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한국개혁신학회 전 회장,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

4. 참된 교회와 예배의 본질

칼빈의 예배 신학은 교회론의 중심 부분이기에, 먼저 칼빈이 교회의 개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공적인 예배는 눈에 보이는 교회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들이 작동하는 곳이다. 말씀의 명령 앞에서 성도가 열정적인 반응을 드러내어서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과 경건을 증진시켜나가는 믿음의 연습이기도 하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이 활발히 정립되어가고 있을 때에, 칼빈은 교회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을 근원적으로 중요시했다. 칼빈의 선택교리와 예정론이 훗날 수많은 논의의 대상으로 전개되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근거를 중요시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기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덧없는 인간의 판결을 넘어서서 참된 교회의 궁극적인 영역이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이 교회론에을 전개할 때에, 그의 선택교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일관성있게 추진되어진 것임을 제시한다.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면서, 칼빈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것을 말했다고 해서, 칼빈이 무조건 선택론과 예정 교리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아버지 하나님의 친절하심에 의해서, 성령의 유효적 작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오게 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보화이자,
인격적인 소유가 된 자들이다.”

위 문장과 연결된 부분에서, 칼빈은 믿는 자들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서 신적으로 한 교회 안에 회원됨으로 세워진다”고 규정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손으로 만져본다거나, 눈으로는 확인해 볼 필요가 없다. 교회를 보다 폭넓은 맥락에서 볼 때에, 사도신경의 문구로 고백하는 단어가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칼빈도 하나의 외적인 교회에 대해서 적용하고 있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를 말하면서도, 보이는 교회에 대한 강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런 약속들이 적용되어진다는 것을 느낄 때에,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지키고자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서 택함을 받았다는 교리는 칼빈이 타락 후, 죄의 영향 하에서 영적 무능력 상태에 있는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꿰뚫었기에 나오는 신학적 해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칼빈이 교회란 하나님의 택하심 속에서 예정함을 받은 백성들이라고 설명하는 것의 배경으로 그의 신론, 인간론, 구원론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일관된 안목에서 근원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의 가시적 집행

교회가 성삼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공동체로서 세워졌다면, 그 내적인 생명의 교통은 예배를 통해서 제공되는 은혜로 인하여 작동하게 된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칼빈의 교회론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핵심이요, 근간을 이룬다.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곳에서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하는 가장 집중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의 유형적인 모체가 바로 “보이는 교회”인데, 가장 진정한 형태가 예배이다.

성도들이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은혜와 도움을 얻는데 다른 방법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걸음씩 자신이 양떼들을 예배를 통해서 이끌어 가신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여 성도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며, 양심을 밝혀서 조명하심으로 말씀을 받게 하신다. 여기서 칼빈은 성령에 대해 강조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반응하도록 하는 원천적인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와 예수님이 제정한 바에 따르는 성례들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런 것들을 식별하는데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얼굴”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보이는 교회를 대해서 칼빈은 이처럼 매우 적나라한 표현을 사용했던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나 제세례파의 왜곡됨을 보다 분명히 알리고자하는 의도였다. 이처럼 누구나 참된 교회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시각적인 언어를 채용해서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면 참된 교회임을 확인하는 표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들려지며,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대로 성례가 집행되는 곳이 참된 교회다.”

칼빈이 단지 두 가지 표지만을 규정한 것은 루터파 신앙고백서 중에서 초창기에 나온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Augsburg Confession, 1530)에 담겨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에, 큰 차이가 없다. 칼빈이 강조한 참된 교회의 두 가지 표지들은 루터, 멜랑톤, 부써 등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들 표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가 가장 신실하게 진행 되어질 때에, 참된 교회의 여부가 외부적으로 드러난다. 칼빈은 최소한의 표지들로서 두 가지를 언급했지만, 교회의 본질 (the church’s esse)을 설명하는 부분 (기독교 강요, 4권 12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표지로서 “권징” (discipline)을 강조했다. 또한 칼빈은 성도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고백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보다 특정한 표지들로서는 1) 믿음의 고백, 2) 삶의 모범, 3) 성례들에 참여함이라고 규정했다.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는 공적인 예배의 내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 참된 교회를 구별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표지들이 실현되는 곳은 예배가 진행되는 현장에서다. 참된 교회의 핵심적인 표지들은 성도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진행되는 예배에서만 구체화된 표현들을 볼 수가 있다. 참된 교회는 예배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로서 모두가 볼 수 있는 특징을 드러낸다. 반대로 말하자면, 교회의 모임이 없는 곳에서는 말씀, 기도, 성례, 구제 등의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

참된 예배는 먼저 말씀에 중심을 둔다. 그리고 성례를 시행한다. 이들 두 가지 내용들은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시행되는 현장이며, 예배하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믿음으로 그 자리에 참여한다.

“주님의 거룩한 말씀과 성례, 이들 두 가지 가운데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그의 은혜의 보증을 제공하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말씀은 믿는 자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그 어느 것보다도 말씀의 선포, 복음의 합당한 설교는 교회의 중심으로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임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장 신뢰할 수 있도록 지적해주는 표지이다.

“설교를 통해서 전달되는 은혜의 복음만이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며, 배움과 진보를 통해서 공통된 마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교회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설명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친히 회중들 가운데서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이러한 것들을 알도록 하시고자, “땅에 있는 도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보화를 주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해서 교훈 가운데서 비치신다”고 하면서, “성소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하신 구약성경의 경계하심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이와 유사하게, 신역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비추던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안에서 빛난다”고 지적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신을 영적으로 알게 하시고자 그의 교훈들의 거울 속에서 계시하신다. 유효적 설교와 교훈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보이는 은혜가 표현되어진 것이라는 칼빈의 강조는 매우 인상적이다. 말씀과 성령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친히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신의 사역자들이 증거하는 것을 듣게 하신다.

예배의 핵심 내용이자, 종교개혁 시대에 가장 큰 신학적 논쟁은 성례들에 관한 교리적 정립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례들은 “경건의 총체”이자, “거룩함의 요약”이다. 성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보이지 않는 은혜”가 실재이고, “상징적인 형태”를 보는 것이요, “거룩한 은혜의 외적인 상징”이라는 개념이 칼빈의 기본 입장이다. 이런 해설들은 칼빈이 어거스틴과 피터 마터 버미글리 등의 글에서 인용하기도 하고, 참고한 것들이다. 성례들은 선포된 말씀에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인 치는’ 것이다.

“성례들은 분명히 약속들을 가져온다; 이 특징이 말씀에 이어서, 넘어서서
인생으로부터 하나의 그림 안에 채식화 되듯이, 우리를 위해서 제시된다.
.. 참으로 신자들이 자신들의 두 눈으로 성례들을 보고 있는 그 때에,
물체적인 현상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성례들 가운데 감춰져 있는
그 고상한 신비로움들에 깊이 젖어서 묵상하면서 한 걸음씩 올라가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성례에서의 은혜 주심에 대한 모든 신비로움을 자신이 모두 다 이해 한다기 도리어 믿음으로 느낀다고 하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면서, 선하심과 친절하심에 대한 감사의 성찬이다. 성만찬은 즐거워하도록하며 찬양하고, 감사를 올리도록 한다.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내려주시는 생명의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