죄 씻음’으로 부어지는 성령

‘성령의 부으심(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은 ‘특별한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고 ‘보통의 그리스도인’에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성령을 못 받을 수 있고, 성령을 받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는 다 ‘성령의 부으심(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즉 그것을 ‘구속사적(救贖事的)’이 아닌 ‘은사적(恩賜的)’인 측면으로 접근하여,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일’로 만든 때문이다. (여기서 ‘은사적인 측면’이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의미보다는 ‘특정인에게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주어진 특별 은사’란 뜻이다.)

‘성령의 부어짐’을 말할 땐 우선적으로 ‘구속사적(救贖事的)’ 측면 곧 ‘거룩하신 삼위일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부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성령충만’이니 ‘성령세례’니 하는 것은 그 다음 논의돼야 한다. 둘을 구분하지 않고 논의할 때, ‘성령론’의 혼란을 초래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죄 씻음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질 수 도 없다. 만약 누가 죄 씻음을 받지 않았는데 그에게 성령이 임했다면(이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성경도 하나님의 부정한 죄인이 물로 씻지 아니하고(여기서 물은 ‘죄 씻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 접촉하면 죽는다고 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출 30:20)”.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린 것은(마 3:16), ‘죄 씻음을 받은 자에게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을 예표한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기에 그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 ‘죄인 우리를 대신’한 것이다.

이 외에도 ‘죄 씻음의 상징으로서 물세례’와 ‘성령의 부어짐’을 연결지은 성경 구절들은 많다. “나(요한)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죄 씻음)’를 주었거니와 그(예수님)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예수님이 ‘거듭남’의 원천으로 말한 ‘물과 성령(요 3:5)’ 역시 ‘죄 씻음과 성령의 부어짐’의 관계를 말한 것이며, 이는 에스겔 36장 25-28절의 인용으로 그것이 이미 구약 때부터 약속됐음을 보여준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 36:25-27)”.

◈‘믿음’으로 부어지는 성령

성경은 종종 ‘믿음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부으심’을 말하므로(갈 3:2, 5, 14), ‘성령의 부음’이 이제껏 말한 ‘죄 씻음’과는 별개인가 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2, 5, 14)”.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의 부으심을 받는다’ 함은 ‘믿음으로 죄 씻음(의롭다함)을 받은 자에게 성령이 부어진다’는 뜻이다. 성경은 곳곳에 ‘믿음’을 ‘죄 씻음’의 원천으로 말씀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 15:9)”. 따라서 ‘죄 씻음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부으심’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부으심’은 같은 뜻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성령의 부으심’과 ‘율법주의’를 서로 대척관계, 곧 ‘율법주의’를 ‘성령의 부으심’을 막는 방해물로 간주한다. 이는 ‘율법주의’가 ‘죄 사함을 주는 믿음’을 거부하여 ‘죄 사함으로 부어지는 성령의 부으심’을 막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율법주의자들은 ‘죄 사함’은 ‘제사(제물)’에, ‘의롭다 함’은 ‘자신들의 율법 준수’에 의존시킴으로 ‘죄 사함을 주는 믿음’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부으심’의 전제인 ‘죄 사함(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오직 ‘믿음’임을 선포한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19)”.

◈육체와 성령

여기서 ‘육체’와 ‘성령’을 대비시킨 것은 ‘육체의 사람’은 ‘성령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도 유다는 ‘육에 속한 가인과 그 후예들’을 ‘성령이 없는 자(유 1:11-19)’로 명명했다.

그리고 ‘성령이 부재’하는 ‘육체의 사람’은 언제나 ‘율법’과 연계돼 있다. 이는 성경이 ‘반(反) 믿음적인 율법주의’를 ‘육체(the flesh)’로 규정한데서도(갈 3:3) 알 수 있다. 이는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 사함을 주는 믿음’ 대신 ‘율법’을 의지해 ‘죄 사함과 성령의 부으심’을 받지 못하게 하므로 그를 ‘육신의 사람’으로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믿음(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주의(육체)’로 마감하여 자신들을 ‘육체’에 가둔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유대인 랍비 ‘니고데모’에게 “육(肉)으로 난 것은 육(肉)이요(요 3:7)”라고 한 것은 유대교도들이 ‘율법을 의지’하여 ‘죄사함과 성령의 부으심’을 받지 못해, ‘육체’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성령(聖靈)으로 난 것은 영(靈)이요(요 3:7)”라고 한 것은 ‘믿음’으로 ‘죄 씻음을 받아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말이다.

또 예수님이 ‘율법주의자’를 ‘성령 훼방자(막 3:29)’라고 하는 것도 그들이 ‘믿음’을 부정하고 ‘행위’를 의지하니(롬 9:32-33) ‘믿음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니 ‘그리스도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부으심’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을 ‘육체’에 가둬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물론 이제껏 말한 ‘성령의 부으심’은 ‘성령 충만’과는 구분된다. 여기에 대해선 이미 앞선 ‘이경섭 칼럼(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0070/347852/344905)’에서 다루었다. 더 깊은 이해를 얻으려면 그것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