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종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아
유대인 구약, 사마리아 모세오경만 인정
다양한 성경, 역사적 형성 과정 파악부터

히브리어 텍스트 유대인 히브리서 책 문자 구약 성경
▲히브리어 글자들. ⓒ픽사베이

1. 들어가는 말

1) 성경의 중요성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신학 논쟁이 있어 왔는데, 그 논쟁의 결과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교파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신학적 논쟁은 대부분 그 주장의 근거를 성경에 찾았고, 성경을 가장 잘 이해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대변하는 교파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결국 모든 신학적 논쟁은 성경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결론도 성경에 기반을 두고 내려져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이루고 있지만, 성경 자체의 역사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우리는 단지 주어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우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건네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인류 역사와 함께 형성되어 우리 손에까지 전하여진 것입니다.

물론 구속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하에 있는 것처럼, 성경의 전수도 하나님의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수 과정을 정확히 모르면, 어떤 성경이 하나님이 전하여 주신 참된 성경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어떤 성경’이라는 표현에 깜짝 놀라는 독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종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현재 전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성경들은 그 범위나 또 포함하는 내용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운보 김기창 사마리아 여인
▲운보 김기창(1914-2001) 화백의 ‘사마리아 여인’. 1952-1953년, 76×63cm, 비단에 수묵채색. ⓒ운보문화재단

2) 유대인 성경과 사마리아인 성경

예를 들면 유대인들의 성경과 기독교인들의 성경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기록인 ‘신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구약’만을 하나님 말씀이라 믿고 있습니다. 또 구약만을 성경이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사마리아인들은 오직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성경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간의 대화입니다.

예수님 당시 모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똑같이 성경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해석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알기 전 먼저 사마리아인들의 역사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들도 유대인이라 믿었던 사마리아인들은 B.C. 722년 앗시리아에 의하여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대신 그쪽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북이스라엘로 강제 이주되어 살았던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병자나 천민 같이 앗시리아 포로에서 제외된 북이스라엘 하층 백성들과 섞여 살면서, 남유다의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남유다 백성들은 개종한 이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율법을 왜곡하는 자들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종교 혼합주의에 빠진 이방인만도 못한 사람들이라 비난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남유다 백성들을 편향된 신앙관을 가진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사람들이라 비난하였습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 서로를 배척하는 전통은 예수님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 신앙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입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5)”.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역할’을 말하고 있는데,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개념은 유대인들과 다릅니다. 즉 이 여인은 메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단지 ‘메시아가 올 것’과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에 단지 메시아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런 이해는 바로 가나안 입성 직전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준 마지막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사마리아 여인은 모세의 이 가르침에 따라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아가 와서 (모세처럼) 자신들이 행할 모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을 기대하고, 언제든 ‘메시아의 말을 들을 준비’가 돼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러한 태도는 유대인들처럼 구약 선지서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모세오경에만 기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의 태도에 대하여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모세오경에만 의지하는 사마리아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구약 사본
▲최근 이스라엘에서 발굴된 성경 사본 조각 모습. ⓒIAA, Shai Halevi
3) 성경의 선택

이처럼 신·구약 시대에도 성경은 단 한 종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선택에 따라 신학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시대와 신앙에 따라 다양한 성경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늘 사용하여 왔던 성경만 유일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다양한 성경이 존재한다는 현실이 조금은 충격적일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떤 성경이 올바른 것인지 또 어떤 성경을 선택할 것인가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선택하기 전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어떤 성경이 더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혹은 더 가까운 것인지 판단하기 전에 먼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서로 다른 성경이 형성됐는지 파악하는 것이 선행돼야 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다양한 성경들을 다 비교하는 것보다, 2022년 제505주년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간략하게 가톨릭 성경과 개신교 성경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서로 다르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바벨론 귀환자들 의해 마지막 완성
역대기 상/하와 말라기 가장 늦게 쓰여져
B.C. 400년 이후 400년 간 하나님의 침묵

2. 신약시대의 도래

1) 구약시대의 종말

(1) 구약성경의 완성

구약성경(즉 히브리어 성경)은 B.C. 400년 무렵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자들에 의하여 성경의 마지막 부분(성문서, Writings)이 완성되면서 닫혀지게 됩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때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종교 자치 국가는 제사장에 의해 통치되는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때 쓰여진 성경들은 왕국의 관점이 아니라 제사장의 관점에서 쓰여지게 됩니다.

