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139:14, 17-18
일시: 2023년 2월 2일 오전 10시
장소: 송파제일교회

기독교학술원 이사장 취임식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저는 유아 시절과 유년 시절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신의주 제2교회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제가 한 살 때부터 저를 안아 주시면서 사랑하셨는데, 제가 평생토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신앙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유치부 시절 어느 성탄절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성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감동을 평생 지니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 중 네 번째 박사인 알타반 박사에 대한 성극이었습니다.

동방에서 떠난 네 번째 박사는 세 박사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던 중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던 병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준비해서 가지고 가던 세 개의 보물 중의 하나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시간을 지체하므로 세 박사들을 약속 장소에서 만나지 못했고, 베들레헴에 늦게 도착해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지도 못했습니다.

메시아이신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보물 하나는 병자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 어느 집의 아기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려는 것을 살리기 위해 써 버렸습니다. 그 후 알타반 박사는 평생토록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 애굽으로 이곳저곳으로 찾아 다녔지만, 메시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30여 년이 지난 후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는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군중들이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이제라도 메시아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군중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노예로 팔리기 위해 군인들에게 잡혀서 끌려가던 한 소녀가 알타반 박사를 향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하나 남은 보물을 그 소녀에게 주므로 그 소녀를 구해 주었습니다.

유치부 어린이였던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장면은 성극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빈 손으로 서글픈 마음으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던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가 지진으로 돌무더기에 뒤덮여 죽어가면서 들은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너는 나를 만났느니라. 네가 준비했던 보물들은 내가 모두 받았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 유치부 어린 시절 제가 들은 “알타반아! 알타반아!”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신의주에 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에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셨는데 저는 감옥에 계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과 목회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감옥에도 자주 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고난의 삶을 바라보면서, 새벽 기도와 주일 성수와 순교 신앙의 유산을 제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체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면서 살기 위해 11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일에는 영락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평생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품어 주신 아주 귀중한 스승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월남 한지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저는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대구로 가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시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12번이나 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기도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12번은 안수 기도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목사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착함과 도움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 선교의 주역이신 조동진 목사님, 사랑과 따뜻함의 목회자 정진경 목사님, 기도와 말씀에 미친 박윤선 목사님, 모두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방지일 목사님들로부터 받은 귀중한 가르침과 사랑과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북한과 연변 지역과 방글라데시와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찾아다니면서 가난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곤 했는데 강변교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동역의 손길을 펴곤 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말씀 한 마디를 인용함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시편 139편 14, 17-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4, 17-18).

저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모래보다 많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모두에게 저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