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하는 사람들, 일상의 수고 표현한 삶의 상징
노동, 자신의 필요 채울 뿐 아니라 누군가에 도움
해 지는 줄 모르고 일하는 품꾼들 모습 아름다워
‘자유로이 하나님을 위해’ 노동을 선택한 사람들
하나님 섭리 아래 사소한 일도 감사하는 사람들

같은 장소 그린 고갱 작품, 왠지 모를 불안과 수심

빈센트 반 고흐 붉은 포도밭
▲빈센트 반 고흐, 붉은 포도밭, 75×93cm, 캔버스에 유채, 1888, 푸시킨 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Red Vineyard, 1888)은 어느 가을날 저녁 햇살의 부드러운 색조와 빛을 받으며 농사일을 하는 품꾼들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자줏빛이 감도는 남프랑스 몽마르주 인근의 포도밭에서 받은 감흥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다.

“이곳의 자연은 너무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어디에서나 하늘의 둥근 지붕 밑은 모두 눈부신 파랑이고 태양은 맑은 유황빛을 찬란하게 비추지. 너무 부드럽고 사랑스러워서 마치 베르미어 그림 속의 천상의 파랑과 노랑의 조합같아 보이지. 그렇게 잘 그리지 못하겠지만 나는 너무나 사로잡혔다.” (1888. 9월)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다시 한 번 소감을 피력했다.

“붉은 포도밭, 포도주처럼 붉기만 한 그 포도밭이 저 멀리 노란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청록색으로 변하더니 또다시 비온 뒤의 땅처럼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노을빛에 반사되어 사방이 노란색으로 눈부시게 빛났다.”(1888. 10. 2)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풍경만은 아니었다. 빈센트는 포도밭을 찾으며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나타난 모로코풍 색채, 몽티셀리의 강렬한 색조로 이루어진 두툼한 임파스토, 밀레의 화면에서 지금 걸어나온 듯한 농부들을 연상했을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빈센트에게 포도밭은 여러 모로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을 소장한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서는 최근 그림이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과학적인 재료 분석을 시행했는데, 화면의 태양과 하늘의 일부는 작가가 튜브에서 캔버스로 직접 물감을 짜냈으며 온화한 느낌을 주기 위해 손가락을 사용한 것을 알아냈다. 또한 화면 오른쪽 이미지는 지금까지 강으로 여겨져 왔으나, 조사 결과 비로 축축해진 도로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추수하는 사람들의 장면은 빈센트가 일상의 수고를 표현한 삶의 상징이었다. <붉은 포도밭>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넓은 포도밭에 흩어져 포도를 따거나 주어담고 마차에 싣고 있으며, 붉은 노을은 이들의 하루일과가 끝자락으로 치닫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몽마르주의 아름다운 포도밭을 보며 빈센트는 성경의 한 장면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것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인데,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온 품꾼이나 늦게 온 품꾼이나 차별없이 관대하게 대해준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남은 사람을 끝까지 인도하시는 자비로운 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약간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이 작품에서 우리는 빈센트의 노동관을 엿볼 수 있다. 빈센트는 노동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드랜트 시절이나 누엔 시절 농부들이나 방직공들을 중점적으로 그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일하는 사람을 그린 것은 노동의 고결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헬레니즘적 사고에 따르면, 노동은 저급한 활동이고 지적인 활동만이 우월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을 지적인 데 두었기 때문에, 명상하고 사고하고 사유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두었다. 가장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여겼고, 그들은 로마의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종교개혁가들에 의하면 인간이 하는 일은 소중한 것이며, 심지어 제사장들이 하는 일에 속할 정도로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시각은 빈센트가 <감자먹는 사람들>이나 <자장가>에서 보듯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성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분리하면 우리 개개인의 삶과 그리스도의 대의에 막대한 해를 끼치게 된다고 하며 “전도나 목회나 선교 사역에 들이는 열정 못지않게 농업, 사업, 교육, 은행업에서의 성직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서 현재도 자신을 계시하며 창조적으로 일하고 계신다고 인정한다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창조적 행위로 정당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시각에서 그림을 본다면, 일꾼들은 지금 성실히 ‘노동의 성직’을 감당해내고 있는 중이다. 영화 ‘불의 전차’에 나오는 대사에서처럼 “감자껍질을 벗기는 일로도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 그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풍경이 황홀해서 또는 색상의 변화가 자연스러워서일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단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일하는 품꾼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데도 포도원의 일꾼들은 수확 일에 몰두하고 있다.

품꾼들에게 맡겨진 일은 단조롭고 사소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정성을 다하는 몸짓에서 그 일은 소중한 것으로 느껴진다. 일상적인 일, 심지어 허드렛일 가운데서 곧 “무대의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도”(Os Guiness)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런 소명의 정신을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 인간됨의 중심 동기는 우리 최고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할 수 있는지 계산하는데 달려 있다.

품꾼들이 늦도록 일한다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생각한다면 ‘초과노동’ 내지 ‘격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의 개념은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빈센트의 작품은 이런 이성적 계산을 넘어선다. 그들이 일하는 것은 돈으로 보상받기 때문이 아니라,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유로이 하나님을 위해서’(gratio pro deo) 노동을 선택한 사람들 같다.

밭을 가꾸는 일일지라도 물질계를 보살피고 가꾸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팀 켈러(Tim Keller)의 말처럼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폴 고갱 와인 수확
▲폴 고갱, 와인 수확- 인간의 비극, 73x92cm, 캔버스에 유채, 1888.
빈센트가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고갱도 같은 장소에서 <와인수확- 인간의 비극>(The Wine Harvest- Human Misery, 1888)을 제작하였는데 고갱의 그림에서는 뭔지 모를 불안과 수심에 찬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으며,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내 삶이 이처럼 엉망이 되었는지, 회의와 한탄이 묻어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포도원을 그린 것이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빈센트는 포도밭의 일하는 사람들을 석양이 지는 배경 아래 장대한 퍼포먼스의 주인공들로 나타냈다. F. 밀레의 <만종>처럼 기도하는 경건한 장면은 안 나오지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사소한 일이라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