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적 편견 뚫고, 성경화가로
입지 확고히 굳힌 개신교 화가
흑인들 있는 그대로 보길 호소
인종차별 해답, 성경에서 발견

헨리 오사와 태너
▲헨리 오사와 태너, 벤조 레슨, 124.4x90cm, 캔버스에 유채, 1893.
흑인이라는 이유로 부득이 고국을 등지고 타국에 체류하면서 창작에 매진한 화가가 있다. 헨리 오사와 태너(Henry Ossawa Tanner, 1859-1937)는 아프리카 감리교감독교회(AME) 목사인 벤자민 터커 태너(Benjamin Tucker Tanner)와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를 획득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비밀 통로가 있어 많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북부로 탈출했는데, 그의 어머니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태너는 펜실베니아 미술 아카데미의 토마스 에킨스(Thomas Eakins) 밑에서 공부를 하면서 미술가로 소양을 쌓았다. 토마스 에킨스가 인체에 대한 세심하고도 철저한 분석을 강조한 덕에 조형적 기본기를 갖추었다. 에킨스 역시 태너의 초상화를 그려줄 만큼 그를 총애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문을 나오면서 발생하였다. 보수적인 지역사회는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과 같은 곳이었다. 19세기 말 미국에는 인종 차별이 만연해 있어, 흑인들이 예술가로 활동하기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은 파리 행이었다. 파리는 인종 차별이 심하지 않았고 미술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분위기여서 태너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는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장 조셉 콘스탄트(Jean Joseph Constant)와 장 폴 로랑(Jean Paul Laurens)의 지도를 받았다. 그들은 태너가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태너는 빛과 어둠의 효과를 살려 일상생활을 묘출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몇 년 후 미국에 단기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 발표한 작품이 <벤조 레슨>과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초기작 <벤조 레슨>(The Banjo Lesson, 1893)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바꾼 ‘트로이의 목마’(Russ Remsey)였다. 태너가 귀국하였을 때 미국의 인권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폭행을 당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태너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면 흑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릴 테지만, 이것이 그가 추구하고 가야할 길이라고 보았다.

화면에서 인자한 할아버지는 손자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벤조 연주법을 가르치고 있다. 벤조는 아프리카 전통악기를 개량해 만든 것으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악기이다.

전체적으로 그림은 우울한 분위기이지만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은 주위 분위기와 다르게 다정한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잘 연주할 수 있도록 손자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작가는 실내 두 인물에 역광을 사용하고 있는데, 빛은 벽난로에서 오는 것과 벽면에서 오는 것으로 구분된다. 두 빛은 고국인 미국과 두 번째 고향인 프랑스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읽히지만, 이 빛은 주인공들이 직면한 시름이랄까 깊은 그늘을 암시할 뿐이다. 이는 당시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모욕과 편견, 즉 암담한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트로이의 목마’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백인들은 흑인을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너는 이 작품에서 흑인을 품위 있게 그렸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로 기술을 전수하는 고상한 인물로 등장시켰다. 마치 흑인을 있는 그대로 보아줄 것을 호소하는 것 같다.

태너는 유럽에서 돌아온 후 “흑인들 삶의 진지하고 애처로운 측면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 그들에게 가장 큰 연민을 품은 사람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헨리 오사와 태너
▲헨리 오사와 태너,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사람들, 90x112.4cm, 캔버스에 유채, 1893-1894.
같은 시기에 발표한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사람들>(The Thankful Poor, 1893-1894)은 작가가 종교적인 주제로 전환하기 전 마지막으로 알려진 ‘장르’ 그림 (일상 또는 일상적인 가정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도상적으로 유사한 그림은 엘리자베스 너스(Elizabeth Nourse)의 <가족의 식사>(1891)에서 찾아진다. 엘리자베스 너스의 작품이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콜롬비아 전시회>에 출품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태너는 이 그림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너스의 그림이 한 가족을 대상으로 한 데 비해 태너는 인물을 두 명으로 압축하여 식사 전 기도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출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식탁은 초라하기만 하다. 두 개의 빈 접시와 컵, 음식이 담긴 그릇 하나가 전부이다. 비록 식탁 위에 먹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경건히 감사 기도를 드리는 중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의 비평가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한 저널에서는 그의 그림에 대한 찬사가 인종적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비난하였다. 미술사학자 너리스 우드(Naurice Frank Woods)는 이 작품이 “아프리카 미국인의 종교성을 탐구한 최초의” 회화이자, 태너의 후기 종교 그림의 ‘예고편’으로 평가하였다.

프랑스로 돌아간 후 태너는 자신의 정체성에 바탕하여 성경 화가를 전면에 내걸게 된다. “내가 종교화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물론 나는 종교적 정서를 물려받았다. 이 점에 대해 감사한다. 하지만 나는 이 정서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확신에 따라 지적인 신앙을 품기로 결정했고, 그런 신앙을 얻게 되리라 소망하고 있다.”

성경 화가가 된 데는 아버지의 의사도 얼마간 작용한 것 같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열망, 곧 그가 존경받는 성경 화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셈이다.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사람들> 이후 성경적인 서사를 다룬 작품이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과거의 태너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자굴 속의 다니엘>, <병자를 고치시다>,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나사로의 부활>, <수태고지> 등 종교적인 그림을 발표하면서 그림으로 말씀을 전했다.

“더 나아지든지 아니면 더 나빠지든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말은 그의 결연한 의지를 짐작케 한다.

화가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흑인이 사람으로 대접받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편견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우리가 그들의 참모습을 알고자 노력할 때, 우리 안에 자리잡은 타자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인 인식들을 불식시켜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성경에는 약한 사람들을 이웃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태너는 성경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자신이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답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헨리 태너는 걸출한 화가들이 경합하는 미술의 본고장에서 성경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다 1937년 파리 외곽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태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존재였으나 1969년 스미스소니언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를 통해 다시 부각되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백악관을 비롯하여 루브르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그가 추구했던 소중한 가치를 사람들에게 조용히 들려주고 있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