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복음 특성 3가지, 약함과 착함과 주변 지향적
모든 피조물들, 삼위일체 하나님 경배하고 하나 돼야
교회와 정치, 서로 이해하고 끌어안고 포용하는 길로

제목: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복음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본문: 고린도전서 2:3, 사도행전 10:38; 13:46, 에베소서 2:13-16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전 회장)
▲본지 편집고문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전 회장). ⓒ송경호 기자
부족한 사람을 오늘 크리스천투데이 1천호 발행 감사 예배에 불러 주시고 권면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탁을 해 주신 천 환 회장님과 류재광 사장님과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신문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님에 대한 치하의 말씀도 드립니다.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이대웅 기자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복음의 특성’ 세 가지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소원’ 세 가지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약함’입니다.

약할 때 강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특성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너무 강하고 지혜로워진 것입니다.

세계적 기독교 지도자였던 영국 존 스토트 박사는 영국 케직 사경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헬라의 지혜로 포장하지 않고 로마의 웅변술로 각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된 복음 전도자의 특성도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무슨 물건이며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나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백했고, “나는 만물의 찌끼” 즉 시궁창에 내버리는 음식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자격도 약함과 어리석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6, 27)”. 이제 우리는 약함을 통해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강함과 능력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착함’입니다.

부족한 저는 언제부터인가 설교는 은이고 신학은 동이고 체험도 동이지만, 착한 삶이 금이란 말을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랜시스와 이기풍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라고 지적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산상 설교를 하시면서 착한 행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사도행전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복음이 여러 곳으로 전파된 것을 기록했습니다. 도르가와 고넬료와 바나바와 루디아의 착한 행실을 통해 복음이 이곳 저곳에 전파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셋째로 기독교 복음의 또 하나의 특성은 ‘주변 지향적’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 중 하나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민족은 한반도라는 지형적 특성과 유교라는 사회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개인과 가문 중심적, 지역과 민족 중심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주변 지향적’입니다. ‘주변 지향적’이라는 말은 어디를 가든지 그 지역 안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 지역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화해와 협력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복음은 이미 주변 지향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하실 때 그의 관심을 자기 본토나 아비 집에 두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창 12:3)”에 두도록 하셨습니다. 이사야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의 사명을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는 이스라엘 회복에 머물지 않고 “이방의 빛을 삼아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사 49:6)” 하는데 두도록 하셨습니다.

신약의 복음도 분명히 주변 지향적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실 때 지역적으로는 갈릴리 사마리아 욥바 가이사랴 안디옥을 통해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 등 주변과 이방으로 퍼져나가게 하셨고, 사회적으로는 중심에서 소외된 버림 받은 죄인들과 병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사람은 저주 받았던 병자들과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3)”.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6)”. 결국 사도 베드로도 사도 바울도 주변 세계로 향해 달려간 이방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물론 그의 자녀들을 향하고 계시지만, 그보다는 ‘주변’과 ‘땅끝’과 ‘이방’을 바라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인종적 정치적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주변에서 신음하는 길 잃은 양들을 향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인권 개혁도 중요하지만 복음과 사랑을 품고 그저 주변과 이방으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주변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복음의 특성 세 가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약함과 착함 중심이고, 주변 지향적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복음적인 삶을 가장 모범적으로 산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랜시스와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는 한경직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이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한 목사님과 같이 있으면 부족한 부분들을 많이 느꼈기에, 그 분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모여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어린이 시절 삶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면 1살 때부터 11살 때까지 북한의 신의주와 평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교회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일본 통치 시대와 공산주의 통치 시대 때 자주 감옥에 붙잡혀 가시는 고난을 많이 당하시다 나중에는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일본 통치나 공산주의 통치에서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주일 성수와 예배 드림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기 위해 감옥에 계시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을 찾아가 “저 남쪽으로 갈래요”라고 했더니,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 유춘택 사모님에게 제가 남쪽으로 가고 싶다는 고백을 했더니 어머니는 울면서 “그러면 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만 11살 때인 1948년 8월 어느 날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 뛰어넘어 남한으로 오게 되었고, 결국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삶을 평생토록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처음에는 반일, 반북, 반공주의자였고 나중에는 반타종교, 반무슬림 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점점 바뀌어져서 친일, 친북, 친공, 친타종교, 친무슬림주의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신앙 생활을 정성껏 하면서 존 스토트 박사님과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교회사에 나타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제 삶의 모습이 조금씩 바꾸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주의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결국 저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궁극적으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니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비전입니다.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점입니다. 부수적인 것도 아니고 선택적인 것도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연합하여 하나 되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과 자연 만물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전에 보여주셨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 찌어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시 148:3, 9, 10, 13)”.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계급과 종교와 이념과 신학과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모두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아름답게 살라고 분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화해와 평화와 하나 됨’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와 정치 안에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화려한 예배나 정통 진리의 선포나 대중적인 행사 이전에, 서로 붙잡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성자 예수님을 아주 조금이라도 닮고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먼저 낮은 자세와 온유 겸손한 자세를 지니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삶을 살 때, 양극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정치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자극과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적대적으로 치닫고 있는 동서와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도 조금씩 이루어질 것입니다. 양극으로 갈라지고 있는 교회와 정치가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고 포용하는 하나되는 길로 달려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우리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그리고 십자가의 정신을 몸에 지니고 사신 스데반 집사와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부족한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흔적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날마다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 즉 모두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혹시 제가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북한 동포들을 끌어안고 하나되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고, 아프가니스탄 같은 모슬렘 사람들을 끌어안고 하나되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이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가득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