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창세 전의 사랑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시작됐다. 이는 하나님 사랑 핵심인 ‘그리스도의 구속’이 ‘창세 전’에 경륜됐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곧 우리의 형질이 이루지기 전 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Thine eyes did see my substance, yet being unperfect, KJV)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다’는 말은 단지 그의 전지전능하심으로 ‘형체가 없는 그를 보셨다’는 뜻이 아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 나를 사랑[의 눈]으로 보셨다’는 뜻이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역시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시작됐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위 말씀들은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를 창조하신 후’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됐다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그를 창조해 놓고 보니 애정이 생겨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했기에 창조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형체(body)가 없는 존재를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생긴다(플라톤의 ‘영혼선재설(pre-existence of souls, 靈魂先在說)’을 연상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선 단지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기원’이 인간 창조 전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 ‘보이고 안 보이고’가 ‘믿음’과 ‘사랑’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4, 27)”,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하나님이 인간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여건을 다 조성하신 후 마지막 여섯째 날에 그를 창조하신 것(창 1:26-31) 역시 엄마가 아기를 낳기 전에 그를 위해 미리 젖병, 옷, 기저귀를 준비해 놓는 것에 비견된다.

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의 발로에서이다. 인간을 너무 사랑했기에 그를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입히신 것이다(창 1:27).

◈영원에 뿌리박은 사랑

‘하나님의 인간사랑’이 ‘창세전에 시작됐다’는 말은 그것이 단지 ‘그것이[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시간적으로 오래 됐다’는 것이 아닌 ‘초(超) 시간(timeless)’, 곧 ‘영원 전’에 시작됐다는 뜻이다.

‘시간’이 ‘해·달·별(sun and moon and stars, 창 1:16)의 창조’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창세 전(創世 前)’은 당연히 ‘초(超) 시간(timeless)’, 곧 ‘영원’에 속한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한 사랑(an everlasting love)’으로 정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an everlasting love)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 31:3)”.

이 ‘영원한 사랑’은 단지 ‘누군가를 오래 사랑한다’거나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원에 기초된 시작도 끝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사랑’의 발로(發露)는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엡 1:5)’이며, 그것은 ‘상대의 태도나 반응’에 따라 그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거나 중단되지 않는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고(고전 13:4-8)”.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며 ‘하나님’을 ‘사랑’과 동일시했다. 여기엔 ‘하나님의 사랑’이 그처럼 ‘영원하다’는 뜻도 함의돼 있다. ‘알파와 오메가(Alpha and Omega)’이신 하나님(계 1:8)은 ‘시작과 끝(the Beginning and the End)’이 없듯, ‘택자에 대한 그의 사랑’역시 ‘영원’하다.

◈샘솟듯 늘 새로운 사랑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지침이 없고(inexhaust), 다함이 없는(endless) ‘끊어지지 않는 사랑(롬 8:39)’이다. 금방 밑천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일천(日淺)한 사랑과는 다르다. 그의 ‘사랑 자원(resources of love)’은 무궁무진하다.

칼빈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는 사랑’,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묘사한 것은 적절하다. 하나님의 ‘용서’와 ‘관용’과 ‘인내’에 지침이 없다. “일흔 번씩 일곱 번씩 용서(마 18:22)”해도 고갈됨이 없다. ‘자비’와 ‘긍휼’에도 소진됨이 없다(애 3:22).

성경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love is strong as death, 아 8:6)”고 한 것은 인간이 ‘죽음’을 폐할 수 없듯 ‘하나님의 사랑’역시 중단될 수 없다는 말이고, ‘그의 사랑은 죽음도 불사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랬다. ‘인간의 죄’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단시키지 못했고,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면서 까지 기어코 사랑을 이어가셨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말은 그의 사랑은 ‘고인 물’같이 마르거나 썩지 않고, ‘샘물’처럼 항상 퐁퐁 샘솟아 새롭다는 뜻이다. 인간들의 사랑은 권태기(倦怠期)가 있지만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엔 권태기가 없다.

우리를 그렇게 오래 아니, 영원히 사랑하셨으면서도 우리를 보실 때 지겨워하시거나 지치지 않으신다.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언제나 ‘풋풋한 첫사랑’이다. 그 샘솟듯 솟아나는 ‘풋풋한 사랑’은 그것을 받는 자들을 새롭게 한다.

그런 풋풋한 사랑을 하시는 분이신지라 ‘자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그런 ‘풋풋한 첫사랑’이길 기대하신다(계 2:4).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