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부인 통곡
▲플랑드르 미술가 제라드 세거스(1591–1651)의 ‘성 베드로의 부인(Denial of Saint Peter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소장.
본문: 요한복음 7장 25-27절

주님의 자기변론 후 장면입니다. 주님을 책잡으려는 유대인에게 주님은 자기변호를 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변호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로 나뉩니다. 주님에 대한 반응이 여러 가지의 태도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배경으로 ‘자기변호 후의 군상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을 관망하는 사람이 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25-26절)”.

사태를 관찰하는 사람은 주님과 지도자들의 갈등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망의 태도를 갖는 사람은 속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을 믿는 것인지, 믿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속을 드러내면, 불리해질까봐서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관망의 태도를 보인 사람들은 대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본문이 예루살렘 사람들이라고 명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명절을 위해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과는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살아가는 편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지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음모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기를 “바로 그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하는 자가 이 사람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지도자들이 주님을 정말 잡으려는 계획을 실행하려는 것인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방관적인 태도의 사람들입니다.

2.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어디에 합세해야 하는지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쪽의 분위기가 우세한지에 민감합니다. 눈치를 살피는 이들은 공개적으로 말하면서 상황을 더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정체는 분위기에 편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지도자들에게 “이 사람이 바로 그 그리스도가 아니냐?”하면서 편승하는 발언을 합니다. 지도자들의 분위기에 편승하면서 주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논쟁에서 주님의 말씀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다루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기변명에 대해서 논박하지 않습니다. 물론 안식일을 어겼다는 혐의를 성공적으로 반박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주님을 체포하거나 알려진 음모를 수행하는데 협조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주장을 확신하면서 변호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편승의 태도는 우유부단(優柔不斷)입니다.

그렇게 편승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태도가 드러납니다. 바로 책임회피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원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태도를 갖습니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비겁한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을 부인하려는 사람이 있다
주님을 부인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시키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27절)”.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상당한 권세를 가진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주님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고 주장합니다. 주님의 출신을 문제로 삼으면서 도저히 메시야 일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자신들이 주님을 부인하면서 책잡으려는 이유가 합당하다는 정당성입니다.

지금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세를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권세를 지키려고 옳지 않은 편에 서는 영적 까막눈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씨와 동네에서 나올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한 남자로서 어머니와 형제와 자매와 함께 사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의 구름을 타고, 말라기의 예언대로 성전에 갑자기 임하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더욱 이사야의 예언에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느니라(이사야 53:2)”가 성취되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까닭입니다. 세상의 권세에만 집착하다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결과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4. 정리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쪽엔가 서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원하지 않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야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잘 판단해서 적절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주님의 편에 서서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는 주님을 관망하는 사람이 되지 말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되지 말게 하소서. 주님을 온전히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