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잔혹성 상세히 묘사
프랑스 내 위그노 향한 핏빛 광란
소박하고 꾸밈없는 미술 양식으로
목숨 걸고 신앙 지킨 이들 기리다

프랑수아 뒤부아 성 바돌로매 날의 대학살
▲프랑수아 뒤부아, 성 바돌로매 날의 대학살, 나무에 유채, 93.5x154.1cm, 1572-1584, 로잔 미술관 소장.
프랑수아 뒤부아의 ‘성 바돌로매 날의 대학살(The St. Bartholomew's Day massacre)’은 157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바돌로매 날 대학살’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림에서는 위그노(Huguenot)의 무수한 시신들이 거리에 방치된 가운데 무장한 왕실 호위대와 민병대의 폭력을 보여준다. 여기서 위그노란 가톨릭의 공포정치 속에서도 제네바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의 신학을 따르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일컫는다.

성 바돌로매 날의 학살은 16세기 말 위그노를 인정하지 않던 가톨릭 진영이 위그노 신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멸절 사건이었다. 16세기 프랑스 개신교는 왕권을 옹호하는 가톨릭 교회에 반발하는 귀족, 개신교의 가르침을 적극 지지하던 부르주아 상공인, 그 외 농민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가톨릭 세력은 이들을 제압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샤를 9세가 집권하던 때 섭정을 하던 실권자 까뜨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는 부르봉가의 젊은 나바르의 앙리(Henri de Navarre, 후일 앙리 4세로 등극)를 자신의 막내딸인 발르아의 마르그리트 공주(Marguerite de Valois)와 정략결혼을 성사시킨다. 결혼 날짜가 잡히자 위그노 지도자인 나바르의 앙리를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위그노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성대한 결혼식을 마치고 뒤이어 화려한 연회가 벌어졌다.

위그노 축하객들이 그들 앞에 엄청난 재앙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단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샤를 9세는 비밀리에 개최한 국왕 참사회에서 위그노들의 살해를 계획했고, 숙청대상은 콜리니 장군과 그의 호위병들, 그리고 위그노 귀족들이었다.

왕실은 위그노 진영의 군사적 수장 콜리니 장군과 그의 수하들을 왕실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판단하여, 이들을 모두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온 위그노 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왕실의 거대 음모에 무방비로 공격을 당했다.

학살은 루브르 궁전에 머물고 있던 위그노 귀족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파리의 평범한 위그노들까지 광범위하고도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다. 수많은 위그노들이 처형당하고 강물에 던져졌다. 앨리슨 그랜트(Alison Grant)와 로날드 메이요(Ronald Mayo)는 그날의 모습을 전하였다.

“무장한 군인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위그노들이 사는 집과 숙소를 치고 들어가 무방비 상태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도망가려고 하면 칼로 찌르고 총을 쐈다. 그들은 아이, 어른을 막론하고 살해하여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칼로 찔렀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은 길거리로 질질 끌고 가서 강물에 처박아버렸다.” (『프랑스 위그노 이야기』, p.47)

가까스로 파리를 탈출한 프랑수아 뒤부아(Francois Dubois, 1529-1584)가 가톨릭 교도들에 의해 벌어진 살인의 잔혹성을 훗날 상세히 기록하한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미술사에서 학살을 주제로 한 그림 중에는 프란시스 마야(Franciso Goya)의 ‘1808년 5월 3일’, 오토딕스(Otto Dix)의 ‘제1차 세계대전’, 피카소(P. Picasso)의 ‘게르니카’ 등이 있지만, 구체성과 현장감 측면에서 이 작품을 따라올 수 없다. 뒤부아는 대학살의 목격자답게 참혹한 살해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림에서는 특히 위그노들의 지도자 콜리니 장군(Gaspard de Colligny, 1519-1572)의 죽음을 자세히 다루었다. 화면 중앙 타운하우스에서는 기즈(Guise) 공작의 병사들이 콜리니 장군을 살해한 뒤 시신을 창문 아래로 던지는 장면, 그 아래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기즈 공작의 모습과 시신 훼손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박효근은 뒤부아가 콜리니 장군의 죽음 장면을 평범한 위그노들의 학살당하는 현장 한편에 위치시킨 것에 대해, 성 바돌로매 대학살이 특정인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파리의 위그노 전체를 향해 쏟아진 핏빛 광란 자체였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 분석하였다.

왼쪽 뒤쪽에는 루브르 궁전에서 나오는 모후 까뜨린 드 메디시스가 보인다. 그녀는 왕실의 학살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었는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대학살은 파리로만 그치지 않았다. 파리의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8월 24일에서 10월 5일까지 위그노들에 대한 살해와 재산 약탈 등 살육의 광기가 프랑스 전국을 삼켜버렸다. 광포한 학살로 인해 파리에서만 3천여 명, 지방에서는 최소 5천 명에서 3만여 명까지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규모의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날을 축제일과 희년으로 정하고 대학살을 기념하는 특별 기념주화를 발행하였으며, 조르쥬 바사리(Giorgio Vasari)에게 ‘성 바돌로메 날의 대학살’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프랑수아 뒤부아의 학살 그림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강력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화가로서의 기량을 총동원하여,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동료 신자들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뒤부아는 섬세한 붓놀림, 부드러운 색, 깊이와 분위기를 창조하기 위한 키아로스쿠로를 구사한 화가로, 생전에 많은 초상화와 기독교적 그림을 제작하였다.

그는 앙리 4세를 포함한 저명한 후원자들을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교체될 때마다 조석으로 바뀌는 정책 때문에 그 역시 핍박을 피해가지 못했다. 개종을 거부할 경우 어김없이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선으로 끌려가기도 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엄청 컸을 것이다.

더욱이 루이 14세에 의해 퐁텐블로 칙령이 발표되자 프랑스의 위그노신자들은 크게 동요하여 30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르는 이른바 ‘위그노 디아스포라(Huguenot Diaspora)’까지 발생하였다.

뒤부아 역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들보다 앞서 영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예술적인 작업을 계속했다.

전반적으로 뒤부아가 제작한 위그노 대학살 작품은 예술적·역사적·문화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예술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대한 역사적인 시각적 표현을 제공하며,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위그노신자들의 불굴의 신앙심, 종교적 극단주의의 위험과 종교적 관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하게 된다.

박해와 순교, 매순간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위그노 신자들은 특히 16-17세기 개신교의 예술적 발전을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위그노 예술가들은 그들의 믿음과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들의 기독교적 메시지를 삶으로 보여줬다. 또 이 작품에서 보듯 예술을 많은 사람들을 교육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위그노 미술 양식은 성경의 중요성,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종교적 이미지와 장식의 거부를 강조한 개혁교회의 가치를 반영했다.

이러한 예술 양식은 가톨릭 교회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양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으며, 그들의 경험과 신념을 반영하는 작품은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프로테스탄트의 주요한 문화적·예술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