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성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연세의대 명예교수)
▲민성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연세의대 명예교수).
페미니즘(여성주의)이란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여성의 인권을 증진하려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차원의 운동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사회가 남성의 관점을 우선시하고 있고, 여성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고 보고, 이런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하여 왔다.

페미니즘은 19세기에 여성의 참정권(투표권)을 얻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엘리트 페미니스트들의 오랜 끈질긴 투쟁 끝에 결실을 맺어, 1920-30년대 전후하여 대부분의 서국 국가들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법제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여성의 재산권이나 교육권도 개선되었다. 이 페미니즘을 제일파(1세대) 페미니즘(the first wave feminism) 또는 자유주의적 여성주의(liberal feminism)라고 부른다. 이는 법적 개선을 통해 페미니즘의 비전을 성취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이후 경제공황과 이차세계대전 등 혼란 상태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는 1948년 건국 때 정부로부터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제2파 페미니즘(the second wave feminism) 운동은 이차세계대전 이후 경제발전에 따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교육을 받은 소수의 X-세대 여성들이 새삼 모든 사회 분야에서의 남녀 불평등의 상황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50년대 이래 활발하여진 흑인 인권운동이 이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을 자극하였다. 다양한 페미니스트들과 조직들이 등장하였다.

1963년 페미니스트인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 1921–2006)이 저술 『The Feminine Mystique』을 통해 소위 “행복한 가정주부”라는 신화, 즉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려 하였다. 1966년 프리던과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the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NOW)이라는 전국적 규모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조직을 결성하고, 남녀평등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남녀 직종 구분철폐. 남녀간 동등 임금, 임신/육아 휴가, 여성에 대한 폭력 금지, 등을 위한 법제정 운동을 하였다. 그들의 정치적 수단은 기본적으로 기존 정치적 체계 내에서의 법제정을 위한 로비였으며, 기타 시위, 비폭력적 시민 불순종 운동, 성차별에 대한 소송, 신문이나 출판물 발간 등등이 포함되었다.

1968년 여성의 고용과 교육기회를 옹호하기 위한 The Women's Equity Action League (WEAL)이 결성되었다. 이어 흑인이나 다른 인종의 여성을 위한 운동, 가난한 여성을 위한 운동, 사업가 여성들이나 전문직 또는 정치인 여성들을 위한 운동 등등이 등장하였다. 어떤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낙태, 육아 같은 이슈에 집중하였다.

종합해 보면 제2파 페미니즘 운동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가졌다: ① 남녀평등을 증진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남녀간 동일한 임금, 동일한 승진의 기회, 임신과 육아에 대한 휴가, 등을 요구하였다. ②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objectification)를 반대하였다. 이는 여성을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는 것, 소유할 수 있다고 보는 것, 다른 대상과 교환 가능하다고 보는 것, 여성의 주관성이나 자율성을 부인하거나 침범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 능력 특히 발언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 여성을 신체와 외모로 파악하는 것, 등을 반대하는 것이다. ③ 여성에 대한 폭력, 특히 가정내 폭력과 결혼에서의 강간에 대해 반대하고 보호를 요구하였다. 학대받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피난처 설립 등이 이슈가 되었고, 동시에 이혼법과 양육권 등도 이슈가 되었다. ④ 일각에서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그들의 삶과 경험을 나누고 토론하면서, “성 차별에 대한 의식화"(consciousness raising) 운동이 일어났다. 여성의 해방운동에 참여에 대한 역사가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대학에 여성학(women's studies)이 시작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지역적으로 페미니스트가 운영하는 서점, 식당, 신용조합 등에서 모였는데, 여기서 페미니즘 운동의 경제적 동력도 나왔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선구적 노력들은 성과를 거두어 섹스에 근거한 차별은 점차 개선되어 갔다. 점차 페미니스트들은 인종적 정의, 성소수자 인권, 기타 관련된 경제적 정의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확대하여 나갔다. ,

한편 당시 페미니즘은 60년대 “성혁명”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해방운동”(women liberation movement)이 된다. 여기서 여성의 해방은 성해방-프리섹스-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의 해방 운동은 당시의 인권운동, 히피운동, 반전운동, 신좌파운동 등과 합류하기도 하며, 또한 남자들이나 흑인들과 연대하기도 하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에이즈의 출현으로 1980년대에 주춤해 졌다.

당시 여성의 성 해방에는 1950년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킨제이보고서와 1960년대 마스터즈의 여성의 오르가즘 연구가 영향을 미쳤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성에 대해 정신분석적 해석(vaginal orgasm)을 거부하고 킨제이와 마스터즈가 말한 음핵오르가즘을 옹호하였다. 이를 근거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성은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여성의 성이 이성애나 생식기능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성파트너 선택에서의 자율적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여성들에서도 “성혁명”의 특징인, 캐주얼 섹스(일회성 섹스, hook-up sex)와 히피적 문화가 유행하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형태의 섹스도 긍정적이고 건강한 것이며 쾌락적이기 때문에, 합의되고 안전하다면, 추구하고 실험해 보기를 권장하였다. 반면 합의되지 않은 성은 강간이나 성폭력으로 간주하였다.

60년대 성혁명적 페미니즘은 동성애 섹슈얼리티도 옹호하였다. 페미니즘에 레스비언의 이슈들을 포함시켰다. 예를 들어 1971년 NOW는 레스비언 운동에 대해 지지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어떤 페미니스트 소수 집단은 레스비언을 여성으로 보지 않아, 주류와 논쟁이 벌어졌다. 어쨌든 당시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성적 욕망과 정체성을 숨겼었는데, 이제 그런 퀴어 섹슈얼리티(queer sexuality)가 인정받는데 페미니즘 이데올로기가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생각들이 60-80년대 페미니즘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페미니스트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은 전체 여성들 중에서는 소수였다.

우리 크리스천은 성경에서 교훈하는 바,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다르게 창조하셨음과 근본적인 남녀평등을 믿는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여성의 대상화 및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옹호하는 성혁명적 프리섹스나 퀴어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다음 칼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