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인터뷰하는 이어령 교수. 그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며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고, 기적이다.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라고 질문했다. ⓒ베리타스포럼
지난 2월 영면한 故 이어령 교수가 청년들의 질문에 답했던 생전 인터뷰가 공개됐다. 9월 27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 과학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2022 베리타스포럼 고려대’에서다.

베리타스포럼 고려대 측은 코로나19가 한창일 당시 故 이어령 교수와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촬영했으나, 온라인을 통해 공개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한 이어령 교수 측의 요청에 따라 이날 오프라인 참석자들에게만 공개했다.

‘이어령, 청년에 답하다: 마지막 7가지 인생질문’을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서는 이어령 교수가 청년들이 영상으로 보낸 7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마지막 인생질문’이라고 했지만, 진짜 ‘마지막’은 아니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과 마침내 만나기까지, 육신을 깎아가며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계속 거쳤기 때문이다. 이날 공개된 인터뷰보다 훨씬 야윈 모습으로 응축된 지혜를 전수하는 영상들이 온라인상에 적지 않다.

해당 질문들은 베리타스포럼 고려대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것이다. 청년들은 ①디지털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법 ②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③지성 발전과 영적 성장의 관계 ④예수님을 만나면 가장 묻고 싶은 질문, 인간이 신의 뜻을 이해할 가능성 ⑤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 ⑥평생 깨달은 사랑의 본질 ⑦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법 등을 물었다. ④번 질문이 2개여서, 실제로는 8가지 질문에 답한 셈.

베리타스포럼
▲이어령 교수의 인터뷰를 청취하는 학생들. ⓒ베리타스포럼
미공개 인터뷰가 ‘최초로, 유일하게’ 공개되는 자리답게, 이날 강당에는 이례적으로 400여 명이 참석해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자리가 부족해 중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통로 계단에 걸터앉기도 했다. “이어령 교수님을 좋아한다”며 참석한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도 보였다. 이 교수와의 인터뷰 영상 상영 후에는 김학철 교수(연세대)와 배지완 교수(고려대)가 대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령 교수는 ‘이야기꾼’답게 위트를 섞어가며 청년들에게 지혜와 통찰을 아낌없이, 신나게 나눠줬다. 딸 故 이민아 목사를 통해 그에게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무엇 때문에 믿는 신앙’을 경계하는 한편, ‘지성’과 ‘영성’은 둘로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도 펼쳤다.

답변에 앞서서도 “오늘 대담에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저는 평생 글을 쓸 때 남을 가르치거나 설득하지 않았다”며 “말투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굴 보고 충고하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교회가 어떻고 믿음이 어떻고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저는 참회하고 고백하며 안에서 싸우는 혈투를 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지만 특히 밤이 되면 투쟁을 겪는다. 저 자신을 위로하기도 바쁘다”며 “(대담을) 기대하지 마시고, 제 이야기에 설마? 진짜야? 그래? 하면서 회의를 갖고 들으시면,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운을 뗐다.

故 이어령 교수가 영상 촬영 후 공개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인터뷰 내용은 평소 그가 인터뷰와 강연 등에서 풀어준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비교적 건강하던 때 촬영됐기에, 기독 청년들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조언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아 오래 오래 기억되고 회자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다음은 그 7가지 질문에 대한 요약과 복기.

이어령
▲이어령 교수는 “제 이야기를 회의를 갖고 들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리타스포럼
1. 어떻게 하면 대중적 쏠림 현상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디지털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첫 질문에 대해, 이어령 교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문명 발달과 미디어 홍수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아졌지만, SNS 등을 통한 여론이나 소위 선동적 가짜뉴스에 쉽게 휘둘리며 오히려 주체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

인터뷰 당시 2030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그들에 대한 공략법을 고민하고 있지만, 이는 어리석은 소리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2030은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느낌을 증폭시키고 우리가 몰랐던 것을 젊은이의 감수성으로 바라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지, 우리와 다른 2030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 질문에 예전에 했던 대답은, “검색(檢索)하지 말고 사색(思索)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궁금한 내용을 클릭 몇 번으로 쉽게 알려 들지 말고, 스스로 깊이 생각해 답을 찾아내라는 것.

그런데, 이 말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2030이 ‘검색’을 하는 것은, 이미 사색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 사색했지만 여전히 궁금하고, 모르겠고,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어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찾아본 것이었다.