바벨론 귀환 후 제사장의 관점에서 쓰여진 가장 대표적인 책이 바로 역대기 상/하입니다. 대체로 쓰여진 순서대로 편집되었다고 믿어지는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가장 뒤에 위치한 역대기가 구약 중에서 가장 늦게 쓰여진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물론 말라기도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나, 증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시점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에스라-느헤미야를 쓴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제사장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쓴 것이 바로 역대기 상/하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The Great Library of Alexandria’라는 제목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상상화. 19세기 독일 화가 코르벤(O. Von Corven)이 당시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재현했다. ⓒ위키
알렉산더 사해동포주의, 유대 민족 이주
헬라어 공용어 지정, 국제 공용어 탄생해
신약성경 헬라어로, 복음 전파 일등공신
단문 위주 요한복음, 헬라어 수준 보여줘

(2) 바벨론 멸망과 페르시아 출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5만여 명의 소수였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빌로니아 왕국이 페르시아에게 망하였기 때문입니다.

통일국가 초대 왕이었던 고레스는 B.C. 539년 바벨론을 무혈 접수하고 난 이듬해 칙령을 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왕이 존재하는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 페르시아 한 지방 행정지역(Province)에 속한 곳으로, 단지 종교적 자치권만을 보장받은 자치단체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을 실질적으로 다스렸던 사람들은 왕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스룹바벨은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 제1차 포로 귀환을 주도하였고, 성전을 재건하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 완공 이후 스룹바벨의 행적에 대하여는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아마 이스라엘이 하나님 언약에 따라 다윗 왕가가 다스리는 독립국가를 꿈꾸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미리 예방 차원에서 스룹바벨을 다시 바벨론으로 소환하였거나 살해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는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이 제사장이 다스리는 가운데 저물어 갔던 것입니다. B.C. 400년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시대를 보통 ‘신구약 중간기’ 혹은 ‘신구약 침묵기’, 심지어는 ‘신구약 암흑기’라고도 부릅니다. 신약과 구약 사이 약 400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하나님 말씀이 단 하나도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알렉산더 대왕 전투 모습을 그린 벽화. 폼페이에서 발견됐다. ⓒ위키

2) 알렉산더 대왕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약 시대 출현을 앞당긴 것은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입니다. 마케도니아라는 조그만 왕국의 왕자였던 알렉산더는 20세에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복 전쟁을 펼쳐 그리스 전 지역을 통일합니다. 그리고 B.C. 33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와 전쟁을 시작해 331년 바벨론을 무너뜨림으로써, 만 25세의 어린 나이에 동서양을 통합하는 왕국을 건설하는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멸망과 그리스 제국의 출현은 이스라엘 역사에도 크게 영향을 줍니다. 비록 페르시아 점령 후 7년밖에 통치하지 못했지만, 알렉산더가 세계를 통일한 후 펼쳤던 정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경과 관련된 두가지 중요한 사건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해동포주의

알렉산더의 정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입니다.

