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미래
예배의 미래

이강혁 | 삼원사 | 296쪽 | 13,000원

서론

얼마전 티비에서 방송인 샘 해밍턴이 나오는 토크쇼를 보았다. 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육아 방송을 하였는데, 육아를 하는 부모와 공감대를 형성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지금도 여러 채널에 소개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아기가 기저귀를 차고 물놀이는 하는데 그것이 아주 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것이고, 그것을 엉덩이에 달고 움직이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미소와 동심의 세계를 전달하였다.

토크쇼에서 사회자가 그에게 “어떻게 하면 육아방송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답하길 “자유를 주라”고 말하였다. 획기적이고 대박날 에피소드를 만들려면 의도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컨셉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목적 없이 아이가 자유롭게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발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틀에 맞추는 것보다,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놀라운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보듯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은 기계화되고 전산화된 프로그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인생은 로봇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적이고 계산된 목적이 인간의 삶을 구속하고 억압한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가? 분 단위로 짜여진 큐시트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담아내려 한다. 대중문화를 흉내내고 세속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몸짓이 담겨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라

이 책은 예배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 미학적 관점으로 우리에게 은혜롭고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믿음이 좋다는 것을 무엇인가를 외우고 지성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겼던 것을 반성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그 신비를 바라보게 한다.

아울러 자기의 꿈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예배를 비판하고,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며 하나님 자체를 누리는 예배, 그것을 넘어 창조세계 전체 회복을 향한 예배로 나아가고 있다.

사실 필자는 미학적 관점이라는 것이 생소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이 관점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정말 크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옮고 그름을 분별하고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바쁜 시대에, 미학적 관점은 타협과 협력과 공생과 조화를 추구한다. 죄란 다름 아닌 가르고 차별하고 혐오하고 분열하는 것인데, 미학적 관점은 하나됨과 조화와 통일을 추구한다.

경제개발 시대의 가치관이 경쟁과 성장과 성공이었다면, 이 시대의 가치관은 자기합리화와 자기중심성과 나르시시즘이라 할 수 있다. 지독한 개인주의와 집단적 개인주의가 죄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옳은 것이고 불리하면 나쁜 것이다. 진리의 기준은 개인이고 사실 유무는 나의 경험과 판단이다. 이런 시대정신과 사상에서 설명과 설득과 강요는 역효과만 날 뿐이고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타자성을 인정해야 하고 상대방을 향한 자기 내어줌을 통해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미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자기중심성은 인간의 죄의 경향성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 고집스럽게 살게 된다.

인간은 예배도 자기를 위해 드릴 수 있다. 사랑의 대상은 예배의 대상인데, 자기가 우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나의 얼굴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에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담으라

인간은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설명보다 이미지와 심상과 이야기를 통해 더 감동을 받는다. 우리에게 있는 치명적인 거리낌은 ‘예배는 예술적이야 한다’는 문장을 불편해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이성과 증명 중심으로 진리가 펼쳐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신앙과 예배는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개념을 교회는 잘 담아내지 못하였다. 종교개혁의 배경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흘러온 역사가 이해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소중한 유산마저 다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저자는 “개혁교회는 비단 종교개혁의 유산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 유산과 전통을 부단히 탐구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교리와 신학이 다르다고 편가르고 적화시키는 것은 잘못이고, 전체 교회가 각자의 은사와 은혜를 따라 하나되는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필자 또한 동의한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회는 이성과 논증과 윤리를 위한 시도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심미에 닿을 수 있는 목표를 생각해야 한다.

대중문화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야기와 그림과 감성적인 것들을 적극 활용한다.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다.

성경의 메시지는 차가운 논증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져 있는 거대한 서사이다. 이 뜨거운 이야기를 철학과 변증으로 풀어내기도 해야겠지만, 나의 이야기가 담기도록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언어 또한 시적이어야 할 것이다.

실제 성경은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언어보다 상징과 은유와 시가 담긴 책이다. 무엇보다 역사이고 이야기다. 우리의 예배에 구속과 구원의 이야기가 보여지도록 해야 할 것이고, 그 안에 나의 스토리가 담겨져야 할 것이다.

진리를 논증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진리가 심상에 담겨지도록 상징과 비유 등 시적 언어가 필요하다. 성경의 사랑 이야기가 나의 사랑 이야기로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 그래야 언약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좋은씨앗
▲저자 이강혁 목사. ⓒ크투 DB
축제란

저자는 예배를 축제라고 정의한다. 언약백성의 삶은 축제이고 놀이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축제란 본능을 따라 마음껏 즐기고 마시고 쾌락의 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축제란 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하고 정체성을 유지하며 미래를 향한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지난 시간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반성하고 감사하며 더 밝은 미래로 향하는 예언적인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축제이다. 붕어빵처럼 우리를 만들어내는 기계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창조물과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이요 언약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애굽왕 바로 밑에서 노예적인 삶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유와 회복을 위한 삶을 결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축제는 일상을 정지하고 잠시 주님의 발 앞에 머무르는 것이다. 내 삶에 숨 고르기를 하며 하나님과 조율하는 미학적인 시간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가 축제라는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축제와 예술이라는 말을 세속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탈이 아니라 정상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예배 가운데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찾고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아야 한다. 진리 또한 자기중심적으로 편을 만드는 경향을 경계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를 추구하며 가장 좋은 길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할로윈 축제로 이태원에서 꽃다운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움과 한숨과 눈물과 분통을 금할 수 없다. 축제는 그 시대 청년들이 억압을 극복하고 자유를 향한 발걸음인데 자유를 잃어버리고 인생을 억압당하는 장례식이 되었다.

교회는 이 시대 청년들이 축제를 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축제는 세상의 정신에 저항하는 것이고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시간이다.

결론- 하나님을 구하라

인간은 무엇인가를 찾고 갈망하게 되어 있다. 이 허기짐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열광적으로 추구한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내가 예배하는 대상인 것이고 나의 습관이 나의 영성을 반영한다. 죄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이 사랑의 대상을 선포하고 소개하는 것이고 저자는 이것을 논증보다 미학적 관점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 시대는 미를 추구하고 있을까? 필자가 볼 때 미를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편협하고 쾌락적이고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미를 추구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은 다양성과 조화와 고유함과 거룩함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미는 이기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상대적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리지 않을 것 같다.

자기가 우상이 되어서 예배하는 시대, 인간이 우상이 되면 미가 발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구할 때 풍성함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야 우리는 아름답게 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술가이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부전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