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중생의 복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야훼 종교(Yahweh religion)에 매몰된 사람들이었다. 특히 지배 계층이었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그것의 전형(type, 典型)이었다.

그들 가운데 후에 기독교에 입문한 이들 중에는 이 ‘야훼 종교’의 잔상(殘像)을 떨쳐버리지 못해 혼합적인 ‘유대교적 기독교(Jewish Christianity)’로 흐른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땐 기왕의 바탕위에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듯 했다.

그들은 기왕의 주류였던 유대교를 기독교 안에 녹여냄으로 극한 갈등을 조장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타협과 조화로움’은 성숙의 표지처럼 보인다. 지금도 범(凡) 세계적으로 이들의 후예가 잔존한다. 샌더스(E.P. Sanders)의 영향 아래 있는 소위 ‘신율주의자들(theonomy)’이 그들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기독교 복음은 코페르니쿠스적(Copernicus)인 대변혁이다. 그것은 이전 것을 모두 부정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를 ‘유대교’의 연장선상에 두거나 둘을 서로 조화시킬 때 ‘복음의 원형(the archetype of the Gospel)’은 파괴된다.

이전의 존재기반을 부정하고 ‘전혀 다른 존재로의 변환’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중생(regeneration, 重生)’ 교리는 이러한 복음의 ‘초월적인 비타협성’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복음의 ‘비타협성’에 대한 요구는 성경에서 여러 ‘상징’으로 표현됐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찌니(레 2:11)”.

또 복음이 다른 것과 섞일 때 못쓰게 되는 파괴적인 결과도 말씀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눅 5:37)”.

이런 복음의 ‘비타협성’이 당시 주류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불러 온 것은 자명하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는 말씀은 유대교 가족의 일원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는 나머지 가족들과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나아가 이런 ‘복음의 비타협성’은 당연히 타협적인 ‘유대교적 기독교(Jewish Christianity)’와의 갈등도 유발시켰다. 둘의 갈등은 초대교회 안에서 점점 첨예해져 비등점(boiling point)에 이르렀고, 급기야 이 갈등을 조정하고자 ‘예루살렘 공의회(Council of Jerusalem, 행 15:1-29)’가 소집됐다. 몇 가지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에 삽입하여(행 15:25) 복음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초월적인 ‘그리스도 복음의 출현’은 ‘전혀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 아니다. ‘단일신론적인 유대교’로 변질되기 이전 아벨, 노아, 아브라함, 다윗이 가졌던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로의 회귀’였다. 예컨대 ‘개신교회의 출현’이 ‘전혀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 아닌, ‘로마 천주교’로 변질되기 이전 ‘바울 신앙에로의 회귀’인 것과 같다.

◈전혀 새로운 경건 유형

야훼 종교에 몰입돼 있던 2천 년 전 이스라엘에 예수님의 출현은 일대 충격이었다. 이는 그의 ‘범상치 않음’과 ‘기존의 틀을 깨는 파격’이라는 양면성 때문이었다.

그의 ‘권세 있는 가르침(마 7:29)과 능력(눅 4:36)’은 그가 그리스도일지 모른다는 ‘기대감(expectation)’을, ‘기존의 틀을 깨는 그의 파격’은 ‘미심쩍음(suspiciousness)’을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확장계승자(expansion- successor)’든지, 아니면 적어도 ‘유대교와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였는데,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 외엔 그것들과는 합치점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조상들의 유전(ancestral traditions)’을 타파했다(마 15:1-3). 물론 그는 난 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 눅 2:21)를, 40일 만에 결례(purification, 눅 2:22)를 행했고, 십계명을 비롯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모든 율법과 계명들을 다 지키셨다(이는 그가 ‘율법 아래 난 자(갈 4:4)’로서의 개인적인 의무를 한 것이지 ‘능동순종자들’이 말하는 그런 뜻으로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에도 사람의 병을 고치심으로 ‘조상들의 유전을 파기‘했으며(율법 파기가 아님), 그것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12)”,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막 2:27)”며 오히려 그들을 책망했다.