‘쏠림 현상’에 대해,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계몽주의’를 겪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도 지적했다. 17-18세기 서구에서 과학과 함께 일어났던 이성과 지성이라는 터널을 지나지 않고 그대로 개화기에 들어와, 우리는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

지성과 회의(懷疑)는 영성과 믿음의 반대말이 아니라, 이것들이 생기게 하는 필요악이자 디딤돌이라고도 했다. 대단하게 여겼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은, 지성이 창조적 의미를 가졌을 때이다. ‘창조적 지성’이란 유일한 것이다. 창조는 지성과 회의를 통해 분석하고 차이를 나타내며,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을 새롭게 이해하게 한다.

이어령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 디지털 활용에 있어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남들이 안 하는 방법’을 쓴다고 했다. ‘나는 지혜를 사랑하는지, 육체를 사랑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는 소비하지만, 지혜는 창조하기 때문. “창조적으로 가면, 쏠림 현상이고 뭐고 없습니다.”

지성과 창조는 대립이 아니다. 생명은 그 자체가 감동이고 눈물이다.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즉 과학이 몰랐던 것이 그것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그가 발견한 중력을 거슬러 거기까지 올라갔기 때문 아닌가. 뉴턴은 떨어지는 과학의 법칙은 발견했지만, 올라가는 생명의 법칙은 발견하지 못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그렇게 짓누르는 중력을 이겨내고 하늘로 향한다. “뉴턴, 너 바보야”라는 농담을 곁들인 이 교수는 이것이 ‘영성’이라고 역설했다.

베리타스포럼
▲학생들이 대담을 청취하고 있다. ⓒ베리타스포럼
2.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본질적 질문에 보편적 답변이 있을까요.

두 번째 질문 앞에 빠진 것은 ‘무엇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 ‘목표’에 따라, 열심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영혼이라도 끌어모아 집을 사기 전에, 한 번쯤 물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인생이 그 방향으로 ‘쏠림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어령 교수는 ‘영끌’ 해서 집을 사고 나면, 그 다음 목표는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집을 사서 아이를 키우는 등 여러 다른 목표를 가진 사람과, 집을 갖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 같은지 물은 것이다.

그는 어쩌면 손쉽게 답을 얻어 해결하고 정리하고 싶어 던지는 질문에, 우리가 그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 되물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한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살다 보면, 허탈함도 느끼고 고통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남들과 똑같은 목표가 아닌 진정한 삶의 목표를 발견했다면, 그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산모의 고통’처럼, 새로운 생명을 만나는 데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찾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시여’ 하고 두 번이나 부르셨다.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절망의 언어이지만, 곧바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시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절망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반대로 요즘 ‘희망고문’이라는 말처럼, 가짜 희망의 끝은 절망이다.

이윽고 이어령 교수는 답한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고. 그 이유는,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고, 기적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것을 넘어, 오늘 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의 진리, ‘하나님 주신 생명의 귀중함’을 이 교수는 청년들에게 역설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어령
▲이어령 교수는 “새로운 생명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베리타스포럼
3. 개인의 지성적인 발전이 영적 성장과 관련 있을까요? 지성과 영성은 독립된 영역인가요, 아니면 불가분의 영역인가요?

회심 후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대표작으로 남긴 이어령 교수는 지성과 영성을 대립 개념으로 보는 것부터가 ‘우리의 원죄’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 세상에 지성 따로, 영성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잘못이라는 것.

우리는 원죄를 겪지 않고, 지성이 저지르는 잘못을 겪지 않고서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을 영접할 수도 없다. 마치 사탄의 언어와도 같은 의문을 해결하고 벗어빌 때, 영성의 세계가 확 다가온다.

평생 지성과 영성 사이에 있는 ‘문지방’에서 회의했던 자신의 경험도 곁들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알량한 지성’을 버리고 완전히 ‘추락’해야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지만, 아직까지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

첫 번째 질문 답변처럼 지성이 필요악이자 디딤돌이라는 말도 다시 꺼내면서, ‘지성은 버리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성 없이, 즉 회의와 부정의 시간 없이 곧바로 영성의 세계로 갈 수도 없다. 그래서 그가 쓴 또 다른 책 제목이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원 제목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이다.

