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정권 때 ‘비토크라시’ 심해져
지지층 선동·결집, 상대방 악마화
교회에서도 입장 다르면 적대시
자기 주장 접고, 성경 따라가야

찬성 반대 찬반 토론 대립 갈등 내편 네편 설명 언론 데모 시위 군중 흑백
▲ⓒ픽사베이
‘비토크라시(Vitocracy·거부 민주주의)’는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 교수가 미국의 양당 정치를 비판하며 만든 용어이다.

그는 2013년 공화당 내 강경파인 ‘티 파티’(Tea Party)가 오바마 대통령이 주도한 ‘오바마 케어(건강보험개혁)’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벌인 ‘재정 전쟁’이 비토크라시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미국 연방정부가 16일 동안 문을 닫는 ‘셧다운’ 사태가 발생했고, 80만 명에 달하는 연방 공무원들이 일시 해고를 당하고 주요 연방 시설물들이 폐쇄되는 등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 정치도 완전히 ‘비토크라시’ 시대를 맞이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를 지나면서 이 현상은 더욱 극심해졌다.

강경한 비판가는 문재인 대통령이야말로 국민의 대표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지지층을 대표하는 수령이자 자신이 몸담은 한 정당의 리더에 불과했다고 혹평한다.

그 결과 국민 통합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주장과 정책들을 입법화하여 차지한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적대시하였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상대 정당이 추진하는 입법과 정책을 방해하고 비난하는 이른바 ‘거부 민주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정치는 단순히 반대하고 저항하는 수준을 넘어 상대방을 무작정 비난하고 저주하고 증오하는 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비토크라시’ 정치 문화는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그동안 정치 영역에서는 진영마다 나름의 준칙들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각자 ‘아너 코드’를 설정하고 그 규칙을 지키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아너 코드’는 한 집단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 준칙임과 동시에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이기도 하다. 누구도 지키라고 강제하지 않지만, 조직의 명예를 위해 자발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이 규율을 지키는 것이라 하여 일명 ‘명예 규율’이라고 한다.

나아가 각자의 ‘아너 코드’를 지키듯 상대방의 ‘아너 코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금도의 선’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반대를 위한 주장과 투쟁을 해도 상호 존중이라는 이 ‘금도의 선’은 전체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선을 넘지 않았다.

불행히도 이 선이 무너졌다. 정치의 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적어도 상대를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해선 나름의 근거와 증거들을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이젠 무조건 ‘발사’부터 하고 본다. 그야말로 ‘아니면 말고’ 식의 정치 발언과 행위들이 난무한다.

대형사고라도 나면 무조건 발뺌을 하거나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뒤집어씌운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상대방과 대화하고 논의하여 얻어내는 결론이 아니라 지지층을 선동하고 결집하는 방식으로 여론몰이를 한다.

여기에 지지층은 사실 확인 혹은 미래 예측 판단 등의 합리적 행위를 거부하고 오로지 미리 내려진 하나의 결론을 주문처럼 외우고 복창하는 퍼포먼스에 동참한다. 사람들은 이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들과 같은 자리에 앉지도 않으려 한다고 한다.

불행히 이런 문화가 기독교회 안으로도 깊숙이 침입했다. 교회 안에도 어느새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파벌이 생겨 서로를 적대시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를 주창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의’의 대명사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들은 보수파들이 교회의 대사회적 사명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안위와 복락을 누리는 일에 매진한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진보파들은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고집하는 보수파들을 시대착오적 신앙인들이라고 폄하한다.

이에 보수파들은 이런 진보파들을 거의 ‘가라지’처럼 여긴다. 진보파들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길을 버리고 인간의 길을 달린다고 비난한다. 진보파들이 성경을 훼손하는 주범들이라고 공격한다.

청·장년의 세대 갈등은 도를 넘었다. 청년들은 장로들의 올드한 모습을 ‘구태스럽다’ 하고, 장년들은 청년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버릇없다’고 폄하한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같은 설교를 듣고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교회 일에 반대 입장을 가진다. 어느 담임목사는 이 둘을 중재하는 일이 자신이 하는 목회의 전부라고 토로한다.

사회는 전체와 부분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곳이다. 전체는 부분을 큰 울타리로 보호하고 부분은 전체가 숨쉬도록 그 안에서 작용한다. 전체는 상호 합의된 규율이자 금도의 선이다. 만약 전체의 울타리가 사라지면 부분은 각자도생으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 이 상태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뜻한다.

전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바로 ‘비토크라시’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 문화에는 정상적인 대화나 토론이 말살된다. 오직 상대에 대한 비방과 비난, 저주와 증오의 말들이 쏟아져 나올 뿐이다.

오죽하면 소비자인 국민들이 ‘가성비(좋은 성능 구매)’와 ‘가심비(심리적 만족도 비용)’를 넘어 이제 ‘가안비’, 즉 비용이 들더라도 안전함을 추구하는 심리를 가지고 살까 싶다. 그만큼 사회가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교회는 세상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곳이 아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자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이는 예배 공동체이다.

나아가 주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공포하거나 전파하고, 그 가르침대로 솔선수범하는 삶을 통해 모든 이들 앞에 모범을 보이는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인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신다.

바라건대 교회를 다시 평화의 장이 되게 하자. 모든 성도가 자신의 주장을 일단 접고, 성경에 귀를 기울이자. 성경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순종의 미덕을 보이자.

성경이 절대적인 우리 신앙과 삶의 준칙이자 ‘아너 코드’임을 명심하고 살자. 그리하여 최고의 ‘가안비’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고 살자.

개인적 소망 중 하나는 사랑하는 조국 교회가 다시 생동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부흥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다.

제발 그만 싸우고 화합하자. 비판하면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비판의 냄새는 가시지 않는다. 그만 주장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자. 목사님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설교를 경청하자.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라 행하자. 신앙은 주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다. 아멘.

최더함 박사(Th.D/역사신학, 바로선개혁교회)
▲최더함 목사. ⓒ크투 DB
최더함 목사
바로선개혁교회 담임
마스터스 세미너리 책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