통상적으로 피정복민들은 정복자들로부터 많은 제약과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피정복민들을 차별하지 않았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동서양 통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지중해 시대’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부의 축적 기회’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지중해 지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피정복민을 차별하지 않는 역사상 초유의 대화합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덕분이었습니다. 철학자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보통 전쟁 노비로 삼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파격적 대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이런 열린 정책은 그리스 제국의 문화가 오랫동안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이질적인 다양한 문화들과 충돌하지 않고 서로 동화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중해 지역 중에서도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애굽에 있던 알렉산드리아라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 다음 가는 큰 도시로, 애굽의 식량을 로마로 운송하는 로마 제국의 전략적 항구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필라델푸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필라델푸스 2세 얼굴이 조각된 금화.
특히 알렉산더 사후 분열된 왕국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헬레니즘뿐 아니라 지방 관습이나 종교도 함께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가는 곳마다 ‘무신론자’로 핍박받던 유대인들에게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던 알렉산드리아는 매우 매력적인 도시가 됐고, 헬레니즘과 결합된 새로운 유대 문화를 꽃피우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라는 유일신만을 섬기던 유대인들은 종교의 특성상 우상을 섬기는 다른 어떤 종교의 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이방인들을 종교행사에 초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당시 수많은 신들을 믿는 다양한 민족들 속에서 홀로 고립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오직 한 신만을 믿는 무신론자’라고 낙인이 찍혀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박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박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유대인들의 안식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2) 헬라어 공용화 정책

알렉산더 대왕의 두 번째 두드러진 정책은 헬라어를 그리스 제국 공용어로 지정한 것이었습니다. 광활한 제국 내에서 너무 많은 지역 언어가 사용되면 통치에도 막중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문서는 반드시 헬라어로 만들어져야 법적 보호를 받게 했는데, 이런 공용어 정책은 헬라어가 제국 내 모든 지역 구석구석에 퍼질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고전 헬라어(Classical Greek)는 문법이 복잡하여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또 페르시아를 정복한 대부분의 그리스 병사들은 정확한 헬라어를 구사하는 학식 있는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석판
이러한 이유들로 헬라어 문법이 보다 사용하기 쉽게 단순화됐고, 헬라어 발음도 매우 쉽게 배울 수 있는 대중 언어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경 기록에 사용된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 Common Greek)’로, 넓은 그리스 제국에 살고 있던 다양한 민족들이 보다 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정책이 긍정적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에서 문학과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을 정확하고 다양하게 전달할 수 있는 고전 헬라어의 장점인 문법과 표현 기법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전 헬라어가 대중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런 장점들은 사라졌고, 여러 가지 언어들의 요소가 혼합돼 약간 정체불명의 언어로 재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쉽게 습득할 수 있도록 진화된 ‘코이네 헬라어’는 제국 시민이면 누구나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국제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이 대중화된 헬라어가 바로 신약성경에도 사용된 언어입니다. 이 헬라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상적으로 사용하여야 했는데, 이런 이유로 신약성경이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고레스 바벨론 바사 왕국 페르시아 무덤
▲현재 이란에 위치한 키루스 2세, 고레스 왕(Cyrus)의 무덤. ⓒ위키
그러나 베드로나 요한 같은 가난한 어부 출신 제자들은 헬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매우 짧은 단문 위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요한의 헬라어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또 헬라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던 베드로도 실루아노의 도움을 받아 구술한 것을 헬라어로 옮겨 쓰도록 하였습니다(벧전 5:12).

이처럼 헬라어가 그리스 제국의 공용어가 되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헬라어를 배워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헬라어의 국제 공용화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체에 전파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쓰던 라틴어는 매우 어려운 언어였고, 이미 그리스 제국을 통해 헬라어가 국제어가 돼 있었기에 로마 제국은 헬라어를 공용어로 계속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복음이 히브리어로 기록돼 히브리어로 전파돼야 했다면, 오늘날처럼 복음이 전 세계에 널리 전파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지녔더라도 헬라어에 정통하지 못했다면, 소아시아나 유럽에 그렇게 많은 교회를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호흡하며 전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록됐다면, 오늘날 우리는 헬라어를 배우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어가 공용어가 됐기 때문에 복음의 역사가 유럽을 통해 땅 끝까지 퍼져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