80년 동안 배우고 익힌 지성이 마치 중력처럼 문지방을 넘지 못하도록 끌어당겼지만, 양쪽의 팽팽한 힘에 무중력 상태였던 그를 끌어당긴 것은 암 발병 소식이었다. 갈등과 회의, 지성의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질병’이라는 최후의 도전이 그를 반대쪽으로 이끌었다. 첫 답변에서 답했듯 “육체는 소비하지만, 지혜는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선물로 주신 생명(Gift), 가져가십시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됐다. 숨쉬는 것부터 평생 갈고 닦아온 지성의 세계까지 모두 내 것이 아님을, 생명마저 창조주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임을 아직 창창한 청년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그 위대한 재산(Great Gift)들은 반납하는 것일 뿐이다. 내 것이 아니었기에, 원 주인이 달라고 하면 그대로 내주어야 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라틴어로까지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그렇게 중요한 영성이지만, 영성만 강조하는 교회라면 경계해야 한다. 우리에겐 몸(body)과 마음(mind), 그리고 영혼(spirit)이 있는데, 몸과 마음은 컨트롤할 수 있지만 영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사교(邪敎)가 나오고,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회의를 갖게 만든다.

이어령
▲이어령 교수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면, 엉엉 울 것 같다”면서도 “그동안 우리 때문에 얼마나 고생 많으셨냐고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리타스포럼
4.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 가장 먼저 여쭙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의 뜻과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신정론을 비롯한 각종 신학적 질문 대신,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이어령 박사는 “먼 조상이나 어머니를 만났을 때처럼 엉엉 울 것 같다”고 답했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예수님·하나님이 계몽주의를 겪은 서양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란다. ‘아바 아버지’라는 말씀처럼 친근한 부모님을 대하듯, 인격적인 접근이다.

그리고 ‘우리 때문에 얼마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때문에 얼마나 애태우셨어요? 우리 잘못하는 거 보고 얼마나 가슴 아프셨어요?’ 어리광 부리듯 이렇게 호소하고픈 분이 ‘이어령의 하나님’이시다. 그래도 탕자처럼 받아주시는 그분이기에, 너무 큰 죄를 지어 예수님을 그렇게 아프게 했다는 죄송스러움이 밑에 깔린 K-은유적 표현이랄까.

서양인, 특히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들이라면 ‘6백만 명이 수용소 안에서 죽을 때, 하나님 어디 계셨습니까?’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단다. 하지만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빅터 프랭클은 그 처절한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고 증언했다. 다 죽어가면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빵을 주고, 그 사람을 위해 자기 아픔을 대신 짊어진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완전하다면, 종교를 가질 필요가 있겠느냐고 또 다시 반문한다.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신의 뜻을 알 수 있다. 거꾸로 하면, 완전한 사람은 절대로 완전한 신의 뜻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 대부분은 언젠가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고, 그것을 깨달을 때 겸손과 생명의 귀중함, 자연의 아름다움과 기쁨의 놀라운 세계가 새롭게 다가온다.

‘영감’에 대해선 문학 작품을 쓰던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 설명한다. 시를 쓸 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기막힌 구절이 나온다는 것. 영성의 10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이 영감은 많은 과학자들도 새로운 이론이나 법칙 발견의 순간 경험하는 그것이다. 때로는 꿈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정량적(定量的)인 과학의 세계도, 정성적(定性的)인 영감과 만나야 풀릴 수 있다.

이어령
▲이어령 교수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이라고 했다. ⓒ베리타스포럼
5.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며 올바른 길을 위해 사는 것은 헛수고인가요?

먼저 이어령 교수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귀하고 보람 있는 인생이라고 칭찬하면서 운을 뗐다. 지금껏 30여 년간 살면서 이룬 것이 없더라도,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이 있기에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덕담을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 먹고 사는 현재 모습에 만족하면서 두드리질 않는다는 현실도 지적했다.

예수님의 ‘잃은 양 비유’ 속 한 마리 양이라는 격려도 전했다. 하나님께는 아흔 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양이 다르지 않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직접 찾으시는 분이시라는 것. 비록 길을 잃었더라도, 하나님 찾으시는 한 마리 양이라는 자신감으로 멈추지 말고 세상을 바꾸고 올바로 살기 위해 계속 분투하라고도 했다. 그것이 절대 헛수고가 아니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이다. 이어령 교수는 벽돌과 돌멩이를 비교하며 이를 설명했다. 벽돌은 백 장 있어도 찍어낸 거라 모두 같다. 하나 없어지면, 다시 갈아 끼우면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똑같은 돌멩이는 하나도 없다. 돌멩이가 하나 부서지면, 이 지구상에서 그만큼의 빈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모두 독특한 하나님 형상이기에, 하나님 부르실 때 이 세상 떠나면 이곳에는 그의 빈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곧 세상이 바뀌는 것과 같다. 우리는 80억 인구 중 오직 한 사람이다. 자신과 대화하고 있는데 뭐가 평범한 사람이냐고, 이 교수는 유쾌하게 되묻기도 했다.

