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공용어된 헬라어로 성경 번역 열망 강해져
디아스포라 유대인, 히브리어 구사 능력 상실해
사해동포주의 따라, 제국 일원으로 번역 시작해

칠십인역 Codex Vaticanus
▲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Codex Vaticanus.

3) 헬라어 성경의 필요성

비록 헬라어가 국제 공용어가 돼 의사소통에는 제약이 없어졌지만, 우상숭배를 금하는 유일신 신앙 때문에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개방적인 포용정책으로 인하여, 거대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일자리와 박해 없는 환경을 제공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던 이곳에서 많은 헬레니즘 유대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또 헬레니즘 유대 문학이 꽃을 피웠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돼야 한다는 열망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B.C. 586년 전쟁 포로로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래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예루살렘 땅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대교라는 종교적 관습 속에 살아왔지만, 모국어를 잊어버린 지금 히브리어로 쓰여진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알렉산더의 사해동포주의에 따라 더 이상 전쟁 포로가 아니라, 제국의 당당한 일원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삶의 안정을 찾게 된 유대인들은 이제 신앙의 질도 함께 추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성경 번역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방 문화들에 대한 존중 정책이었습니다.

필라델푸스 2세, 유대 학자 72인에게 번역 요청
번역 과정,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통해 알려져
칠십인역, 예수님 당시 히브리 성경보다 보편적

4) 칠십인역(Septuagint, LXX)의 탄생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칠십인역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번역에 참가한 유대 학자들(혹은 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 모두 70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헬라어 번역에 참가하였는데, 편의상 ‘칠십이인역’이라 하지 않고 간략하게 ‘칠십인역’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필라델푸스 2세(B.C. 285-247)는 유대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모두 72명의 학자들에게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필라델푸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 항구 도시에 있는 도서관에 각 민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책들을 모아 보관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The Great Library of Alexandria’라는 제목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상상화. 19세기 독일 화가 코르벤(O. Von Corven)이 당시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재현했다. ⓒ위키

이 도서관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유명하였는데, 유대 민족 중에서는 구약 율법이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방대한 작업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하여 셀루쿠스 왕조와는 대조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다양한 지방 문화에 대하여 얼마나 관대한 정책을 펼쳤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이 번역 과정을 매우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데, 편지 내용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리스테아스라는 유대인이 쓴 이 편지는 어느 정도 미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12지파에서 6명씩 모두 72명의 유대 학자를 초청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현실과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B.C. 722년 앗시리아로 잡혀간 북이스라엘의 10지파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지금도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의 진위와 내용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존재하지만, 이 무렵 비록 조잡하지만 이미 많은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이 유대인들 사이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통일된 번역본이 요구됐을 것이고, 이 요구가 프톨레미 왕국의 정책과 맞물려 공식 번역 작업 혹은 기존 번역물들의 수정 및 편집 작업이 진행됐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헬라어 번역에 대한 절대적 필요성이었습니다. 이런 여구에 따라 번역된 칠십인역은 예수님 당시 히브리어 성경보다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미 히브리어의 뿌리인 아람어와 더불어 헬라어가 국제 공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예수님 제자들도 히브리어 성경 대신 헬라어 성경(즉 칠십인역)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쓴 신약성경을 분석해 보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칠십인역을 자주 인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말씀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인용한 경우가 1/3이 채 안된다면, 칠십인역에서 인용한 경우는 2/3 이상으로 그 두 배가 훨씬 넘습니다. 이는 1세기 당시 칠십인역이 유대인들에게는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얼마나 널리 사용됐는지 잘 보여줍니다.

렘브란트 토빗과 안나
▲외경(外經) 토빗서에 등장하는 ‘토빗과 안나’. 렘브란트 작품이다(1626년,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왕립박물관). ⓒ크투 DB

히브리어 39권 외 신구약 중간기 쓰인 ‘제2경전’
유대인들,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최종 제외시켜
초기 교부들 위경에 다양한 의견, 정교회는 제외

3. 가톨릭 성경

1) 초대교회의 헬라어 성경 사용

칠십인역에는 마소라 필사본에 나오는 히브리어로 된 39권, 즉 기독교 성경에서 ‘구약(Old Testament)’이라 부르는 성경 외에 몇 권의 책이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개신교는 ‘외경(Apocrypha)’, 가톨릭은 ‘제2경전(Deutero-Canon)’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모두 신구약 중간기에 쓰여진 것으로,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번역본을 제외하고 처음부터 헬라어로 쓰여진 이 부분을 과연 성경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를 신성한 하나님의 언어라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마침내 헬라어로 쓰여진 부분을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과 구별하여 정경(Canon), 즉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성경’ 목록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 최종 결정은 A.D. 90년(혹은 85년)경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바리새인들의 대표들이 모여 내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결정은 기독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 헬라어 기록 부분을 성경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전개됐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모습이 현존하는 칠십인역 필사본들에 반영돼 있는데, 모두 위경 부분에 대해 서로 다른 리스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 교부들도 위경에 대하여는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했습니다. 대체로 동방정교회 교부들은 성경에서 외경 부분을 제외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방 교회(가톨릭) 교부들은 얌니아 종교회의 이전 전통대로 외경을 성경에 그대로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제롬 히에로니무스 라틴어 불가타
▲제롬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장면을 그린 성화.

