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 The Scribe 루드비히 도이치 Ludwig Deutsch
▲유대인 화가 루드비히 도이치(Ludwig Deutsch)의 서기관(The Scribe, 1894).
본문: 로마서 9장 30-33절

바울은 유대인이다. 그는 믿음이 중심이 되는 관점에서, 동족이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에게 유대인은 제3자이지만, 바울에게 유대인은 동족이고 유대인 문제는 바울 자신의 문제이다.

유대인이 쓰는 말과 거기 들어 있는 개념은 결코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울은 예수를 믿지만, 유대인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바울은 거기에 대해 설명할 의무감을 느낀다.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 예를 제시해 준다.

그들은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 믿는 과정에서 율법에 집중했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가 이스라엘 역사에 혼재해 있다. 바울 시대 유대인들의 선택은 믿음이 아닌 율법이었다.

그들의 모습과 이방인의 모습은 대조를 이룬다. 이방인은 그들에 비해 아무런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랜 시간 신앙을 이어온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바울은 성경 이사야를 인용하며, 시온에 있는 ‘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돌은 성전과 같은 중요 건물을 튼튼하게 짓는 재료로 사용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그리스도와 관련되는 것을 본다면, 돌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관련 있다. 동시에 돌은 최초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나타내기도 한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에서 앞에 놓이는 형용사 ‘부딪힘과 거침’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 궤도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바울 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계속 믿고 있었다면, 그 돌은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 아니고 건축에서 사용되는 기초돌이거나 머릿돌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에 이른 선조들이 있었지만 아브라함, 다윗 같은 선조들의 신앙에 이르지 못했다. 그들의 열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의 달음질하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 해도 신앙의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 결국 그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목적지에 이르고자 했다.

율법을 통한 그들의 방향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맞지 않았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아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 수단이 목적이 되어, 유대인들은 율법의 실천에 매달리고 그것으로 의롭게 되고자 했다.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보다 율법의 실천에 힘쓰며 신앙의 즐거움을 잃어 버렸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보다 율법에 힘쓰면서 믿음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율법과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유대인과 바울 사이 겉모습을 보고 그 둘 사이를 구분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율법과 복음은 함께 가는 것이지만 신앙을 위해 그 둘은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

두 사람이 예배당을 짓고 있다. 한 사람은 의무감에서 예배당을 짓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예배당을 짓는다. 두 사람의 헌신은 우리 눈에 똑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구원에 감사함으로 예배당 짓는 사람을 받으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믿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이 그 믿음 속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말 감사한 일이다.

맑은 공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좋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황사와 같은 탁한 공기 속에 있다면, 신선한 공기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신앙에 머물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곤 한다. 그가 이단에 빠지기 전, 그 신앙의 열정은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이단에 빠지면 그가 다시 되돌아 온다는 보장을 누구도 해줄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늘 응답되고 있다면, 삶의 어려움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기 때문이다.

우리 행위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고 있다는 표시일 뿐, 그 행위가 하나님의 축복하심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결론

시온에서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됐다는 그 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믿음의 기초석이 됐다. 바울의 동포 유대인의 실패는 믿음이 아닌 율법의 행위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신앙 중심에서 행위 중심으로 돌아선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우리 믿음의 시작은 그리스도였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았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아름답고 선해 보여도, 그것은 우리 목적이 아니다. 우리 목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

문배수
▲문배수 박사.
문배수 교수(대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