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신 글씨 예수
▲운보 김기창, ‘간음한 여인과 예수’.

본문: 요한복음 8장 10-11절

주님과 여인만 있는 장면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체포해 왔습니다. 그들은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제야말로 주님이 올무에 걸릴 상황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양심에 호소함으로 그들을 물리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절)”.

1. 안심시켜 주시는 주님
불안을 해소해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질문은 수사적 질문입니다. 아무도 없는 줄 모르시고 묻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를 돌로 치려던 자가 지금 없지 않느냐? 모두 물러가고 떠나갔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제는 안심하라”입니다. 불안에 떨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인은 “내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들켰으니 이제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구나” 몇 번이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은 순간입니다. 그저 심한 고통만 당하지 않고 죽으면 될 것이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생명을 포기하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왠일입니까? 모두 물러간 자리에 주님의 음성만 들렸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어디 있느냐?” “지금은 모두 물러가고 없지 않느냐?”는 주님의 음성만 들렸습니다. 정말이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불안해서 벌벌 떨다가 믿기지 않게 고요함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돌로 쳐 죽이겠다고 살기가 등등한 그 악머구리 같은 인간들을 물리쳐 주신 주님이십니다.

반드시 죄를 짓는 경우는 아니라 해도, 우리는 난처한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고비에 처하는 때입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안심시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보호해 주시는 주님이시라
방패막이가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난처한 상황에서도 주님은 여인을 내몰라라 하지 않았습니다. 내동댕이를 치지 않았습니다. 보호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위험에 처하면 나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속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인을 보호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문제 삼지도 않으셨습니다. 죄인의 죄를 변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열심을 묵인하지 오히려 지적하셨습니다. 남을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망하게 만드는 데만 열심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파괴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명을 파괴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여인을 보호해주시는 데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여인을 해치려는 자들의 죄를 보여줌으로써 회개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던 사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면서 회심시키신 것입니다. 약한 여인을 보호해 주시는 우리 주님이 그야말로 멋지시고 ‘짱’이십니다.

3. 치유하시는 주님
죄를 지은 사람을 치유하신다는 말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11절)”.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가 일어납니다. 주님이 여인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물론 문제를 삼지 않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서 주님은 율법을 무력화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이 여인을 처벌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서 단순히 여인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하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판단을 집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냥 여인을 달래기 위해 “담대하라 너의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고 여인의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죄가 없다고 하신 용서하신 것도 아닙니다. 치유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치유는 정죄를 하면서 야단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해하게 되면, 큰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게 되면, 상대방의 큰 허물을 덮어주게 됩니다. 아직도 우리가 누군가의 허물을 들추고 있다면,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로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4. 정리

살다가 우리는 궁지에 몰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가리움을 받는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주님을 만나서 보호의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는 안심시켜 주시는 주님을 믿게 하소서. 어떤 경우에도 보호해 주시는 주님을 믿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치유하시는 주님을 믿게 하소서.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
전 한일장신대 교수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문의: www.kocpt.com
상담: 02-2202-3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