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 넘기는 루터, 성례전 회복
주로 등장 주민들 직업소명론 투영
다빈치 ‘최후의 만찬’, 가톨릭 상징
크라나흐 제단화는 종교개혁 상징

루카스 크라나흐 비텐베르크 제단화 최후의 만찬
▲루카스 크라나흐, 비텐베르크 제단화, 패널에 유채, 1547.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는 독일 크로나흐(Kronach)에서 출생했다. 출생지 명칭을 따 크라나흐가 됐다. 부친 이름은 ‘화가 한스’(Hans Maler)로 알려져 있는데, 이름으로 보아 부친도 화가로 활동했던 것같다.

크라나흐가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어떻게 훈련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시대인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와 마찬가지로 현지 남독일 거장 밑에서 미술을 익혔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화가였던 관계로 재료를 다루는 법에서 주제를 잡고 인물을 묘사하는 법까지 그림의 기초를 숙지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루카스 크라나흐는 1505년부터 비텐베르크로 이주했고, 그의 작품 대부분이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교황과 중세 교회에 반대하는 글과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크라나흐 역시 그런 사람중 한 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1520년 루터가 크라나흐의 딸 안나의 대부가 됐고, 반대로 크라나흐는 루터의 장남 요하네스(Johannes)의 대부가 되는 등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다.

크라나흐는 비텐베르크에 규모 있는 스튜디오와 인쇄소를 경영하였다. 전에는 비텐베르크 사람들이 책을 펴내려면 다른 지역에 가야 했으나, 크라나흐의 인쇄소가 생기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성경 삽화용 목판을 비롯해 각종 설교집, 기도서, 찬송가 등을 찍어냈고, 필요한 경우 삽화를 넣어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분주한 가운데서도 그는 쉼 없이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마르틴 루터가 정기적으로 설교했던 비텐베르크 시(市) 교회의 제단화이다. 이 작품은 크라나흐가 시작하여 그의 아들(Lucas Cranach the Younger)이 마무리한 것이다. 2대에 걸쳐 제작할 만큼, 이 작품을 ‘필생의 역작’으로 간주했다는 뜻이리라.

이 대형 제단화는 앞뒤로 모두 여덟 장면으로 되어 있는데, 정면 중앙에 최후의 만찬 장면이 보이고 그 좌우로 세례와 신앙고백, 교회에서의 설교 장면과 회중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루터의 신학을 충실하게 따랐다 해서 ‘종교개혁의 제단화’로 불리기도 한다.

이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 중앙의 <최후의 만찬>(1547)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모습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인물은 요한 사도, 예수님 오른쪽 인물은 가룟 유다이다. 그는 표면적으로 아무 일이 없는 것같지만 다른 제자들의 발이 가려져 있는데 반해 그의 발은 바깥으로 나와 있어 일탈행위, 즉 ‘배신’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 우편에 가슴에 손을 얹고 무언가 비장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사도 베드로로,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고 맹세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크라나흐는 식탁 위에 올라온 양의 이미지를 통해 희생양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루카스 크라나흐 비텐베르크 제단화 최후의 만찬
▲루카스 크라나흐, 비텐베르크 제단화 중 최후의 만찬, 패널에 유채, 1547.
그림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오른쪽의 포도주를 건네는 장면이다. 사도들 가운데 루터가 앉아있는데, 루터는 검은 망토 차림을 하고 있다. 이는 뿌리를 잊은 공동체에서 성경의 진리를 외치다 되레 미움을 사 교회로부터 축출됐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크라나흐는 이 그림을 보며 감상자들이 루터가 얼마나 탄식하며 분노하는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 힘썼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복장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림의 핵심은 아니다. 루터는 몸을 돌려 옆에 있는 청년(크라나흐의 아들로 추정)에게 가득 찬 포도주를 넘겨주고 있다. 포도주를 받는 인물은 의외라는 듯 약간 놀란 표정인데,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찬식 때에 회중에게 떡만 나누어주고 잔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은 사제들의 성례로 독점되었다. 심지어 사제들은 일반 신자가 성찬 때 떡을 받는 것조차 위험하게 생각해 사제들이 회중을 대신해 떡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루터는 신자들에게 몸과 피를 모두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공박한 루터의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De Captiviate Babylonica Ecclesiae, 1520)’에 의하면, 성찬은 교회의 부자와 권력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사제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도 떡과 잔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자에게 잔을 빼앗는 것은 로마 교회의 횡포요,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례전의 원래 정신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이상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루터가 청년에게 포도주를 주는 것은 성찬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이 성경적으로도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성찬은 사도들과 사제들에게만 돌아가는 특권이 아니라는 사실은 루터 곁 인물 한스 루프트(Hans Lufft)의 존재로도 확인된다. 크라나흐는 화면에 ‘성경 판화가’로 불리는 한스 루프트를 등장시켰다. 그를 기용한 것은 그가 교황이나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종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깨우치려는 의도에서였다.

나아가 루터의 ‘직업소명론’을 반영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신학자 최주훈은 이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예수님을 제외하고 모두 루터 당시에 살고 있던 비텐베르크 주민들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한스 루프트 같은 인물을 등장시킨 데는 특별한 이유, 곧 루터의 ‘직업소명설’이 투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가톨릭 정신을 구현한 것인데 비해, 크라나흐의 ‘최후의 만찬’에는 종교개혁 사상이 투영되어 있다. 그같은 시도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대단히 혁신적이다.

독일 신학자 마르고트 캐스만(Margot Kaßmann)이 말한 것처럼 “루터가 종교개혁을 글로 표현했다면, 크라나흐는 신앙을 그림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서 확산시켰다. 루터를 종교개혁의 아이콘으로 만드는데 큰 몫을 한 사람이 크라나흐였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고대 로마 유적을 보며 당시 예술가들이 강력한 자극을 받아 일어났던 것처럼, 종교개혁의 예술가들은 순수하게 기독교의 뿌리로 돌아가고자 한 종교개혁가들을 따라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뿌리의식을 찾았다.

종교개혁가들이 중세 유럽의 탁한 대기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듯, 크라나흐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적극 동의해 그 정신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해낸 것이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