이어령
▲이어령 교수는 아가페와 에로스에 이어 ‘필리아’, 생명애·장소애·창조애에 대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리타스포럼
6. 교수님께서 평생에 걸쳐 깨달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며 말을 꺼낸 이어령 교수는 바울이 말한 ‘사랑’의 정의가 가장 아름답다고 답했다.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사랑에 대해 많은 분들의 글을 읽고 직접 쓰기도 했지만, 아직도 사랑에 대해 그 이상의 정의를 읽어보지 못했다면서.

하지만 역시 준비된 답이 있었다. 이미 ‘사랑’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었던 것. 그가 제시한 것은 우리에게 ‘남은 사랑’. 기독교에서 주로 찾는 아가페(agape)와 연인들 간의 에로스(eros) 사이, ‘필리아(philia)’가 바로 그것. 필리아는 우정이나 수평적 사랑을 의미한다. ‘필하모닉(Philharmonic)’ 할 때의 그 ‘필리아’.

그리고 필리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바이오필리아(Biophilia·生命愛), 토포필리아(topophilia·場所愛), 네오필리아(neophilia·創造愛) 등이다. 이 세 가지 ‘필리아’가 오늘날 교회와 나아가 전 인류에 필요하다고 이어령 교수는 일찍부터 주장해 왔다.

바이오필리아, 생명애는 생명체 간에 공생하고 상생하려는 의지와 사랑을 뜻한다. 크고 긴 안목에서 보면 생명체들이 먹이사슬에 묶여 서로 싸우고 잡아먹는 것 같지만 생명체가 서로 공생해 왔다는 것. 특히 21세기는 생명화 시대, 코로나19로 인간을 넘어 동물, 나아가 미생물과 바이러스까지 서로 공생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다.

인간과 사이좋게 지내던 바이러스가 오늘날 갑작스럽게 에이즈나 메르스, 코로나처럼 덤벼들고 있는가? 이 바이오필리아, 공생 관계가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이 교수는 분석한다. 특히 우리 인간에게 필리아가 없었던 것.

토포필리아, 장소애는 고향처럼 특별한 장소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네오필리아는 여태까지 하지 못한 것을 탐구해 보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꼭 옳다는 건 아니지만, 이런 주장을 펼쳐왔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

이 세 가지 ‘필리아’가 21세기 생명화 시대에 필요하고, 농업, 의학, 교육,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인지과학까지 다섯 가지가 중요한 덕목이다. 필리아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랑의 발전 또는 미래(?)와 같다고 느껴졌다.

이어령
▲이어령 교수는 “죽음보다 강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지만, 죽음보다 강한 것이 있을 때 죽음을 이겨내고 죽음보다 강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베리타스포럼
7. 선생님을 생각하면, 따님 이민아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이민아 목사님처럼, 우리는 어떻게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요?

이어령 교수는 질문자가 언급한 딸 故 이민아 목사에 대해, 그녀가 다시 보게 된 일부터 자신의 세례로 이어지는 일련의 ‘잘 알려진’ 스토리들을 다시 한 번 차분하고 진지하게 설명했다. (딸이 눈 뜬) 기적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재차 강조했다.

암 수술을 받지 않고 끝까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그의 모습도 딸에게서 온 것이고, 딸의 반도 쫓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메멘토 모리’라는 글귀를 기독교를 믿기 전부터 사인(sign)에 사용했다며, ‘덕담’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어느 의미에서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시대라는 것.

다른 종교들은 다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행복을 말하지만, 기독교만이 죽음을 이야기한다. 피 흘려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을 구주로 믿고, 내세의 천국을 소망한다.

이민아 목사는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암에 걸렸지만 많은 <땅끝의 아이들>을 품었고, 죽음 앞에서도 죽음을 이긴 자로서, <땅에서 하늘처럼> 살다 <하늘의 신부>가 됐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사랑이 죽음 같이 강하다고 했을 뿐이지만(아가 8:6),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다.

이어령 교수는 이를 가장 가까운 사람인 딸에게서 추체험(追體驗)하고, 자신도 암에 걸린 채로 끝까지 수술 없이 글 쓰고 생각하는 생활을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우리에게 없다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지만, 죽음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죽음을 이겨내고 죽음보다 강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로 그는 열정적인 인터뷰를 마쳤다.