2) 외경에 대한 논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난 다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A.D.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그리고 A.D.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많은 논란 끝에 가톨릭의 의견에 따라 위경도 정경에 포함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논란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A.D. 1517년 카톨릭의 부패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위기 의식을 느끼던 가톨릭은 1546년 트리엔트 종교회의를 열어, 위경의 정경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성경의 권위를 갖는 ‘제2경전’으로 계속 사용하게 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미 초기부터 위경을 정경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혀왔지만,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자 가톨릭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A.D. 1672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일부 위경을 성경에 포함시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추가된 부분을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 39권만큼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역사적으로 ‘제2경전’에 포함되어야 할 책 리스트를 공식 결정한 바가 없었기에, 정교회 내 각 교파들은 외경 중에서 나름대로 선택하여 성경에 준하는 책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가톨릭 제2경전에 나오는 책 외에도 10여 권의 책들을 더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도 외경에 대하여는 동방정교회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한국과 연관성이 별로 없고, 지역이나 교단에 따라 위경을 인정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따로 자세히 거론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로 쓰여져 구약 39권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가톨릭 ‘제2경전’에는 포함된 책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체: 마카비 상/하, 지혜서, 집회서, 유딧서, 바룩서, 토빗서
부분: 에스더 10:4-16, 다니엘 3:24-90, 13-14장

신약성경을 분석해 보면 구약의 많은 부분을 칠십인역에서 인용하였지만, 이 외경들로부터는 어떤 책 이름이나 내용도 인용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마르틴 루터는 이 외경들을 “정경과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으나 읽으면 유익한 책”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 특히 마카비 상·하는 신구약 중간기 때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가치가 있는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처럼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은 아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제롬 히에로니무스 라틴어 불가타
▲카라바조(Caravaggio)가 그린 ‘성경을 기록하는 제롬(Saint Jerome Writing, 1605-1606)’.
가톨릭 카르타고 회의, 위경도 정경 포함 결정해
제롬 라틴어 번역한 ‘불가타 성경’, 정본 인정돼
라틴어 모르는 일반 교인들 성경 접근 어려워져
성경보다 전통 의지, 신부들 말씀 독점은 부패로

3) 라틴어 성경 번역

가톨릭의 제2 경전에 대한 논란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제롬이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이후입니다.

제롬은 처음에는 위경들의 성경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위경이 성경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위경이 공식적으로 성경 지위를 갖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제롬이 A.D. 405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a) 성경’ 때문입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여러 종교회의에서 오류가 없는 완벽한 성경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동시에 이 번역본에 나오는 외경들은 모두 정경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제롬의 불가타 성경으로 인하여 가톨릭은 외경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고, A.D. 1546년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다시 한 번 가톨릭의 공식 성경으로 추인받게 됩니다.
제롬의 번역본이 가톨릭의 공식 성경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배후에서 조종했던 로마 제국의 황제 역할도 매우 컸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 제국 황제들은 제국 내에 혼란을 가져오는 기독교의 분열을 원치 않았고, 따라서 신학은 물론 성경조차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일사불란한 것으로 통일시키기를 원하였습니다.

천재적 능력의 소유자였던 제롬에 의해 라틴 번역본인 불가타(Vulgata) 성경이 나오자 이 성경은 점점 힘을 얻어갔으며, 마침내 이 번역본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번역된 완벽한 성경’이라 하여 기존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성경조차 모두 불태워 버리고 강제로 오직 라틴어 번역 성경만 사용하도록 하여, 끝없이 펼쳐지던 정경 논쟁을 종식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 불가타 번역본에는 ‘제2경전’이 포함되어 있어서 지금까지도 성경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또 제롬의 라틴어 성경을 다른 어떤 언어로도 번역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습니다. 이는 교회의 권위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는데,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교인들이 신앙의 근거를 성경이 아닌 교회 전통에서 찾도록 만든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에 준하는 위치(실질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라틴어 성경’보다 ‘가까이 있는 교회 전통’에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톨릭 내 독점적 권력이 됨)로 올려준 이러한 조치는 교회 권위를 주관하는 신부들이 하나님 말씀의 독점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부들의 말씀 독점은 결국 교회의 부패로 귀결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