‘예배’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이 대대로 예배 장소로 삼아왔던, 그리심산(Gerizim Mt, 혼족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처소)이나 예루살렘(Jerusalem, 유대인들의 예배 처소) 같은 공간적 개념들은 타파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새로운 ‘예배 타입’을 제시했다(요 4:20-21).

그의 ‘기도의 패러다임(paradigm)’ 역시 유대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기도에 힘쓰셨지만 형식과 틀에 매이지 않았다. 예컨대 당시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삼시기도(prayer three times daily, 행 3:1, 눅 10:9)’ 같은 것도 쫓지 않으셨다.

그는 새벽에 습관을 쫓아 기도했고(막 1:35, 눅 22:39), 낮(눅 9:28)과 밤(마 14:23, 눅 21:37)에 기도하셨고, 바쁜 사역 중에도 기도의 욕구가 일 땐 모든 것을 다 물리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서 기도하셨다(눅 5:15-16). 그의 기도는 성령 안에서 무시로 드려졌다.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높이 쳐주던 ‘금욕과 고행’같은 것도 쫓지 않으셨다. 엄격주의 ‘에세네파(Essenes)’의 일원이었던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일 수 있다는 기대감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것은 세례 요한의 그것이 ‘율법’과 ‘금욕’을 중시하던 당시 유대교적 분위기와 맞아 떨어진 때문으로 보인다.

예수님에겐 세례 요한 같은 엄격함이 없어,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그리스도 같았다. ‘산헤드린(Sanhedrin) 공의회’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것도(요 1:19-28, 마 12:2-6) 이 때문이었다.

‘금식’에 있어서도 그는 어떤 형식이나 규례에 매이지 않았다. 그는 “이레에 두 번씩(눅 18:12)” 하는 유대교의 금식 규례를 따르지 않으셨다. 그는 생애 중 단 한 번 40일 금식기도를 했는데, 공생애(共生涯) 출발을 하면서 앞으로 직면할 시험들을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그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는 세간의 평을 들었다.

◈죄인의 복음

유대의 ‘야훼 종교가들(Yahweh religioner)’은 다 ‘의인됨’을 추구했다. ‘의인들(?)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누가 더 의인인가’를 뽐내는 ‘의(義)의 경연장’이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며 자기 의(義)와 우월감에 도취되는 장면(눅 18:11-12)은 당시의 그런 경향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0-12)”.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의인들의 주’가 되길 원치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의 질시를 받던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 그러다 보니 그가 머무신 곳도 예루살렘이 아닌, 당시 기층민(基層民)들의 집산지인 ‘갈릴리 나사렛’이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받던 여리고의 세리 삭개오(눅 19:1-9)를, 남편이 다섯이었던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 구원해 주셨다(요 4:7-29). 또 평생 극악무도한 악인으로 살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를 영접해 주고 그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셨다(눅 23:43).

이에 반해 자·타칭(自他稱) 의인이라 칭한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해선 ‘마귀의 자식(요 8:44)’, ‘지옥 백성(마 23:13-15)’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런 그의 이분법(二分法)은 소위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복음주의자들’의 ‘가진 자에겐 증오를 못가진 자에겐 연민’라는 슬로건 같은 것이 아니다.

이는 그가 ‘자신이 죄인의 구주’시며, ‘자칭 의롭다고 여기는 위선자에겐 심판자가 되신다’는 일종의 ’자기 계시‘였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각기 다른 두 가지 기대를 나타냈다.

’죄인들‘은 그가 ’자기들의 의(義)와 구속자(고전 1:30)‘이길, ’의인들‘은 그가 자신들을 더욱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모범자‘이길 기대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기대는 오늘도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는 항상 둘로 갈려진다.

’죄인‘에겐 ’구주‘로, ’의인‘에겐 ’심판자‘로 나타나신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는 ’불변의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구주‘인가? ’심판자‘인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