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스트 처치 크리스천 케어 센터.
▲크라이스트 처치 크리스천 케어 센터. ⓒCourtesy of Christina Stanton
뉴욕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에서 10년간 선교 책임자로 사역한 크리스티나 레이 스탠튼(Christina Ray Stanton)이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하나님께서 힌두교도의 개종을 사용하셔서 수천 명의 인생을 변화시키시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스탠튼은 칼럼에서 “빈곤, 범죄 및 불의와 관련된 문제는 이웃, 도시, 심지어 국가를 압도할 수 있다. 이러한 엄청난 문제에 직면해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며 말문을열었다.

그는 “그러나 아룬쿠마르 마이크 선커와 같은 사람들은 ‘희망 없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눌 끝없는 기회를 본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스탠튼은 “마이크는 2021년 사망할 때까지 수천 명을 도왔고, 그의 삶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라며 “마이크의 유산은 특히 가장 성공적인 노력 중 하나인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힐브로우 지역에 소재한 ‘크라이스트 처치 크리스천 케어 센터’를 통해 이어진다”라고 했다.

스탠튼은 “73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이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이들을 구출하고 안정적인 환경으로 데려와 보호, 양육 및 교육을 제공했다. 이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승리자로 존경받고 있다”고 했다.

이어 “마이크는 또한 시설에 있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영적인 빈곤에서 구원하시고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놓으신 구주를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스탠튼에 따르면, 마이크는 1947년 7월 4일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태어났다. 인도에 뿌리를 둔 그의 부모는 힌두교도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다. 마이크와 그의 8남매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자랐다.

마이크가 1970년 레누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독교 선교사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복음을 전하자 마음이 동요되었다. 읽을 책을 찾던 마이크는 어느 날 아버지가 옷장 위에 던진 먼지 투성이의 성경을 발견했다. 1975년 10월 23일 오후 6시 30분, 마이크 선커는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바쳤다.

레누와 아이들은 그를 따랐지만, 그의 부모는 처음에는 그를 거부했다. 마이크의 아들인 아지쓰는 “아버지는 개종 1년 만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부모와 복음을 나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삶에 당신의 능력을 계시하셨다”라고 했다.

마이크와 그의 가족은 인디언 공동체의 개혁교회를 출석했다. 아일랜드에서 온 두 명의 성공회 선교사가 마이크에게 제자 훈련을 지도했고, 마이크는 그의 믿음을 나누는 데 열정을 쏟게 됐다. 그는 선교단체에 합류한 후 1979년 케이프타운에 있는 성경대학에 다니기로 결정했고, 졸업 후에는 현재 ‘REACH SA’로 알려진 남아프리카성공회에서 전임목사가 됐다.

스탠튼은 “마이크는 피닉스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피닉스 교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로 높은 수준의 빈곤, 실업 및 범죄로 유명한 지역인 크라이스트처치 힐브로에서 담임목사로 섬기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했다.

마이크는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지역의 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운 시기에 처한 주민들을 돕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노숙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교회에서 급식소를 시작했고, 수백 명을 환영하는 쉼터를 열었다.

1999년에 힐브로 주변 미첼스트리트호텔이 시장에 나왔고, 마이크는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아지쓰는 “아버지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교회와 단체, 기업을 방문했다”고 했다.

마이크는 호텔을 고아원으로 등록했고, 이는 2000년 비영리단체가 됐다. 마이크는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고아원에 수용했다. 센터는 4~5명의 아이들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고아원이 아이들을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나자 요하네스버그 당국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아이들을 시설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시설이 120명의 수용 인원에 도달하는 데 불과 몇 년이 걸렸다. 센터는 20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두 개의 캠퍼스로 확장됐다.

마이크의 아들 아지쓰는 “아버지가 좋은 교육이 성공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라며 “아이들이 이곳에 왔을 때 기초 교육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았다. 여러 학교와 연락을 취하여 어린이를 등록했다”고 밝혔다.

마이크 목사는 학업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아이들의 영적 발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20년 동안 그는 그곳에 있었고, 모든 아이들에게 실제적인 필요를 제공하고 하나님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