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무오설, 성경 해석과 교리 최종 결정 권한 덕분
막강 특권 누리다 부패, 일반인들 반발로 종교개혁
에라스무스, 루터, 위클리프, 틴데일 등 성경 번역
보통 사람 사용하는 소박한 언어 사용해 읽기 쉽게

가톨릭 교리 화형
▲가톨릭 교회가 교리에 반대하는 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그림.

4. 개신교 성경
1) 가톨릭의 부패와 종교개혁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공식 성경으로 인정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독점하게 된 가톨릭 교회는 타락의 극치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교황부터 지방 소교구의 이름 없는 신부에 이르기까지 신부들의 타락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중세 1천년 동안 왕권은 교황의 위세에 눌려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가톨릭 교회는 ‘파문권’과 ‘속죄권’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쥔 부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교황이 태양이라면, 왕은 태양 빛을 반사하는 달에 불과한 것으로 비유될 정도였습니다.

특히 교황무오설은 교회에 절대 권력을 주었습니다. 교황은 성경 해석과 교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이에 따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사도들, 특히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 준하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교황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존재였고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교황이 결정하는 교리와 신조가 교회의 법이 되었고, 교황이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대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교황의 지위에 맞추어 가톨릭 신부들도 상당한 특권을 누리게 됐는데, 사회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지배 계층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례 집전과 죄 사함의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아 한 개인의 영혼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즉 이들은 교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교인들의 모든 사생활까지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교회는 세상 이권에도 손을 뻗쳤습니다. 비옥하고 가치가 있는 땅들은 대부분 교회 소유가 되었으며, 면죄부 판매를 통해 교회는 엄청난 돈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 성직자는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몸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했지만 숨겨둔 아내는 물론 자식까지 키우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동성애나 초야권까지 향유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더해 연이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동서 교회의 분열 등이 가톨릭의 혼란을 부채질했습니다. 특히 바티칸 베드로 성당 건축 때 면죄부의 강제적 판매가 일반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면죄부는 ‘과거의 죄’는 물론 ‘미래의 죄’까지 사해주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거기다 죽은 후 ‘연옥’에서 죄를 씻으며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면죄부까지 팔았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연옥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이런 부패는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의 반발을 가져왔고, 결국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에는 바로 신학의 기반이 되는 ‘성경’이 있습니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신부들이 독점해왔던 성경으로 인하여 가톨릭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교황무오설’이나 ‘교회속죄권’ 등이 제대로 검증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신부들이 독점하던 성경의 ‘대중화’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5대 정신인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다섯개의 오직(Five Solas)’도 결국 ‘성경의 대중화’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에라스무스 초상화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498-1543)이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화 ‘Erasmus(1523)’.

2) 성경 편집 및 번역
(1) 에라스무스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던 첫 시도는 에라스무스에 의한 헬라어 성경의 편집입니다. 그는 불가타 성경이 “작은 시내나 물웅덩이”와 같다면, 헬라어 성경은 “수정처럼 맑은 금을 실어 나르는 큰 강”과 같다고 비유하였습니다.

1516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이 처음 나왔을 때 이를 불가타 성경과 비교하며 읽어본 학자들은 두 성경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는 곧 불가타 성경에 대한 신뢰의 추락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 이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가톨릭 신학이 새롭게 바뀌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에라스무스가 여러 곳을 여행하며 필사본들을 수집하여 역사상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 출간한 것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 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고, ‘성경 해석의 권한’도 신부들로부터 일반인으로 해방시킨 것입니다.

비록 천주교 스콜라 신학자들은 불가타 성경이 오류가 없는 완벽한 성경이며 성경 해석 권한은 오직 전문적 훈련을 받은 신학자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시대 흐름과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이런 노력을 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성경이 세계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고 누구나 성경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 말씀을 접할 수 있기를 염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성직자들을 위한 전문 도서’가 아니라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일상 도서’로 그 위치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가톨릭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그가 가톨릭이었는지 개신교의 선구자였는지 혹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자였는지, 아직도 많은 논쟁이 진행중입니다. 어쨌든 그의 헬라어 신약성경이 성경 보는 눈을 이전과는 크게 바꾸어 놓았음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율리우스 휘브너 마르틴 루터 에크
▲율리우스 휘브너(Julius Hübner, 1806-1882)가 그린 마르틴 루터와 요한 에크의 교리 논쟁(1863-1866). 제목은 ‘Deutsch: Disputation Dr. Luthers mit Dr. Eck(1519)’.

(2) 마르틴 루터

“면죄부는 거짓말로 교인들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비판에서 출발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온전히 회개하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오직 주교에게만 주어진 거룩한 행위”라며 일반 교인들은 성경을 읽는 것 자체를 금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 주장의 핵심은 “기독교 진리가 교회의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즉 성경 자체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교인들은 성경을 읽고 바르게 이해하여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당시에는 90%가 넘는 인구가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그는 학교를 세워 글 읽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독일어로 직접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1522년 ‘9월 성경(September Testament)’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성경이, 다음 해 구약성경이 발간됩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그렇게 완벽한 것이 되진 못하였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가 언어학자가 아니었고 성경의 무대가 되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녀나 농부 등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말로 번역된 그의 성경은 불가타 성경의 1/100도 안 되는 매우 싼 가격으로 보급되어, 누구나 쉽게 구입하여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목말라 있던 독일인들의 호응으로 이 성경은 루터 사망 시까지 모두 350판이 인쇄되었을 정도로 독일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기에 사용된 독일어가 수많은 사투리를 사용하던 독일의 표준어로 정착되는 부수적인 효과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독일어 성경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

이 성경을 통하여 일반인들은 가톨릭의 부패와 종교개혁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독일이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는 선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 해석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신학은 아직도 여러 개신교파들 사이에 논쟁 중이며, 그의 성경에 대한 해석, 특히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울과의 차이로 야고보서는 “복음적인 성격의 것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알곡이 없는 볏]짚단 같은 편지”라고 혹평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 대하여는 ‘속죄’에 대한 설명의 부적절성 때문에 자신의 성경에서 뒷부분에 배치하여 “거리를 두고 대하여야 할 책 중 하나”로 취급하였습니다.

이처럼 비록 루터의 구체적 신학에 대하여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가 제창하였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근본 정신은 모든 개혁주의자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왔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개자(즉 제사장이나 신부들)를 통한 소통’이 아니라 ‘당사자 간의 직접 소통’으로 바꾼 것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형식적인 제사로부터 내면을 성찰하는 삶’으로 승화시키신 신앙을 루터가 ‘대리인을 배제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만인 제사장론)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내거는 마르틴 루터.

(3) 가톨릭의 반동

이처럼 종교개혁은 성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톨릭과 개신교가 나누어집니다. 가톨릭은 성경보다 교회 전통을 더 중시하였고, 일반인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 말씀이며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성경을 모든 지방 언어로 번역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가톨릭은 불가타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하였고, 이를 어긴 사람들은 모두 파문시켜 화형과 같은 엄한 벌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이런 협박과 박해를 극복하는 과정이 곧 종교개혁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은 독일과 달리 교황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였는데, 그런 만큼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을 때 그를 보호하여 준 사람이 바로 작센의 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로, 이는 신흥 왕국들과 교황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중세 제도의 핵심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무역의 발전으로 새롭게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은 새로운 제도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호응한 것이 각 지역의 신흥 왕국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교황청과 멀리 떨어진 변방의 독일은 푸대접을 받았고, 이에 따라 교황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분위기가 훨씬 더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과 달리 교황청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으며, 따라서 가톨릭 교리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화형과 같은 엄격한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영국 왕가는 왕위 계승 문제부터 시작하여 결혼 문제에 이르기까지 교황청의 허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에 반대하는 교리를 주장하거나 교황청의 권위를 훼손하는 자들에게는 자비 없는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존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 ⓒ위키피디아

1] 위클리프의 영어성경 번역

이런 과정에서 가톨릭의 권위에 저항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름이 바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입니다. 일찍부터 교황청의 부패와 편협한 가톨릭 교리를 비판했던 그는 사제들만이 읽을 수 있었던 불가타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밭을 가는 시골 농부들’까지도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인들이 성경 읽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켰는데, 특히 1052년 동서 교회가 분열된 이후 일반인들이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여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대중화시킴으로써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링컨 대통령은 위클리프의 이 말을 인용하여 민주주의 정신을 대표하는 원칙으로 만들었지만, 위클리프는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는 1380년 신약을 번역하였고, 1382년 구약까지 번역하여 성경 전체를 필사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번역을 금하는 교회법을 어긴 죄목으로 이 성경은 1415년 이단 판결과 함께 불태워 없어졌고, 1428년에는 시신조차 무덤에서 파헤쳐져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위클리프 번역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는 불가타 성경을 기반으로 번역을 하였다는 점과,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 대량으로 출판할 수 없어 일반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직접 끼치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종교개혁에 대한 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또 이후 영어 성경들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윌리엄 틴데일 번역 영어 성경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영어 성경.

2] 틴데일의 영어성경 번역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은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은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의 성경을 참조하여 1526년 영어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이 영어로도 번역되어야 한다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해 가면서 성경 출판에 힘썼던 신학자이자 출판가였습니다. 그는 신부들조차 성경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하나님 말씀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영어 번역 성경이 필수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허락 없이 성경을 번역하게 되면 파문과 동시에 화형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번역을 어느 누구에게 일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 주저함 없이 성경 번역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암울한 영국을 떠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독일에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의 번역은 라틴어를 토대로 한 위클리프와 다르게,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틴데일 성경 교수형
▲틴데일의 교수형 장면을 묘사한 그림.

그러나 누구도 번역된 그의 영어 성경을 출판하기를 꺼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출판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인쇄된 성경을 여러 통로를 통하여 영국으로 몰래 들여왔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의 성경 밀수는 발각되어 모두 소각당하였고 현재는 단 2권만 남아 있습니다. 그후 도망자 생활을 하던 틴데일은 마침내 체포되어 1536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파문을 당한 뒤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틴데일의 영어 성경은 원문 성경을 이용한 영어 번역이라는 점과 최초로 인쇄된 영어 성경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또 그는 루터처럼 보통 사람들이 쓰는 소박하고 단순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읽기 쉽게 번역하였고, 위클리프를 따라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 어휘 특히 신학 용어가 부족한 영어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틴데일 사후 10년 뒤 마일스 커버데일(Coverdale, 1488-1596)이 틴데일 영어성경에서 완성하지 못한 부분까지 보충하여 1535년 최초의 완역된 영어 성경을 출판하였습니다. 틴데일 성경은 제네바 성경, 킹 제임스 성경 등 이후 출간되는 영어 성경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계속>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